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아니..'
클레어는 또 어쩌다가 저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일까. 설마 우리 측 책임자인 외무대신의 신변에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걸까. 그래서 급한대로 그녀가 올라오게 된 것이고?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이 아니니만큼 자세한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딱 하나 확실해보이는 게 있다면 저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 클레어 본인의 의지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표정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게 클레어의 표정이 그랬다. 지금 그녀는 신병교육대 2일차 아침에 막 잠에서 깨어난 훈련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 이해하질 못하는 그런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아무래도 정말 얼떨결에 등 떠밀려서 저 자리에 오르게 된 것 같은데..
많이 얼떨떨해 보이는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 그 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상태가 저래서야 제대로 된 연설이 가능하기나 할런지 모르겠다. 준비도 안 된 사람을 급하게 올려보낼 거면 대본같은 거라도, 하다못해 쪽대본같은 거라도 좀 쥐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클레어에게서 그런 물건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맨몸으로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쯤되면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더라도 당황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상황.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클레어의 얼굴 위를 차지하고 있던 얼떨떨함이라는 감정이 곤혹스러움이라는 감정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건..'
망한 것 같은데?
딱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단상 위에 오도카니 서 있던 클레어가 조심스레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행사장 내의 분위기라도 살피려는 것일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분위기를 살피는 중이었다면 다른 곳에도 골고루 시선을 주었을텐데 클레어는 유독 우리 측 대열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으니까. 그 안에 숨어있는 뭔가를 찾아헤매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체 뭘 저렇게 열심히 찾고 있는 것일까.
설마 찾고 있는 것이 난가 싶어서 조심스레 클레어를 향해서 시선을 던져보았다. 그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을 받았던 건 꼭 기분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내가 그런 느낌을 받은 순간 곤혹스러움으로 물들어있던 클레어의 얼굴 위로 새로운 감정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으니까.
새롭게 피어나기 시작한 감정은 무언가에 대한 결심이었다.
꾹 다물어져 있던 클레어의 입이 벌어지기 시작한 건 그 다음이었다.
"아, 으음.."
모종의 결심 하에 입을 열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까지는 아직 정해두지 않았던 걸까.
서서히 뒤로 밀려나던 곤혹스러움이라는 감정의 기세가 다시금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입술을 오물대고 있던 것도 잠시, '에라 모르겠다!'라고 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술을 한 차례 꽉 베어문 클레어가 그때부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확실한 것은 그렇게 시작된 연설은 연설이라 부르기 애매한 형태를 띄고 있었지만 그것을 들은 사람들로부터 앞서 행해진 것들보다 몇 배는 더 격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만큼 사람의 본질적인 욕망을 제대로 헤집어대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클레어 본인은 평소에 느꼈던 감상을 그냥 입에서 튀어나오는대로 내뱉은 것 같았지만 말이다.
'뭐, 반응이 좋으면 된 거지.'
어쩌다가 하게된 것 치고 이 정도 반응이면 말 그대로 성공한 연설 아니겠는가.
뭐, 앞서 행해졌던 것들에 비해서 길이가 압도적으로 짧았던 점도 저런 반응이 튀어나오게 만드는데 크게 한몫한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들 슬슬 심적으로 지쳐갈 타이밍이니까.
한두 번 정도에서 그쳤다면 모를까 이런 짓거리를 무려 네 번이나 반복해서 하고 있는데 지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연설을 끝마치고 단상 밑으로 내려가는 클레어를 향해 박수를 쳐대는 참가자들의 모습은 마치 교육에 열정적으로 임하면 1시간 일찍 퇴소 시켜주겠다는 말을 들은 예비군들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렇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으면 이겨라.'라는 식의 노골적인 연설로 참가자들의 욕망에 제대로 불을 지핀 클레어의 연설을 마지막으로 개막식이 끝이 났고, 그와 동시에 교류전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교류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일상이 극적으로 달라지거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기사 부문의 경기는 순서상 폐막식 바로 전 차례로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순서상 맨 마지막이라고 해야할까.
많은 이들이 거기에 기대를 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배치였기에 딱히 껄끄럽게 느껴지거나 그러는 부분은 없었다.
그저 끝을 코앞에 두고 있는 타이밍인만큼 경계를 맡은 이들의 태세가 많이 태만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
아무튼 그런 식으로 내 차례라 부를만한 순간이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기에 교류전이 시작되자마자 제 차례를 맞이하게된 이들과 그들 바로 다음인 이들에 비하면 한결 여유롭게 교류전이라는 이름의 축제를 만끽할 수 있었다.
살짝 의외였던 점은 구경거리라고 해봐야 기사 부문 경기 말고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은근히 또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현생의 올림픽에는 미치지 못해도 교류전의 종목은 꽤나 다양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종목들 중에는 대체 이런 걸 가지고 어떻게 경쟁을 하겠다는 건지, 승자는 또 어떤 식으로 결정하겠다는 것인지 애매하게 느껴지는 분야가 몇 개 있었다.
대표적으로 카트린느가 몸 담고 있는 약학같은 분야가 그랬다.
그게 초반 종목 중에 하나로 떡하니 이름을 올리고 있길래 혹시 뭐 발명대회같은 거라도 열 생각인가 했더니만..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기 위해서 동원된 방법은 의외로 상당히 실용적인 것이었다.
졸지에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상대로 영업을 해야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그쪽 부문 참가자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랬다.
약학같이 실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면서도 승자와 패자를 구분 짓기 애매한 종목을 위해 동원된 방법은 '좌판판매'였다.
