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티를 내질 않아서 그렇지 다른 나라랑 붙었으면 당연히 이겨야지라고 생각하는 건 클레어또한 마찬가지였다.
헌데 이렇게 시작하자마자 우리쪽이 가볍게 쳐발리는 듯한 광경이 눈앞에서 떡하니 펼쳐지고 있으니 아무리 자기랑 상관없는 종목이라 할지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겠지.
그 정도로 지금의 차이는 심각했다. 단순히 초반이라서 이런 것일 뿐이라며 자위하고 내일을 기약하기에는 힘들 정도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제국 측 부스를 방문한 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까.
분명 거기서 구매한 물건들을 자랑하며 자기들이 본 것에 대한 썰을 주변에 대고 자랑하듯 풀어댈 것이고 그건 그대로 스노우볼이 되어 격차를 한층 더 벌려놓겠지.
그 꼴을 보지 않으려면?
지금의 격차를 어떻게든 할 필요가 있었다.
중요한 건 부스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르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왕국을 대표해 뽑힌 몸들이니만큼 명석함의 정도가 차원이 달랐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이유는..
'부탁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지.'
그래, 분명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참가자와 남성진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제국이나 왕국 연합 측하고는 다르게 우리 쪽은 그 경계가 굉장히 모호한 편이니 말이다.
남성진임과 동시에 참가자인 케이스가 즐비한 탓에 이런 일에 참여시키기가 좀 그런 감이 없잖아 있었다.
막말로 당장 내일 댄스 경연이 예정되어 있는데 이런 곳에 나와서 힘을 뺀다?
그러다가 기껏 끌어올려둔 컨디션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경연에서 처참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그럼 그건 누가 책임져준단 말인가?
아니, 단순히 컨디션이 망가지는 선에서 끝나버리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지.
몰려든 인파에 밀려 부상이라도 입는 날에는..
'어우..'
살짝 한 번 상상해봤더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더라.
교류전에 목숨을 건 것은 여성들 뿐만이 아니었다. 여성들이상으로 교류전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이 바로 치열하기 그지없는 경쟁을 뚫고 참가자 자격을 쟁취해낸 남성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교류전에 참가키로 한 남성들에게 있어 교류전은 '기회'일테니까. 단순히 남성이라는 이유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벗어던질 수 있는 기회 말이다.
그래서 자기 종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이들한테 가서 '저기요. 사람이 별로 안 몰려서 그런데 새끈하게 좀 차려입고 호객행위 좀 해주실 수 있나요?'같은 소리를 한다?
아무리 저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한 심경을 느끼고 있다고 한들 그런 소리까지는 힘들 것이다.
양심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물론, 우리 측에서 준비한 모든 부스가 파리만 날려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가 카트린느하고 연줄이 있다보니 그녀가 동원된 부스 위주로 시선을 줘서 그렇지 그 외에 다른 부스들은 나름대로 선전을 펼치고 있었으니까.
우스운 점은 그렇게 선전을 펼치고 있는 부스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남성' 참가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자리한 이들의 차림새가 제국 측에서 동원한 호객남들에 비하면 한참 미치지 못함에도 남성 참가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부스는 하나같이 괜찮은 성적을 내고 있었다.
즉, 파리가 날리고 있는 곳은 오롯이 여성 참가자들로만 이루어진 곳들이었다.
보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미묘하게 느껴지는 그 차이 덕분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세계에도 현생에서처럼 직업 프리미엄같은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현생에서도 간호사나 선생님처럼 특정 직업군에 속해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대방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 측 특정 부스에 몰려있는 이들도 그런 부류임에 틀림없었다.
'하긴..'
이성이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그것만으로도 섹시하게 느껴지는 법이니 말이다.
게다가 제국 측에서 사람을 끌기 위해 동원한 이들처럼 '노골적인' 느낌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을테니까.
그런 부류들이 나름대로 힘을 내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대로 가면 패배는 사실상 확정인데..'
문제는 보기에는 무슨 학교 축제 같은 느낌이어도 여기 걸린 점수가 나름대로 상당하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포함된 종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사실상 부스 하나당 종목 한 개라고 보면 됐다.
