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12)화 (211/366)



〈 21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바이올라에게서 흘러나온 질문 뒤로 이어진 것은 침묵이었다.


그것도 그냥 침묵이 아니라 내가 이 세계로 떨어지고 나서 느꼈던 침묵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무겁고 깊은 침묵이 나와 바이올렛의 어깨를 슬며시 짓누르기 시작했다.

어깨 위에 묵직한 돌덩이라도 올려놓은 것같은 그 느낌을 만끽하면서 슬며시 시선을 들어올려 바이올렛을 향했다.

당연히 바이올렛의 반응이 궁금해서 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티나지 않게 시선을 들어올리니 눈으로 들어온 건 아차하는 표정에 젖어있는 바이올렛의 얼굴이었다. 순간적으로 욱해서 일단 저지르기는 했는데 저지르고 나니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 얼마나 난감하고 수습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깨달아버린 걸까.

'저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텐데..'


문제는 이미 일이 벌어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왔던  보면 바이올라도 아직까지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 확신까지는 못하고 있는  했지만 솔직히 그게 얼마나 가겠는가.


하고 있던 짓이 있는 만큼 그녀도 내심 자신의 옆칸에 사람이 없기를 바라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평범한 이들보다 몇 배는 뛰어난 감각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겠지. 옆칸에 누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조차도 이렇게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에 그 누구보다 바이올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바이올렛이 도달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당황한 것하고는 별개로 어떤 식으로든 수습을 하긴 해야한단 소리였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만으로 말이다.

그랬다.


애석하게도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딱히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소가 장소니까. 당황에 젖어 어쩔  몰라하고 있는 바이올렛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는 것도, 그 무엇도 당장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기요?"

'대신 이 정도는  수 있지.'

바이올라의 목소리가 재차 울려퍼지는 타이밍에 맞춰서 여전히 당황이라는 이름의 늪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바이올렛의 꼬리를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흐윽..?!"

그리고는 조심스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당연히 가만히 멍만 때리고 있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는 뜻이었다.

꼬리를 타고 올라온 갑작스런 쾌감에 당혹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내 얼굴을 확인한 바이올렛이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표정을 보니 뭐라도 하긴 해야겠는데 이런 상황은 본인도 처음이다보니 뭘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모양.

허나 현실은 그녀에게 여유롭게 고민따위나 하고 있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언니?"

후각이 워낙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탓에 거기에 묻히는 감이 없잖아 있어서 그렇지 바이올라는 귀도 꽤 좋았다. 그러니까 바이올렛이 얼떨결에 흘린 소리를 듣고 그녀의 목소리라는 걸 구분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설마하는 목소리로 던져진 바이올라의 물음이 나무벽 아래에 나 있는 자그마한 틈을 통해 우리가 숨어있는 곳까지 흘러들어온 순간 바이올렛의 움직임이 우뚝하고 정지했다.


동시에 안 그래도 당황으로 젖어있던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1초.

2초.


3초.


4초.

마지막 5초까지.


약 5초만에 당황 속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한 바이올렛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다름아닌..

"흠흠."


누군가로 하여금 들으란 듯이 헛기침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저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했는데 의외로 효과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나무벽 너머에서부터 누군가 당황으로 몸을 움찔대는 기색이 전해져왔으니까.

'아, 하긴..'


생각해보니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좋아하는 남성의 이름을 부르며 열심히 손장난을 쳐대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바로 옆칸에 언니가 숨어있었던 셈이니까. 그야말로 민망하기 그지없는 꼴을  걸려버린 셈이니 당황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터.

"어, 언니가 여긴 왜.. 아니, 아무 냄새도 안났는데.."


문제는 바이올라도 만만하진 않다는 점이었다.

 걸려버린 탓에 당황한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고개를 치켜든 의문만큼은 해소해야겠다고 생각한건지 바이올라에게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으니까.


그에 순간적으로 흠칫했던 것도 잠시, 바이올렛이 아무렇지도 않게 동생의 말을 받아쳤다.  내가 기억하는 평소 그대로의 말투였다.

"화장실에 무슨 일로 들렸겠나요."

볼일 보러 왔지 그럼 너처럼 다른 짓이나 하러 왔겠냐는 식으로 바이올렛이 은근슬쩍 바이올라가 바로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행위를 걸고 넘어졌다.


거기에 대고  수 있는 말?


그딴 게 있을  없었다.

그렇게 동생의 입을 꽁꽁 봉쇄해버린 바이올렛이 마침 잘 되었다는 식으로 말을 이었다.

"행사 관계자들한테 가서 이야기 좀 전해주겠어요? 이야기했던 것보다  늦을 수도 있다고."

"그.. 나는.."


언니의 부탁을 받고 나서야 제가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린 걸까.

바이올라가 웅얼대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화장실 밖으로 내쫓을 생각만 하고 있는 바이올렛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 혹시 바쁜가요? 딱히 그래보이진 않는데."

네가 정말로 바빴다면, 뭔가 따로 할 일이 있었다면 이렇게 화장실 안에서 몰래 혼자만의 시간이나 가지고 있었겠느냐.

그야말로 매콤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그리 쏘아붙이는데 당사자가 아님에도 내 귀가 다 얼얼할 정도였다.

내가 그 정도였으니 바이올라는 어땠겠는가.

그녀는 제 안에 자리잡은 각종 의문을 해결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채 그대로 화장실 밖으로 쫓겨나버렸다.


물론, 바이올렛은 그 와중에도 그냥 쫓아내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말한 걸 성실히 수행한다면 오늘 있었던 일은 모르는 척 해주겠다고 당근을 곁들이기까지 했으니까.


말투가 말투다보니 당근이 아니라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네가 이안의 이름을 부르며 자가발전에 힘썼다는 사실을 알려버리겠다는 협박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 그렇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래요."


