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불꽃녀로 인해 시간이 지연된 덕분에 어찌어찌 타이밍을 맞출 수 있었던 모양이다.
바이올렛은 마지막으로 봤을 떄보다 한결 깔끔해진 모습을 한채로 나타났다.
'아니, 잠깐만..'
화장실에서 입고 있었던 것하고 옷 생긴 게 미묘하게 다른 것 같은데.
꼭 마치 기존에 입고 있었던 것을 대신해 다른 것으로 갈아입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저 멀리서부터 등장해 제국 측 대열로 합류하는 바이올라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고, 덕분에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올렛이 입고 있었던 것을 바이올라가 입고 있었으니까.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흐트러질대로 흐트러진 바이올렛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준답시고 찰싹 붙어있는 동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자연스럽게 눈에 익히게 되었으니까. 거기에 달려있는 장식같은 것들도 말이다.
그리고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저건 분명 바이올렛이 입고 있었던 옷이었다.
아무래도 군데군데가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옷을 그대로 입고 단상 위로 올라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한결 멀쩡한 동생의 옷을 잠시 빌리기로 한 모양.
거리낄 것은 없었을 것이다.
평소에 하고 다니는 스타일이 말 그대로 천지차이라서 크게 티가 나질 않아서 그렇지 둘은 기본적으로 쌍둥이이지 않은가.
군데군데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둘의 체구는 대충 비슷했다.
그러니 바이올렛으로서는 동생을 보며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다만, 바이올라의 의견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시무룩하게 입꼬리를 늘어뜨리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하긴..'
답답한 걸 선호하지 않기에 평소에는 기본적으로 가볍게 입고 다니는 편인 그녀가 오늘 힘을 빡 줘서 꾸민 데에는 내게 잘보이기 위함도 어느 정도는 있을테니까.
그래서 모처럼 큰맘을 먹고 모습에 힘을 빡 줬던 걸텐데 그걸 고스란히 언니에게 내어줘버렸으니 분명 기분이 편치는 않을 터.
그런 거라면야 다시 내 옆으로 돌아오지 않고 저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바이올라 입장에서는 보이고 싶지 않을테니 말이다.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앞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으니 옆에서 바로 딴지를 걸어왔다.
"뭐 봐?"
해석하자면 내가 이렇게 옆에 서 있는데 날 보지 않고 어딜 보는 것이냐쯤 되겠지.
살짝이지만 불만이 느껴지는 목소리를 한채 그리 물어오길래 대충 둘러댔다.
"아, 언제 끝나나 해서요."
하도 지루해서 한 번 쳐다봤다.
라는 식으로 둘러대니 앨리스가 자신도 동감한다는 듯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 그래도 이제 세 번째 차례니까. 저게 끝나고 다음 차례도 끝나면.."
그때 자연스럽게 끝이 나지 않겠냐는 식으로 이야기 하길래 거기에 대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나저나..'
그동안은 딱히 티를 내거나 그러질 않아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앨리스는 내게 자신의 능력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를 상당히 기다려왔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 그것만으로도 꽤나 기꺼워하고 있었다.
'아, 하긴..'
생각해보면 그동안은 딱히 기회가 없긴 했으니까.
유능한 면모를 어필하자니 그쪽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레이시아가 내 바로 옆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카트린느처럼 상식이라는 것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유용하기 그지없는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름값으로는 클레어의 발끝에도 미치질 못하니..
남는 건 무력적인 측면 뿐인데 그쪽에는 히로인계의 또하나의 왕도라 할 수 있는 여기사 버프를 풀로 적용받은 디아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그걸 가지고 어필하거나 그러는 것도 힘들었을 거다.
심지어 최근에는 한 번뿐이긴 해도 주인공 년한테도 패하지 않았던가?
앨리스로서는 당연히 초조했을 수밖에 없..
딱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내가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점 하나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그러니까 주인공과 그 주인공의 주변을 지키는 히로인들에 관한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진을 빼박 '놈'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주인공이 존재하면?
주인공의 옆에서 주인공을 받쳐주는 히로인또한 존재한다.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디디고 있는 세계가 달라져도 결코 변하지 않는 일종의 절대적인 진리와도 같은 법칙이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랬다.
그래서 디아나같은 이들을 보자마자 히로인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헌데 남자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주인공이 실은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은..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변치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진이 보여주는 태도 때문이었다.
그녀가 주변에 있는 남성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같은 걸 보였다면?
이렇게까지 혼란을 느끼는 일은 없었을 거다. 대신 아 그냥 내가 혼자서 착각했던 거구나라고 생각하고 넘어갔겠지.
헌데 진은 주변의 남성들에게 관심을 가지기는 커녕 아예 교류조차 하지 않았다. 나라고 맨날 두 눈 부릅뜨고 주인공의 행보를 감시하며 사는 건 아니니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아니지.'
당시에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었지만 그동안 알게 모르게 봐왔던 모습들까지 고려하면 진은 단순히 교류를 안 하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남자라는 존재를 꺼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와주겠답시고 가져다 댄 내 손을 쳐낸 일이야 성별을 숨기고 있는 와중인만큼 민감할 수밖에 없어서 그랬던 거라고 치더라도 모르는 남자가 말을 걸거나 그러면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곤 했으니까.
그뿐만이랴?
남자가 다가오기라도 하면 무슨 불결한 것이라도 접근한 것처럼 저도 모르게 살짝 뒤로 물러나곤 했다.
무의식 중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반응이 그럴진데 남자와 교류를 갖는다?