그런데 여기서 처참하게 패배한다?
그것도 그냥 패배하는 게 아니라 급하게 준비한 왕국 연합 측에 밀려 꼴찌를 해버린다면.. 교류전에서 최종 승리를 따내기 위해서는 사실상 남은 종목을 싹 쓸어야만 했다.
다른 나라의 수준도 만만치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그렇기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나는 이겼는데 팀이 져버려서 결국에는 패배하고 말았다는 전개따위 사절이니까.
그리고 뭣보다..
'아니, 사람을 데리고 갔으면 좀 잘 해보든가.'
지금쯤 분명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카트린느가 무지하게 신경쓰였다.
안 그래도 한 군데 틀어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겨보겠다고 억지로 끌고 갔으면 좀 잘 해보든가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고생하고 있을 게 눈에 훤해서 자꾸만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렇다고 무작정 도와주러 가자니 아까 내 발언으로 인해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 클레어 쪽이 또 신경이 쓰이고..
내가 우리 측 부스를 도와주러 가야할 것 같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아마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내심 섭섭해하겠지. 기대는 기대대로 하게 해놓고선 나 몰라라 하는 꼴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와 분위기라도 맞춰볼 생각이었는지 나름 심각해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던 클레어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저쪽부터 가보죠."
그렇게 그녀를 제국 측과 왕국 연합 측 부스가 자리하고 있는 곳을 향해 이끌었더니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것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응? 안 도와주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 측 부스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그걸 보고 저길 도우러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눈을 살짝 크게 뜬채로 의외라는 듯 물어오길래 클레어를 향해 피식하고 웃어보였다.
"그럼 저쪽으로 갈까요?"
얼떨결에 움켜쥐게 된 그녀의 손을 살짝 흔들며 그리 물었더니 핫하고 정신을 차린 클레어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 측 부스에도 가보긴 할 생각이다.
우선 이쪽의 전략부터 면밀하게 파악하고 난 뒤에 말이다.
경쟁자를 이겨먹으려면 그쪽에서 어떤 전략을 주로 사용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정도면 클레어도 어느 정도 만족할테고.
해서 우선적으로 왕국 연합 측 부스 쪽으로 향했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쪽을 먼저 택한 건 아니었다. 그냥 그쪽이 가까워서 그쪽부터 가보자는 식으로 걸음을 옮겼던 것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왕국 연합 측 부스와 가까워지니 멀찌감치 떨어져서 볼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쪽으로 방문객이 몰린 이유가 꼭 남성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어서만은 아니라는 사실같은 것을 말이다.
'이야..'
왕국 연합측 부스는 굉장히 눈에 띄었다.
부스 자체도 그랬지만, 거길 지키고 서 있는 이들과 진열해놓은 상품도 그랬다.
그야말로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는 화려함이 있달까.
우선적으로 부스의 화려함에 시선이 끌리고, 다음으로는 거길 지키고 있는 이들의 특이한 외양에 시선이 가고, 마지막으로 진열된 상품에 시선이 가서 자연스럽게 부스에 발을 들이게 되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부스에 발을 들였다가 나온 이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안에서 파는 물건이 한두 개씩은 들려있었다.
단순히 화려하기만 하고 끝이 아니라 나름대로 장사수완도 괜찮은 모양인데..
"들어가보죠."
바깥에서의 탐색은 이만하면 충분히 한 것 같아서 그대로 클레어를 왕국 연합측 부스를 향해 이끌었다.
그래도 나름 전쟁영웅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입장인데 왕국 측과 경쟁선상에 있는 곳을 방문하려니 살짝이지만 꺼려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내게 잡혀 끌려오는 클레어의 표정은 영 편치 않았다.
웃긴 건 그런 표정을 하고서도 저항같은 건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지만.
그렇게 부스 안으로 들어서고 나니 그 안에 진열되어 있던 상품들의 모습이 확실하게 눈으로 박혀들어왔다.
아무래도 다른 곳들하고는 다르게 급하게 준비를 한 입장이다보니 왕국 연합측은 제일 자신있는 종목 몇 개에 전력을 때려박기로 결정했던 모양이다.
