〈 22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음.."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할까.
그걸 두고 고민하고 있으니 곧 깨닫게 되었다. 저 말을 부정하는 것도 애매하다는 걸 말이다.
나와 클레어가 연인 사이일 거라고 이미 단정하고 있는 이를 상대로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부정을 해본다 치자.
그리 되면 나와 클레어가 어떤 사이인지를 당연히 설명해야할텐데 거기에 대고 뭐라 한단 말인가?
단순히 스승과 제자 관계일 뿐이라고 사실대로 말하기도 애매했다. 이미 연인같은 짓은 다 해놓고서 이제와서 스승하고 제자사이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테니까.
"그럼 그걸로 한 번 줘보시겠어요?"
그래서였다.
섣불리 부정하는 대신 애매한 긍정을 택했던 것은.
내 딴에는 부정하는 쪽이 오히려 귀찮을 것 같아서 한 행동이었을 뿐인데 클레어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접객원인 남자를 상대로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내게 선수를 빼앗겨버린 탓에 그대로 입을 꾹 다물게 된 클레어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히끅..!"
딸꾹질하는 소리가 그녀의 붉은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동시에 어깨까지 들썩이는 꼴이 솔직히 말하자면 좀 당혹스러웠다.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일인가 싶었으니까.
그리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클레어의 얼굴 위로 민망함과 당혹스러움이라는 감정이 어렸다.
그런 그녀에게는 접객원이 내가 부탁한 것을 챙기러 가기 위해서 자리를 비운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을 것이다.
나름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내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쪽팔리는 상황인데 여기에 접객원까지 있었다면 단순히 민망한 수준에서 끝나진 않았을테니까.
물론, 지금 그가 자리에 없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긴 했다.
한 번 딸꾹질이 시작된 이상 돌아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그걸 멈춰놔야 민망한 꼴을 피할 수 있을테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때부터 클레어가 숨을 꾹 참기 시작했다. 그렇게해서 딸꾹질을 멈춰보려는 모양인데..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당황한 상태라는 점이었다.
원래 당황하면 평소에 잘 되던 일도 생각대로 되질 않는 법.
그 영향인지 한 번 시작된 딸꾹질은 쉬이 멈추질 않았다.
"히끅...! 끅..!"
무려 접객원이 내가 주문한 것을 들고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
덕분에 클레어의 얼굴 위에 자리하고 있던 민망함이라는 감정이 한층 더 몸집을 불리는 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멈추려고 한다고 해서 멈추겠는가.
저 분은 왜 저러고 있는 거냐는 접객원의 시선에 클레어의 딸꾹질은 한층 더 격해졌고, 당혹스러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서 나선 건 여기서 시간이 더 흐른다고 한들 나아질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죄송한데 물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아, 네네."
챙겨온 것을 잠시 좌판 위에다가 내려놓고 자리를 빠져나갔던 남자가 물이 반쯤 채워진 컵을 들고 돌아왔고, 자연스레 그것을 건네받게 된 나는 그걸 그대로 클레어에게 넘겼다.
보통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더라?
기억이 잘 안 났다.
분명 어떤 식으로 물을 마시면 딸꾹질에 직빵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순간적으로 떠올려보려고 하니 암만 머리를 쥐어짜내도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괜찮아요? 숨 꾹 참고 한 번 마셔봐요."
해서 생각나는대로 시켜봤더니 그대로 하더라.
숨을 한 10초 정도 꾹 참고 있다가 그대로 건네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대는데..
안타깝게도 딱히 효과는 없는 듯 했다.
잠시 딸꾹질을 안하길래 멈췄나 했더니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다시 한 번 히끅하는 소리가 터져나왔으니까.
그러면서 입 안에 살짝 남아있던 것이 잘못된 구멍으로 넘어가기라도 했는지 이제는 딸꾹질을 넘어 콜록대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사레라도 들린 듯 해서 클레어를 향해 다가가 그녀의 등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두들겨주었다.