자박하고 모래 부스러기 같은 것이 발밑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런 소리를 내며 바이올라는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점점 멀어지다가 이윽고 완전히 끊어져버린 그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야..'

이게 먹히다니.

덕분에  수 있었다.

바이올라가 평소에 바이올렛에게 얼마나  잡혀서 사는 지를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금 몰아붙인 것만으로 저렇게 맥을  출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뭐, 방금과 같은 바이올렛의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숨어있는 곳의 외관이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칸과 크게 차이가 없다는 점또한 한몫했겠지.


누가봐도 창고라는 느낌이 확 두드러졌다면 바이올라를 옆칸에서 내보낸 순간 아마 상황이 뒤집히거나 그러지 않았을까.


어찌되었건 나로서도 아찔하기 그지없었던 상황을 무사히 넘긴  사실이었기에 내심 안도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미 실수라는 말로도 부족한 것을 몇 번이나 저질렀던만큼 그로인해 벌어진  마무리함에 있어서는 방심할 생각따윈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회색에 가까운 은빛의 털로 뒤덮인 세모꼴의 귀를 천장을 향해서 쫑긋하고 세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던 바이올렛의 입에서 마침내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었음을 의미하는 그 소리에 알게 모르게 몸에 남아있던 긴장이 싸악하고 빠져나가며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어졌다.


그래도 상관없긴 했다.

바이올렛의 몸이 여전히 내 몸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었으니까.

묘한 상황이 주는 배덕감?


그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아찔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겪었는데 그딴  남아있을리 있겠는가.

바이올라가 거기 있냐고 물었을 때는 정말로..


'어우..'

순간적이긴 해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쿵쿵하고 뛸 정도니 오죽할까.

그리고 그건 바이올렛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마 나보다 흥이 팍 식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바이올라 아닐까. 분명 그랬을 거다.


그렇기에 금방 풀려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놔주지?'


설마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이대로 좀 더 즐겨보겠다는 생각인 걸까.

바이올라도 쫓아냈으니 나야 그러든 말든 딱히 상관없긴 했지만, 정말 그래도 될런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성녀 다음다음 차례때 단상 위에 올라가 연설을 할 예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막 시작하려던 찰나에 여기 왔으니까..'

주인공 년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조금, 바이올렛의 억지에 맞춰주면서 조금, 갑자기 들이닥친 바이올라를 쫓아낸다고 또 조금 시간이 지났음을 고려하면.. 아마 성녀의 차례는 진작에 끝나지 않았을까.

그 사실을 바이올렛이라고 해서 모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연설을 하기로 한 당사자인만큼 나보다 더 잘 알면 잘 알았지 분명 덜 하지는 않을텐데..

왜 이 상태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이는 걸까.


이대로 가다간 상암참사를 일으켰던 그 강두 놈처럼 바이올렛이 연설 노쇼라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게  것만 같아서 조심스레 시선을 들어올려 그녀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물론,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생각치도 못하게 시간을 소모한만큼 슬슬 자리로 돌아가봐야 하는 건 내쪽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일단 표정을 확인한 후에 대체  이러는지 알아내서 그걸 해결해주고 서로 갈길 갈 생각으로 그리했던 것인데..

고개를 들어올리기 위해 몸을 움직이기가 무섭게, 그러니까 부스럭대는 소리가 화장실 안으로 울려퍼지기 무섭게 바이올렛이 내 몸을 받치고 있던 팔을 이용해 내 몸을 옥죄어왔다.


설마 진짜로 더  생각이었던 걸까.


그래서 내가 반항 비슷한 걸 하려고 하니 막은 것이고?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귓가로 울려퍼진 건 '쉿-!'하고 제법 다급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누가들어도 조용히 입 닥치고 있으라는 뜻이라는  알  있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바이올라가 돌아오기라도 한 것일까.

내게는 딱히 감지되는 것이 없어서 대체  저러는 걸까하는 느낌으로 바이올렛을 바라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바이올라가 자리를 떠나갈 때처럼 세모꼴의 귀를 뾰족하게 세운  내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향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바이올렛이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거  들려요?"

이거라니.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없었다.


그렇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네가 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이거라니요?"

그랬더니 돌아온 건 아까도 들은 적 있는 조용히 하라는 의미가 듬뿍 담겨있는 날카롭기 그지 없는 소리였다.


아니, 저럴거면 무슨 일인지 말이라도 해주고 저러던가. 설명도 안해주고 조용히 하라고만 하면 내가 곧이곧대로 따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게 실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입을 열려던 찰나였을 것이다.


그런 내 기색이 얼굴 위로 그대로 묻어나오기라도 했던 건지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바이올렛이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아.'라는 소리를 냈다.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것같은 그런 음성이었다.


그렇게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던 것도 잠시, 그대로  향해 고개를 기울인 바이올렛이 조심스레 내 귀를 깨물었다.

"윽..!"


그 느낌에 제법 오싹해서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몸을 떨며 인상을 일그러뜨린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제 들리나요?"

혹시라도 남들에게 들릴 것을 우려한 것처럼 일부러 속삭임에 가까운 형태를 띄고 내뱉어진 바이올렛의 음성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옴과 동시에 이질적인 소리들이 귀 안으로 파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는..났나요?"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정체모를 여성의 목소리였다.

다만 감각을 일정부분만 공유받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완벽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예, 다행.. 자는.. 의심.. 군요."


그 다음으로 들려온 것은 누가 들어도 남성의 것임을 알 수 있는 굵직한 목소리였다.

여성의 물음에 답을 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냄새가 났다.


비품 창고에서 나는 냄새보다 몇 배는 더 불쾌하게 느껴지는 음모의 냄새가 비강을 콕콕 찔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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