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14)화 (213/366)



〈 21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내가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바이올렛의 몰골을 수습했다.


다만, 시간이 별로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손속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간간히 미묘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바이올라의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했다.


"끼앙..!"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지가 무슨 선인장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사방팔방으로 털을 곧추 세우고 있는 꼬리를 빗어주고 있다보니 들려온 소리에 즉시 손에 주고 있던 힘을 뺐다.

그리고는 바이올렛의 몸이 잘게 떨리건 말건 마저 빗질을 이어나갔다.

다만 내가 해줄  있는 건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옷의 구겨진 부분이나 강아지랑 꼭 껴안고 한바탕 구르기라도 한 것처럼 옷 곳곳에 들러붙은 털만큼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전자의 것은 수습할 방법도, 도구도 없었고 후자의 것은 일일히 하나하나 떼어내자니 시간이 없었으니까.

'뭐, 이 정도 해줬으면 나머진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바이올렛과 헤어졌다. 지금도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시라도 빨리 보내주는 게 맞았으니까.

바이올렛과 헤어졌다고 해서 바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바이올렛이 말했듯 엉망인 건  몰골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지체되어버린 탓에  그래도 의심받고 있을 게 뻔한 상황인데 거기에 털을 몸 곳곳에 덕지덕지 붙인 채로 나타난다?


그걸 보고 앨리스가 무슨 생각을 할지, 또 바이올라는 무슨 생각을 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누가 볼세랴 잽싸게 여자화장실을 탈출해 남자화장실로 들어온 후 줄곧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며  곳곳에 달라붙은 털들을 제거하고 있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다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앞쪽에 붙은 건 그냥 떼어내면 되는데 등뒤에 붙은 건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문제는 앞보다 뒤쪽에 붙은 게  배는 많다는 점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바이올라를 피해서 창고 안에 숨었을  바이올렛과 나는 서로 꼬옥 끌어안은 자세로 몸을 포개고 있었으니까.  상태에서 바이올렛의 꼬리가 내 몸을 감쌌으니 당연히 뒤쪽에 붙은 것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아오..'


덕분에 생각치도 못하게 요가 비슷한 것을 하게 되었다.

맘같아서는  번에  털어내고 싶었지만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들인지 옷에 철썩 들러붙어서 하나하나 일일히 떼어주지 않으면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으니까.


이러고 있는 꼴을 남들이 봤다면 뭐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의미에서 개막식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  누구도 화장실을 찾지 않는 게 내게는  다행이었다.


덕분에 중간에 방해받거나 그러는  없이 무사히 제거 작업을 끝마칠 수 있었으니까.


화장실을 빠져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몸을 앞뒤로 돌려가며 혹시라도 놓친 게 있지는 않은지 꼼꼼하게 점검까지 해준 뒤 그대로 개막식이 열리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애초에 건물에 드나든 이가 몇 없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막 건물을 벗어나니 대체 안에서 뭘 하느라 이렇게 오래 있었냐고 추궁이라도 하는 듯한 시선이 사방에서 날아와 꽂혔으니까.

제법 따끔하게 느껴지는 그것들을 일일히 받아내며 원래 자리를 향해 나아가다 보니   있었다.

단상 위에 서서 열띤 연설을 펼치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을 말이다.

불이 사람의 형상을, 그것도 미녀의 형상을 띄게 되면 저런 모습이 될까.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활활 타오르는 몸을  여성이 단상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목소리를 높여 뭔가를 외칠 때마다 흡사 불로  커튼처럼 생긴 주홍빛 머리칼이 화르륵 타올랐다.


"..님은 바로 교류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 색깔이 빨개서 그런지는 몰라도 연설에서 묘하게 빨간 맛이 났다.


"승리하십시오! 그리하여 차지하십시오! 승리하는 순간 영광은 그대의 것이 될 것입니다!"

단상 위는 저토록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아래쪽의 분위기는 그렇지가 않았다. 살짝 침잠해있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얼핏보면 지루해하는 분위기하고도 비슷했다.