딸꾹질과 사레의 이중공격으로부터 버티는 게 쉽지 않았는지 어느새 빨갛게 변한 클레어의 눈에는 눈물방울이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번만큼은 내가 해준 것이 효과가 있는 듯 했다.
등을 두들기다가 계속 두들기기만 하면 아플 것같아서 태세를 전환해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주기 시작하니 연신 콜록콜록 대면서 거친 기침을 터뜨려대던 클레어가 조금씩 진정이 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아서 등을 부드럽게 쓸면서 그리 물었더니 여태까지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 클레어로부터 돌아왔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는 탓에 커튼마냥 드리워진 검붉은 색의 머리칼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던 그녀의 귀가 빨갛게 물이 들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마침 또 시기가 가을 쯔음인지라 새하얀 귀가 빨갛게 물들어가는 모습이 서늘한 가을 공기 아래 옷을 갈아입는 나뭇잎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그렇게 귀를 빨갛게 물들이면서 내가 손으로 쓰다듬은 부분을 흠칫흠칫 거리길래 안심하고 가져다붙이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제대로된 반응조차 하지 못했던 아까하고 다르게 내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 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등쪽에 붙이고 있던 손을 떼어내자마자 들려온 건 아쉬움이 그득하게 담겨있는 한숨소리였다.
모처럼의 내 손길인데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웠던 모양.
누구처럼 꼬리라도 달려있으면 그걸 축 늘어뜨리고도 남았을 정도로 아쉬워하길래 피식하고 웃으면서 여전히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는 클레어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들겼다.
"보니까 딸꾹질도 같이 멈춘 것 같은데요?"
"어..?"
지금껏 소식이 없는 걸 보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된 고로 딸꾹질 때문에 잠시 뒤로 미뤄놓았던 수여식을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몸 좀 숙여보실래요?"
까치발을 든채로 하자니 왠지 모양이 살질 않을 것 같아서 그리 요청해봤는데 그 즉시 클레어가 날 향해 몸을 기울였다. 동시에 들어올린 손을 이용해 귀를 덮고 있던 옆머리를 슥 걷어내는 것이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나름대로 이런 순간을 고대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귀는 발갛게 물이 들어있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남성하고는 이렇다할 연이 없었던 클레어다보니 지금 이 상황이 은근히 민망하게 느껴지는 모양.
물론,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저토록 민망함을 느끼고 있는 데에는 명목상이긴 해도 스승과 제자라는 우리의 관계가 한몫했을테니까.
검과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면 대충대충 사는 것 같아도 은근히 고지식한 것이 클레어니 말이다. 아마 지금쯤 모르긴 몰라도 금기를 범하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지 않을까. 귀보다 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렇게 미열이라도 있는 것마냥 얼굴의 반절이 넘는 부분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붉은 입술을 꾹 깨물어 자꾸만 새어나오려고 하는 숨을 꾹 참고 있는 모습이 뭐랄까..
'하여간에 귀엽기는..'
왠지 모르게 한 번 골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마력같은 것이 있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걸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생각따위는 없었다. 나도 눈치라는 게 있었으니까.
이렇게 기대감을 잔뜩 끌어올려놓고서는 그따위 짓거리를 한다?
대체 뭣하러 그런단 말인가?
클레어가 뭔가 잘못같은 걸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해서 불현듯 내 안에서 고개를 치켜든 것을 꾸욱하고 내리누르며 훤히 드러나있는 클레어의 귀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러다보니 알게된 점은 그녀가 전장에서 오랫동안 구른 것 치고는 상당히 아름다운 몸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쟁영웅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면 상당히 오랜 시간을 전장에서 굴렀다는 소린데 지금 눈앞으로 드러난 클레어의 살갗에서 전투의 흔적같은 건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잘 관리한 여성들처럼 희고 고운 목선만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을 뿐.
그나마 흉터라고 나 있는 건 턱과 볼의 경계선 쯔음에 위치한 생채기라 부르기도 애매한 것이 전부였다.
적어도 지금 보이는 곳에서는 그랬다.
