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끈적끈적한 소리는 듣는 이의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벽까지 몰아붙여지고 나서는 그야말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처럼 다소곳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클레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으으.."
그 상태로 나하고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끙끙거리기만 하는 것이 개막식에서 그토록 과격하기 그지없었던 연설을 펼쳤던 이와 동일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아, 진짜..'
묘하게 귀엽단 말이지.
내 앞에서 맥을 못춰대는 클레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누가봐도 오금이 저릴 법한 살벌하기 그지없는 외양을 하고 있는 맹수를 앞에 두고 귀엽다고 말하는 사육사들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사람따위는 가볍게 찢어버릴만한 힘을 지닌 맹수가 자신만 보면 강아지마냥 낑낑대는데 어떻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얼굴을 후끈후끈하게 뎁혀대는 열기가 민망하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내 시선을 피하듯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려대던 클레어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하고 웃으며 클레어의 등을 받춰주고 있던 벽 너머로 손을 밀어넣어 그녀의 엉덩이를 꽈악 움켜쥐었다.
물론, 그러기 전에 주변에 혹시 보는 눈은 없는 지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히도 다들 좌판에 뭐가 있는지 구경한답시고 우르르 그곳으로 몰려가버린 덕분에 주변에 방해할만한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엉덩이를 움켜쥐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조금 더 은밀한 곳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던 것은.
"자, 잠깐..!"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는 하나 나와 클레어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앞뒤로 탁 트여있는 건물의 입구였다. 그렇기에 앞이나 뒤에서 누군가 들이닥치게 되면 이 현장을 고스란히 들킬게 뻔한 상황.
혹시라도 한참어려보이는 미소년에게 좋을대로 희롱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 보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라도 됐던 걸까.
다른 이의 귀에라도 들어갈세랴 클레어가 목소리를 한껏 죽인 채 다급하게 날 만류해왔다.
웃긴 건 딱 거기까지가 전부였다는 점이다.
그토록 걱정이 되면 엉덩이 골을 타고 다리 사이를 향해 파고들어가는 내 손을 움켜쥐어 제지하면 될텐데 클레어가 보인 대응은 딱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그녀가 작정하고 막아선다면 내 손목 하나 비트는 것쯤이야 일도 아님에도 그랬다.
'이건..'
말은 저렇게 해도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안 그렇게 생겨놓고서는 은근히 리드 당하는 걸 좋아하는 게 바로 클레어니까.
해서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는 탱탱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엉덩이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 손을 이용해 그녀의 다리 사이를 가볍게 비벼주었다.
"흐으윽..!"
그러자 오늘 따라 한층 더 붉게 느껴지는 요염한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온 것은 한껏 억누른 듯한 신음성이었다.
그런 것을 흘려대며 클레어가 상체를 앞으로 푹 고꾸라뜨렸다.
순간적으로 가해진 쾌감에 버틸 수가 없었던 모양.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앞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던 걸까. 어느새 날 향해 뻗어온 클레어의 손이 내 어깨를 힘껏 움켜쥐었다.
워낙 다급했던 탓에 살짝 힘조절에 실패한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클레어의 다리 사이로 파고 들어간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훨씬 더 신경쓰였으니까.
오늘 클레어는 몸에 쫙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 바지에다가 위에는 살짝 넉넉한 흰색 블라우스를 갖춰입은 상태였다. 단촐하다면 단촐하면서도 보는 이로 하여금 깔끔하게 잘 입었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복장이라고 해야할까.
어쩌면 바지가 아니라 치마를 입고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모험에 가까운 익숙치 않은 시도를 하자니 차라리 평범하더라도 익숙한 쪽이 더 괜찮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모양.
아무튼 그렇게 그녀의 하체를 감싸고 있는 가죽 바지의 사타구니 부분에서 젖은 가죽 특유의 느낌이 났다.
그 왜 습한 느낌 있지 않은가.