주변을 둘러싼 그러한 분위기 덕분에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수 있었다.


언제 시작되었는지  수 없는 이 연설이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들 이토록 지루해야할 이유가 없으니까.

열정적인 연설을 듣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도 잠깐이지 암만 열정적인 연설이라도 계속해서 들으면 지루할 뿐이니 말이다.

그런 아래쪽의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성은 계속해서 제 할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솔직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아직  말이 많은  같은데 그렇다면 바이올렛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테니까. 그러니까 미처 다 수습하지 못했던 것을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이 말이다.


'그나저나..'

진짜 신기하게 생겼네.

몸이 저래서야 일상생활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재밌는 점은 불꽃 그 자체인 몸을 가진 사람이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높은 곳에 올라가서 그러고 있으니 묘하게 성화를 봉송해놓은 듯한 느낌이 난다는 점이었다.

'그래.'

모름지기 국제 행사라면 성화 하나쯤은 봉송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원래 있던 자리로 가서 서니 누가봐도 지루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뚱한 표정을 얼굴 위에 띄워올린채 단상 위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던 앨리스의 시선이 내쪽으로 돌아왔다.


"왔어? 오래 걸렸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느낌으로 던져진 것치고는 제법 묵직한 한 방이 시작부터 날아들었다.


역시나 오래도록 돌아오질 않아서 내심 다른 짓을 하다가 온  아닐지 의심하고 있었던 모양.


"아, 건물이 생각보다 훨씬 더 크더라구요. 그래서 좀 헤맸어요."


"그래? 그나저나 황녀님이 찾아보겠다고 가셨는데 그 분은 못 만났나보네?"

날아든  받아치기 무섭게 비슷하게 묵직한 것이 다시금 날아들었다.

"그래요?"

그래서 모르는 척을 했다.

금시초문이라는  고개를 갸웃해보이니 내쪽을 향하고 있던 앨리스의 눈이 일순간 가늘게 변했다.


"아무래도 건물이 크다보니까 중간에 엇갈렸나 보네요."

앨리스의 입장에서는 찜찜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한두 곳이 아닐테지만 쉬이 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찌보면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그리 보면 일단 무사히 넘긴 듯 했지만 그렇다고 한  싹을 틔운 의심을 그냥 방치해둘 수만은 또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해서 앨리스로 하여금 보란듯이 뭔가를 고심하는 척을 하다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서 손짓을 해보였다. 가까이 좀 와보라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눈을 굴려 주변을 살피는 척 했다.

물론, 단순히 척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주변을 살핀  맞았으니까. 주변을 확인하는 김에 암만 찾아봐도 찾을  없었던 진이 혹시 자리로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허?'

그렇게 눈을 굴리다보니 볼 수 있었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있는 진의 모습을 말이다.


성녀가 연설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세상에서 증발이라도  것처럼 그 모습을 찾아볼  없더니 이제는 또 보인다라.


덕분에 내 안에 자리를 잡은 의심이라는 놈이 한층 더 몸집을 불리는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진은 성녀라는 존재를 기피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성녀의 눈에 띌만한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이유가 뭘까.

혹시 성별을 숨긴 것하고 관계가 있는 걸까.

머릿속으로 그런 추측을 이어나가면서 진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떼어내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 식으로 한동안 주변에 대고 의미없는 시선을 흩뿌리다가 이내 앨리스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러자마자 날아와 꽂힌 건..


"무슨 일인데?"

대체 무슨 말을  생각이길래 그렇게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거냐고 묻는 듯한 질문이었다. 문제는 나와 그녀 사이에 거리였다.


이리 오라고 손짓까지 했건만 아무리 그래도 한창 행사가 진행중인 와중에 대열을 이탈하긴 좀 그랬는지 그녀는 여전히 나와 살짝 떨어진 채로 서 있었다.

'진짜 은근히 고지식하다니까.'


속으로 그리 툴툴대다가 다시금 그녀를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한 번은 무시해도  번은 그럴 수 없었던 걸까. 마침내 앨리스가 내쪽을 향해 몸을 기울여왔다. 물론, 그 와중에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발만큼은 여전히 그 자리에 굳건히 박아넣고 있긴 했지만.