흉터의 형태를 보아하니 뭔가에 베인 것 같지는 않고 무슨 파편같은 걸 맞아서 찢어진 것 모양인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자그마한 흉터라도 클레어 본인은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걸까.
가만히 그쪽에 시선을 주고 있자니 가느다란 목선이 움찔움찔대며 꽤나 민감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손을 들어올려 흉터 부분을 가리려고 하길래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움직여 막아세웠다.
"일단 하고 있는 것부터 풀어야할 것 같네요."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리 말하면서 남은 손을 이용해 그곳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보았다. 엄지손가락이 그 자그마한 흉터를 스치며 지나갈 때마다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잔떨림이 그녀의 목덜미 전체로 번져나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흠칫흠칫 거리던 것도 잠시, 이내 클레어의 목에 힘이 바짝 들어가며 그곳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저걸 뭐라고 부르더라?
목 근육? 아니 핏줄이던가?
아무튼 그게 흰 살결 위로 도드라지는 광경을 잠시동안 눈에 담고 있다가 귀를 향해 손을 옮겼다.
귀걸이를 제거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석식인지 뭔지는 몰라도 귓볼 뒷부분에 찰싹 달라붙어있던 것을 조심스레 잡아당기니 느낌상 딸칵하는 느낌과 함께 떨어져나왔으니까. 그와 함께 앞부분또한 손바닥 위로 떨어졌고 말이다.
문제는 그러면서 드러난 풍경이었다.
"어.."
어째선지 마땅히 눈에 보여야할 구멍이 눈에 보이질 않았다.
그러니까 귀걸이를 차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할 것이 클레어에게는 존재하질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순간적으로 이해가 안 가서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의 귀에 붙어있다가 내 손바닥 위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기다렸다는 듯이 귓가로 울려퍼진 것은 딸칵하고 자석같은 것이 들러붙을 때나 날법한 그런 소리였다.
'설마..'
귀걸이는 차고 싶은데 귀를 뚫는 게 무서워서 자석 귀걸이로 때웠다는 식은 아니겠지?
설마 그랬을까 싶어서 해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을 클레어를 향해서 던지니 그런 내 시선을 느낀 클레어가 슬쩍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내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면몫없어하는 움직임 덕분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은근히 쫄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
따지고 보면 평소에 훈련하면서 입는 자잘한 부상 쪽이 고통으로 따지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허.. 참.. 이게 뭔..'
너무 어이가 없으면 헛웃음부터 나온다고 하더니만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허어..'하고 한탄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나왔으니까.
아무튼 현실이 그렇다보니 접객원이 추천한 귀걸이는 써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것을 다시 좌판 위에다가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렇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클레어가 내 손목을 움켜쥐지만 않았다면은 말이다.
그러지 말라고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제법 다급하게 내 손목을 움켜쥐길래 써먹지도 못하는 걸 어떻게 할 생각이냐는 뜻으로 클레어를 향해 시선을 던져봤다. 그랬더니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 뚜, 뚫으면 되지 않을까?"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이 찾아보면 방금까지 차고 있었던 것하고 비슷한 구조를 가진 귀걸이도 얼마든지 있을텐데 말이다.
설마 귀걸이가 이렇게 많은데 비슷한 것 하나가 없겠냐는 식으로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클레어 쪽에서 먼저 일을 착착 진행시켜 버렸으니까.
"여기서 뚫을 수 있죠?"
아니라고 말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처럼 개눈깔을 뜨고 그리 묻는데 거기에 대고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살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한채 접객원을 노려보는 클레어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온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클레어가 상당히 괜찮은 조건을 지니고 있음에도 남자라는 생물과 연이 없었던 이유를 말이다.
'저러니까..'
다가오는 남자가 없지.
호감을 품고 다가오는 남성도 그대로 돌아서게 만들 법한 얼굴이었고, 그것에 직격당해버린 접객원이 우리에서 탈출한 호랑이를 마주한 사람마냥 뻣뻣하게 굳은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결과 우리 앞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여, 여기 있습니다."
제법 살벌하게 생긴 물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