솔직히 그 모습을 상상하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어쩌면 남들과는 다른 성적 취향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러니까 박히는 것보다 보비는 쪽이 취향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쪽으로 생각이 미치기도 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진의 취향이 정말로 그쪽이라면 내가 여태껏 히로인 후보들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고 그들과 교류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을테니까.
헌데 진이 그런 모습을 보인 건 날 두고 뭔가를 작당했을 때가 유일했다.
평소에는 글쎄..
진과 디아나를 놓고 보면 진에게 있어 디아나는 같은 부에 소속된 선배에 지나지 않는 느낌이었고, 그런 느낌의 대우를 받는 건 앨리스또한 마찬가지였다.
레이시아?
애초에 둘이 만난 적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나야 디아나를 한 번 꼬셔보겠답시고 그녀에게 들이대다보니 자연스럽게 레이시아하고도 연이 닿게 되었지만 뒷배도 뭣도 없는 진이 레이시아와 안면을 틀만한 일이 있었을까.
아니면 혹시 카트린느 일편단심이라도 되는 걸까. 그래서 다른 여성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것이고?
그또한 아닌 것 같았다.
둘이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본인들이 아무리 꽁꽁 숨기려 한들 연인 사이 특유의 풋풋한 뭔가가 자연스럽게 새어나오기 마련인데 둘에게서 딱히 그런 기미같은 건 느낄 수 없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정말 둘이 그런 사이였다면 카트린느가 향초를 가지고 내게 그런 되도 않는 짓거리를 시도하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내 눈에만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그런 관계라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지니고 있어서 관계를 유지하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쉽게 말해 비즈니스적인 관계에다가 개인적인 친분을 살짝 섞은 듯한 느낌의 관계라고 해야할까.
주인공이라는 년의 행동거지가 이렇게나 불확실하다보니 이렇다보니 내가 혼란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꼴이 되고 나서는 처음으로 접해보는 여성 주인공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픈데 생전 처음 접하는 여성 주인공이라는 년이 그동안 경험한 것들을 통해 확립된 걸 제멋대로 깨뜨리려 하고 있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진짜..'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 이런 개같은 상황에 빠져야 하는 걸까.
조상님이 죄를 졌다면 조상님 선에서 끝낼 것이지 어째서 후손인 나까지..
'개같은 연좌제.'
지금이 삼족을 멸하고, 구족을 멸하는 조선시대냐고.
그런 생각은 딱 거기서 끊어냈다.
경험상 거기에 한 번 빠지게 되면 정말 밑도 끝도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바로 나였으니까.
지금까지 조연 짓만 몇 회차인데 조상님 탓을 한두 번 해봤겠는가.
'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파악해보기로 하고..'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려야했다.
한 번 푸념을 해버린이상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생각이 또 그쪽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컸으니까.
참으로 다행히도 마침 바로 옆에 내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려줄 수 있을만한 이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해서 아무 것도 모른 채 오도카니 서 있는 진쪽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잡아당겨 앨리스 쪽에다가 놓았다.
그렇게 확인하게된 앨리스의 얼굴은 누가봐도 고심에 잠겨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내 말을 듣고 나름대로 범인들에 대해서 추측해보고 있는 모양인데..
'어디..'
어떤 식으로 추측하고 있을지 한 번 들어나볼까?
곧바로 입을 열어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건 그게 궁금해서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굳이 말을 돌려야할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해서 입에서 흘러나오는대로 질문을 던져봤다.
한창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들려온 내 질문을 듣고 살짝 놀랐던 걸까.
앨리스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흠칫하고 튀어오르더니 그녀가 꼭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 상태로 막 뜬 눈을 꿈벅거리던 것도 잠시, 붉은 입술 사이에서 '아.'하고 짤막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아니, 별건 아니고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들려준 것을 토대로 범인에 대해 추측해보고 있었다는, 딱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발언이었다.
"네? 범인이 대해서요?"
내가 그녀에게 들려주었던 것들은 사실상 단서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 상황.
심지어 그 얼마 안 되는 것중에서도 직접적인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요리로 비유하면 메인이 될 수 있을만한 재료들은 쏙 빠지고 국물용 멸치같은 재료만 남은 셈이랄까.
그런 것들만으로 어떻게 요리를 하고 있었을지가 궁금해서 어디 그럼 그동안 추측한 것들을 나도 알 수 없겠냐고 한 번 조심스레 물어봤다.
물론,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것은 그리 긍정적이진 않았다.
내 말에 앨리스는 일단 난색부터 하고 봤으니까.
'하긴..'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앨리스가 나름대로 추측한 것이 귀신같이 맞아떨어진다면야 본인의 유능함을 어필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상황도 없겠지만 솔직히 제대로 된 단서도 딱히 없는 상황에서 일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아마 그녀도 스스로 추측한 게 들어맞는 쪽보다는 빗나갈 가능성을 더 높게 잡고 있을 것이다.
헌데 그런 걸 날 상대로 털어놓는다?
그랬다가 정말로 빗나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만큼 쪽팔리는 상황도 또 없겠지.
그걸 우려해서 말하는 걸 꺼리는 느낌이 강했지만 난 어떻게 해서든 듣고 싶었기에 살짝 앨리스를 졸라봤다.
당연히 그 싸움에서 승리를 차지한 쪽은 나였고, 결국 한숨과 함께 앨리스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며 이것으로 인해 범인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또 없다는 식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내뱉으며 차곡차곡 밑밥을 깐 앨리스가 바쁘게 오물대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개인적으로 제국이거나 왕국 연합측 사람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
내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댄채 그리 속삭이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