흡사 곡예라도 펼치는 것처럼 상당한 유연성을 필요로 하는 자세를 한채 거리를 좁혀온 앨리스의 귀를 향해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거기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가 여자화장실에서 주워들었던 것들을 말이다.

처음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앨리스의 반응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봐야 큰일이겠냐는 식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태도가 뒤집어진 것은 본론이 튀어나오고 난 후였다.


교류전 중에 테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내 말에 많이 놀란 걸까. 덤덤한 반응으로 일관하던 앨리스의 눈이 일순간 부릅 떠졌다.

"저, 정말이야?"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의심하는 듯한 반문이 돌아와도 딱히 섭섭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쉿!"


대신 그녀를 향해 주의를 주었다.


놀란 탓인지 볼륨조절을 깜빡한 것은 물론 목소리가 살짝 튀기까지 한 바람에 주변에 서 있는 이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이쪽을 향해 몰려들었으니까.


물론, 금방 원래 자리로 돌아가긴 했지만 화제가 화제인지라 남들의 이목을 끌어서 좋을 건 하등 없었다.

내 주의를 받고 제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깨달은 모양이다. 앨리스가 살짝 벌리고 있던 입을 꾹 닫더니  상태로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것처럼.

"거기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건물이 방음이 잘 안 되더라구요."

덕분에 엿듣게 되었다는 점을 밝히니 짐작가는 게 아예 없지는 않았는지 앨리스가 '아.'하고 짤막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쩌다 그런 걸 알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신뢰를 주기에는 충분했는지 그때부터 앨리스의 얼굴은 심각함이라는 감정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내 덕분에 일이 터질 거라는 사실은 알게 됐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막상 뭘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걸까.


눈썹을 가운데를 향해 모은 채로 끙끙대던 것도 잠시, 앨리스가 이것저것 캐물어오기 시작했다.

들려준  외에 더 들은 건 없는지, 혹시 범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모습은 보지 못했는지.


그런 식의 질문이 도톰하게 부풀어오른 입술을 뚫고 흘러나왔다.


그렇게 던져진 질문들에는 하나하나 사실대로 답을 해주었다. 그러니까 목표가 바이올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만 뺴놓고 말이다.

"못 봤다고?"

"네, 이럴 줄 알았다면 소리가 들렸던 곳을 찾아가 볼 걸 그랬나봐요."

"아냐, 잘한거야. 찾아갔다가 범인들하고 마주치기라도 했으면 위험했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라도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설령 오늘과는 다르게 무장을 갖춘 상태라 할지라도 위험할 수 있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말라며 앨리스가  번이고 덧붙였다.

"알겠지?"


"네."


이미 같은 대답을 몇 번이나 들었음에도 안심이 되질 않았던 것일까.


나름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를 쥐어짜내서 답을 해봤는데 돌아온 건 영 못 미더워하는 시선이었다.

거기에 대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남부에서 사고를 한  친 전적이 있으니까.


그때 나와 남부까지 동행했었던 앨리스로서는 당연히 안심이 될래야 될 수가 없었겠지.

"아무튼 남자 한 명에다가 여자 한 명이었단 말이지."


"네, 여자 쪽이 상급자인 것 같았어요. 지시를 내리더라고요."


"흠.."

그또한 명심해두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길래 조심스럽게 물었다.


"찾아보시려고요?"

"..그래야겠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럼 저도.."

도와주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나보다 앨리스 쪽이 훨씬 더 빨랐다.

"괜찮아."


그리 말하며 내 도움을 사양하는 앨리스의 얼굴 위에는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아주 잠깐동안 잊고 있어던 사실 하나를.

'자기 홈그라운드다 이거지.'

이 참에 그동안 할 기회가 없었던 능력어필을 좀 해볼 생각인 걸까.

이 건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자신만 믿으라는 듯 씩하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앨리스의 어깨 너머 저 멀리서부터 바이올렛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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