그것도 그냥 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살짝 따뜻하기까지 했다.
포인트는 만지자마자 그런 감촉이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젖었네요?"
"...."
내 물음에 클레어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층 더 붉게 물들이며 시선을 푹 내리깔기만 할뿐.
물론,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해서 기분이 상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애초에 답을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서 던진 질문이었으니까.
침묵을 택한 클레어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려던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대체 언제부터 젖어있었던 걸까.."
그 부분이 못내 궁금하다는 것처럼, 클레어의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일부러 한토막씩 끊어서 말해봤는데 그럴 때마다 오싹오싹한 느낌이라도 들었는지 한껏 경직되어 있던 어깨가 흠칫흠칫대는 모습이 꽤나 장관이었다.
"설마.. 외출 준비를 할 때부터 이랬던 건 아니죠?"
설마 그 정도까진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는 것처럼 중얼거려봤더니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것은 여태껏 목격했던 것들하고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격렬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정곡이었나 본데..
"흐음, 그러셨구나아.."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목소리에 살짝이지만 경멸이라는 감정을 실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기를 잠시 다시금 클레어를 향해서 시선을 던지며 생긋하고 웃어보였다. 시선을 푹 내리깔고 있던 그녀가 내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들어올리는 타이밍에 맞춰서 벌인 일이었다.
그녀 딴에는 생각치도 못했던 반응이었던 걸까.
졸지에 나와 제대로 아이컨택을 하게 된 클레어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렸다. 그 모습 그대로 굳어있던 것도 잠시, 그러지 말고 좀 움직여보라는 뜻으로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밀어넣고 있던 손을 살짝 움직여대니 손을 감싼 채 적당한 압박감을 선사해주던 것이 부들부들 경련해대기 시작했다.
그 느낌을 잠시동안 만끽하다가 그대로 손을 빼냈다.
그리고는 자유를 되찾은 손을 그대로 입을 향해서 가져갔다.
습기만 느껴졌을 뿐이지 축축할 정도로 젖어있는 상태는 아니었기에 클레어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 들어갔던 손은 딱히 젖어있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클레어로 하여금 보란 듯이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의 은밀한 곳을 비벼대던 손가락을 입 안으로 밀어넣고 가볍게 쪽하고 빨았다.
그 때 클레어가 보여준 반응은 뭐랄까..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런 얼굴을 한채 멍하니 날 응시하고 있길래 뭘 그렇게 보냐는 식으로 맞받아쳤더니 간신히 진정되어가고 있던 클레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찌나 빨간지 손이라도 가져다대면 그대로 펑 소리를 내며 터져버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뭐,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러고 있던 것도 잠시, 이어진 내 말에 클레어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물음표'였다.
당황에 당황이 겹치다보니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해버려서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걸까.
"뭐, 싫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아, 아냐!"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 말이 너무 의외라서 당황한 거였나 보다.
무르려고 하기 무섭게 저렇게 우렁차게 외쳐대는 걸 보면.
급한대로 내뱉고 봤는데 일단 내뱉고 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볼륨이 몇 배는 더 컸던 걸까. 빼액하고 소리를 친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길래 피식 웃으며 잘 알았다는 뜻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뭐, 그것도 오늘 하는 거 봐서겠지만요."
그러니까 오늘 하루동안 잘 좀 해보라는 의미로 그리 말했더니 클레어의 코에서 살짝이지만 콧김이 뿜어져나오며 그녀가 의욕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한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걸 보아하니 출발할 준비가 된 것 같아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러면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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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판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있는 광장의 모습은 거대한 시장의 모습을 방불케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로 복작거리고 있었으며 그만큼 시끌시끌했다.
다만 모든 구역이 다 그렇지만은 않았다.
구역마다 차이가 있었으니까. 어느 구역은 발 하나 디딜틈 없이 복작복작해 보이는 반면에 어느 구역은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어디보자 우리 쪽 구역이..'