그리고 그게 교국에 도착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광장이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넓다란 공터에 각양각색의 상품을 올려둔 좌판이 쫙 깔리게 된 이유였다.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닿을만한 거리에 구경거리가 쫙 깔리게 된 상황.
그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것도 좀 그래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분위기는 어떤지 파악이나 해볼 겸 구경을 가보기로 했다.
"뭔가 엄청 많네요."
"그, 그러게.."
그 결과 동행하게 된 것이 바로 클레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장 여건이 되는 게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어지간하면 이런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는 앨리스는 저번에 내가 알려주었던 것들을 토대로 테러리스트 놈들의 행방을 추적한답시고 한창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앨리스만큼은 아니어도 바쁜 건 디아나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늘만해도 그녀는 기사 부문의 대진을 추첨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숙소를 빠져나간 상태였으니까.
물론, 말만큼은 미리 전해둔 상태였기에 추첨이 끝나기로 합류할 예정이긴 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카트린느?
그녀라면 아마도 저기 세워져있는 좌판 중 하나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참가자가 아니라 참가자들의 컨디션 관리를 위해 동원된 그녀지만 그래도 일단은 약학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신세인지라 노동력으로 동원되는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으니까.
그 와중에 약학부에서는 은근히 꼼수를 부리기도 했는데 자신들의 좌판에 카트린느가 만들어낸 것을 은근슬쩍 끼워넣은 게 바로 그것이었다.
'뭐..'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들도 어쩔 수 없었겠지.
얼마나 많은 양이 팔려나갔는지를 토대로 승자와 패자를 나누기로 결정된 순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위치한 카트린느의 존재가 마치 치트키처럼 느껴졌을테니까.
일단 어떤 식으로든 써먹기만 한다면 승리는 따놓은 당상인 것처럼 느껴졌을텐데 그런 유혹 앞에서 꿋꿋할 수 있는 인간이 솔직히 몇이나 되겠는가.
'심지어 은근히 종용하는 눈치기도 했으니..'
옆에서까지 그러니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닐까.
아무튼 그런 관계로 카트린느는 그쪽에 끌려간지 오래였다.
뭐,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한 데에는 개막식날 클레어가 펼쳤던 연설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때 클레어는 과정보다는 결과의 중요성을 몇 번이나 강조했었으니까. 결국 승리하지 못한다면 과정이든 뭐든 아무 소용없다는 식으로 일단 과정의 정당함같은 건 이기고 나서 생각할 문제라고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행사에 동원되었던 이들까지 합치면 천을 가볍게 넘기는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뱉어댔던 양반이 오늘은 또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걸까.
흡사 사단장이라도 영접한 병사마냥 바짝 얼어있는 클레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안 그래도 뻣뻣하게 굳어있던 그녀의 몸이 이제는 뻣뻣한 수준을 넘어 딱딱하게 변해가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설마 나랑 단둘이라고 이렇게 긴장한 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럴까 싶었지만은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녀하고 단둘이 있었던 적은 몇 번 있었어도 이렇게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둘이서 돌아다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정말로 그런 건가 싶어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주변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클레어를 벽까지 몰아붙였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애초에 살짝 얼이 빠져있는 상태였을 뿐더러 저항같은 것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클레어를 벽까지 몰아붙인 뒤 살짝 까치발을 들어 그녀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그리고는 거기에 대고 물었다.
"혹시 긴장했어요? 데이트라도 하는 것 같아서?"
그러자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것은 꽤나 격렬했다.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을 내뱉은 순간 클레어의 어깨가 움찔하고 튀어올랐으니까. 누가봐도 정곡을 찔린 사람의 반응이어서 문득 웃음이 나왔다.
내 입장에서는 뭐 엄청나게 대단한 사실이라도 들킨 것처럼 반응하길래 그게 웃겨서 그랬던 것 뿐이었는데 클레어에게는 조금 다르게 비춰졌던 모양이다.
그녀가 새빨간 입술을 앙하고 베어물더니 그 상태로 슬쩍 몸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저렇게 두렵다는 듯 몸을 떨어대면서도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숨결만큼은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는 점이었다. 마치 내게 뭔가를 기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벌받는 걸 좋아하게 됐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이제보니까 그냥 몸만 달랑 나온 것 같지도 않았다. 약간이지만 꾸민 태가 난다고 해야할까. 놀랍게도 그랬다.
누가봐도 '데이트' 비스무리한 것을 기대하고 나온 듯한 모양새를 해놓고서는 살짝 몰아붙인 것만으로도 저렇게 태세를 전환해버리다니.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장본인으로서 마땅히 책임을 져줘야겠지.
"기대라도 했나보네요? 화장까지 한 걸 보면?"
그녀에게 닿으려면 까치발을 들어야하는 탓에 영 모양이 살질 않았지만 지금 나와 클레어 사이에서 그따위 문제는 말 그대로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도돔하게 부풀어있는 붉은 입술을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슥 훑었다.
역시나 뭔가를 바른 게 맞았던 모양이다.
손가락 끝으로 따뜻하고 말캉한 감촉이 휘감김과 동시에 살짝 끈적한 것이 손가락 끝으로 묻어나왔다.
그렇게 묻어나온 것을 클레어로 하여금 보란듯이 그녀의 눈앞에서 만지작대면서..
"대체 뭘 기대하셨길래 평생 안 하던 화장까지 하고 나오신 걸까.. 참 궁금하네요. 그죠?"
클레어를 향해서 생긋 웃었다.
그에 맞춰 손가락이 붙었다가 떨어지길 반복하며 쩌억- 쩌어억- 하고 끈적끈적한 소리를 사방으로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