다른 부스들에 비하면 판매하는 품목의 가짓수가 상당히 단촐했다.
그럼에도 화려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들이 올인하기로 결정한 분야 중 하나가 세공이기 때문일 것이다.
금속 그 자체가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많은 곳답게 매대를 채우고 있는 세공품이나 장신구의 모습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단순하게 생긴 것조차 금속을 제 몸처럼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장인이 세심하게 공을 들여 빚어낸 듯한 느낌을 준달까.
아무리 그래도 가격이 만만치 않으면 선뜻 손이 가지 않기 마련인데 심지어 가격마저도 굉장히 착했다.
그렇다고 싸구려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저렴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이 정도면 사볼만 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선에 딱 걸쳐있는 느낌?
그렇다보니 그냥 구경이나 해봐야지 하는 식으로 들렸다가 '어? 괜찮네?'하는 식으로 구매하거나 옆을 지키고 있는 연인의 시선에 등 떠밀려 구매하는 이들의 수가 굉장히 많았다.
그런 식으로 부스 안이 대충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를 살펴보고 있자니 어느새 이쪽을 향해 다가온 접객원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이런 곳이 익숙치 않아 오도가도 못 하고 있는 걸로 보였던 모양.
"이 분이 착용하실 걸 찾고 계신가요?"
나와 클레어에게 시선을 한 번씩 준 뒤에 손은 내쪽을, 시선은 클레어 쪽을 향한 채 그리 묻길래 클레어가 답을 하기 전에 그녀를 대신해 나섰다.
"아뇨. 이 분이요."
클레어의 등을 살짝 떠밀면서 그리 말했더니 설마 내쪽에서 답을 할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는지 일순간 접객원의 얼굴 위로 당황한 듯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는 프로였다.
방금 그 대화만으로 주도권이 클레어 쪽이 아닌 내게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인지 그가 순식간에 타겟을 갈아치웠다.
"혹시 어떤 종류를 생각하고 계신가요?"
"음.."
뭐가 좋을까 고민하고 있자니 눈으로 들어온 것은 클레어의 귀에 매달려있는 자그마한 검은색 귀걸이었다. 평소에 차고 다니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날이 날이다보니 기분을 좀 내보려고 특별히 착용하기라도 한 모양인데..
"귀걸이요."
그래서 그걸 골랐다.
아예 하고 다니질 않는 반지나 목걸이를 선물해주는 것보다야 그나마 하고 다닐 가능성이 있는 걸 선물해주는 편이 클레어 입장에서도 나을테니까.
"아, 귀걸이 말씀이신가요?"
내 말을 듣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것도 잠시 남자가 우리를 어딘가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따라 움직이다보니 눈앞으로 나타난 것은 귀걸이의 군단이었다.
흡사 이 세상의 모든 귀걸이란 귀걸이는 죄다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온갖 종류의 귀걸이들이 일렬로 늘어선 좌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너무 거창한 건 좀 그렇겠지.'
그래서 단순하게 생긴 것들 위주로 살펴보았다.
물론, 생김새가 단순하다고 해서 싸구려처럼 보이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진열되어 있는 것들 중에는 오늘 클레어가 차고 온 것하고 비슷하게 생긴 것도 있었는데 지금 그녀의 귀에 달려있는 것보다 좌판 위에 진열되어 있는 쪽이 조금 더 고급스러워 보였으니까.
"혹시 뭐 마음에 드시는 거 있으세요?"
고르기 전에 혹시 클레어의 눈에 들어온 게 있을지 알아보고자 클레어를 향해 그리 물었더니 그녀가 말을 어물거렸다.
보아하니 내가 직접 골라주길 원하는 것 같은데..
'뭐가 좋으려나..'
고민하고 있으니 조용히 옆을 지키고 있던 점원이 진열되어 있던 것중에 하나를 꺼내서 조심스레 내밀어왔다.
"그 혹시 이건 어떠신가요? 연인 분하고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그 한 마디가 낳은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안 그래도 발그레한 편이던 클레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 우리들 사이로 내려앉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