그리고 왕국 측에서 세운 좌판이 속해있는 구역은 명백히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내심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상했던 모습하고는 많이 달랐으니까.
분명 사람들로 붐비는 모습을 생각했는데 어쩐 일인지 주변에 사람이 돌아다니기는 해도 붐비는 느낌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거기서 상품을 구매하거나 그러는 사람의 수도 반대편 구역에 비하면 한결 적어보였고 말이다.
말해 무엇하랴.
제국 측의 좌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다름아닌 그 '반대쪽 구역'이었다.
혹시 뭐 제국 측에서 엄청나게 획기적인 물품같은 거라도 선보이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니까 구매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그런 물건 말이다.
설령 그게 진실이라 해도 이 정도로 현격한 차이는 말이 되질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쪽에는 카트린느의 손길이 닿은 약과 화장품이라는 치트키가 존재했으니까.
품목이 약과 화장품인지라 직접 사용해보지 않으면 그 효과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평범한 것들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된다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뛰어난 효과를 자랑하는 것이 카트린느의 물건들이었다.
일단 한 번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면 분명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부스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째 개시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체험을 위해서 별도로 꾸려놓은 공간에 파리만 풀풀 날리고 있었다.
적어도 사람 한두 명 정도는 앉아있을 법도 한데 말이다.
이용하는 사람 한 명 없이 텅 비어있으니 주변을 오가는 이들도 힐끔대기만 할뿐 자리로 가서 앉거나 그러는 법이 없었다.
그쯤되면 앞으로 나서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라도 해볼만 한데 말이다.
어째 그런 모습도 없었다.
그저 하나같이 어색해서 죽으려고 하는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만 있을 뿐.
찾아오는 손님도 돌아서게 만들 것 같은 표정이었고, 그러니 더더욱 파리가 날릴 수밖에 없겠지.
사실 생각해보면 저게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그들이라고 알았겠는가?
설마 이런 식으로 장사 비스무리한 것을 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연구실에서 연구만 하는 이들을 끌고 왔으니.. 부스가 제대로 돌아간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제국 측 부스는 명백히 비정상적인 경우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진심이었구나.'
각 부스를 지키고 있는 각양각색의 접객원들이었다. 정확히는 접객'남'들이라고 해야할까.
특색있는 복장을 차려입은 채 부스를 지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것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으로 넘치던 바이올렛과 바이올라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제국 쪽은 자신감만큼이나 교류전에 있어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왜 이렇게 남자들을 많이 끌고 왔나 했더니만..'
부스에 배치된 남자들의 모습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패배를 용납치 않겠다는 수뇌부의 결의같은 것이 엿보였다.
꽃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벌과 나비가 꼬이기 마련인 법.
하물며 단순히 꽃 한두 송이 수준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꽃들로 이루어진 꽃밭이라면?
벌하고 나비 입장에서는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겠지.
그래서 그런 지는 몰라도 광장으로 새로이 들어서는 이들의 태반이 자연스레 제국 측 부스가 자리하고 있는 방향으로 몰리고 있었다. 번잡한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나 그 반대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런 제국 측과 비슷한 노선을 취하고 있는 곳이 바로 왕국 연합 측 부스였다.
물론, 나름대로 효과적이었다.
덕분에 사정상 급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탓에 간신히 구색만 맞춰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쪽 부스도 제법 많은 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제국 측은 물론이거니와 왕국 연합 측에게까지 밀릴지도 모르는 상황.
애초에 교국 측은 이 종목에 불참하는 것을 택했으니 그렇게 되면 꼴찌가 되는 셈이다.
그것도 그냥 꼴찌가 아니라 제대로 준비조차 못한 이들에게까지 밀린 치욕스럽기 그지없는 꼴찌가 말이다.
나와 비슷한 예감을 받았던 것일까.
"..이건 좀 심각한데."
내 옆을 지키고 있던 클레어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