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눈을 질끈 감은 이유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곧 이 안으로 들이닥칠 바이올라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암만 생각해도 그 부분이 가장 의문이었다.
설마 순간적으로 양심의 가책같은 거라도 느꼈단 말인가?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어쩌면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떠오른 순간, 헛웃음부터 나왔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양심의 가책이라니 그딴 걸 내버린지가 언제인지도 이제 까마득한데 그럴 리 없지.
분명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일뿐이라고 황급히 그 주제를 마무리 짓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 잠깐만..'
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거지?
라는 의문이 불현듯 머릿속으로 떠올랐고, 그 즉시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레 떠봤다. 물론, 당연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딱히 오랫동안 감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어두컴컴하게 물들어있던 시야가 위아래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오기 시작하니 아릿한 통증이 눈을 쿡쿡 찔러댔다. 그 느낌을 억지로 외면하며 문이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눈으로 들어온 건..
'응..?'
예상했던 것하고는 많이 다른 풍경이었다.
그러니까.. 문이 닫혀있었다. 애초에 열린 적조차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방금 울려퍼졌던 그 끼익하는 소리는 대체 뭐였던 걸까. 그 의문은 머릿속으로 떠오른 즉시 해결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끼익- 쾅-!
기다렸다는 듯이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바로 옆칸에서 말이다.
그야말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소리 뒤로 이어진 것을 잘그락하고 뭔가를 걸어잠구는 소리였다.
덕분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이올라가 나와 바이올렛이 숨어있는 곳 바로 옆칸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필이면..'
이왕 화장실에 들린 김에 겸사겸사 볼일까지 보고 가려는 모양.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부터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얇은 나무벽을 통해 전해지는 그 소리가 유난히도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어찌나 자극적인지 아까 전부터 코를 콕콕 찌르며 의도치 않게 억제기 비슷한 역할을 해주던 불쾌한 냄새의 기세마저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낼 정도였다.
쿵쿵하고 심장이 아까하는 조금 다른 박자로 뛰며 바이올렛의 품 안에 포옥하고 안겨있던 얼굴 위로 열기가 훅 솟구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심한 감기에라도 걸린 것처럼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
그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바이올라도, 바이올렛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가 하던 일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바이올렛은 여전히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내 냄새를 방향제삼아 들이키기 바빴으며, 바이올라는 연신 부스럭대며 입고 있던 것을 벗어던지기 바빴다는 소리다.
다만 입고 있는 걸 벗는 게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음, 하긴..'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평소보다 많은 장식을 매달고 있었던 건 바이올라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견장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상태에서 평소같은 느낌으로 옷을 벗었다간 그야말로 대참사겠지. 매달려있던 것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어오를테니 말이다.
스륵-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윽고 울려퍼지기 시작한 천이 살결을 스치며 나는 소리가 굉장히 느릿하게 울려퍼졌다.
"휴우.."
마침내 바지를 벗는데 성공한 걸까.
안도의 기색이 짙게 느껴지는 한숨소리와 함께 바이올라가 자리에 앉는 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따라붙은 건..
쪼르르륵-
반사적으로 숨을 멈추게 만드는 그런 소리였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울려퍼진 건 '으..'하고 몸을 부르르 떨 때나 낼법한 그런 소리였다.
시시각각 전해져오는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벽 너머의 광경이 눈앞으로 그려지는 것만 같아서 그러했고, 바이올렛의 품 안에 안겨 그 소리를 듣고 있다는 점이 더더욱 그러했다.
훔쳐봐선 안 될 걸 훔쳐보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제멋대로 숨이 거칠어져서 그걸 단속하는 것이 꽤나 고역이었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도 그나마 바이올렛이 가만히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게 패착이었나 보다.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바이올렛이 조금씩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으니까. 바이올라가 내는 소리에 맞춰 내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한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지금이야 한창 바이올라가 소리를 내고 있는 와중이라서 바이올렛이 내는 자그마한 부스럭거림은 채 울려퍼지기도 전에 순식간에 묻혀버리고 있긴 했지만.. 나무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저 소리가 멎으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괜찮을까.
감히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불안함이라는 감정이 확 몰려왔다.
어떻게든 해야할 것만 같아서 몸을 움직여 바이올렛의 행동을 제지해보려고 하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그녀의 품 안에 폭 안겨있는 상태라서 암만 몸을 움직여봐야 의미없는 허우적거림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제 품안에서 허우적대는 내 꼴이 바이올렛의 입장에서는 퍽 보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흐.."
왠지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린채 웃고 있는 모습이 생각나게 하는 웃음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더니 츕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는 소리와 함께 말캉하고 촉촉한 것이 목 중간쯔음을 꾸욱하고 짓누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흡사 모기라도 된 것처럼 내 목덜미를 쪽쪽하고 빨아대던 바이올렛이 이내 까슬까슬한 혀를 쭉 내밀어 그 부근을 조심스레 핥아대기 시작했다. 목덜미 쪽에서 시작된 그 감각이 볼까지 올라오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츠윽-
귀 바로 옆에서 울려퍼졌기 때문일까. 바이올렛이 내 볼을 핥아올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퍼졌다. 그 소리가 바이올라에게까지 닿았을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흠칫하고 있던 순간, 바이올라 쪽에서부터 울려퍼지던 물줄기 소리가 뚝 멎었다.
'볼 일도 다 봤으니까..'
이제 밖으로 나가겠지?
부디 그래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배덕적인 느낌이야 나쁘지 않은데 그것 이상으로 조마조마한 느낌이 커서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으니까.
스릴도 즐길만한 수준이어야 즐기지 이건 정도가 좀 과했다.
천같은 것으로 젖어있는 뭔가를 닦아내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던 건 그래서였다.
그렇게 나름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어째선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오질 않았다. 뒷처리를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랬다.
대체 뭘 한다고 자리에서 일어나질 않은 걸까.
속으로 그런 의문을 품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안.."
날 부르는 소리와 함께 굉장히 묘한 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흐으.."
열기가 촉촉하게 배어든 신음성과 살짝 젖은 좁은 틈새를 길쭉한 뭔가로 조심스레 헤집어댈 때나 날법한 그런 소리가 말이다.
그랬다.
화장실 안에 남아있는 내 페로몬 때문인지는 몰라도 바이올라는 자리에 그대로 눌러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제법 애타는 목소리로 내 이름까지 불러가면서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언니인 바이올렛의 품 안에 갇힌 채 동생인 바이올라가 내 이름을 부르며 제 음부를 쑤셔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꼴이라니.
이게 대체 뭘까.
상황이 주는 배덕감과 자극이 정도를 넘어서다보니 흥분 된다기 보다는 그저 얼떨떨했다.
나는 그랬는데 바이올렛은 또 달랐던 모양이다.
맛탱이가 간 상황에서 동생이 하고 있는 짓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정도의 이성은 남아있었던 모양인지 '하..'하고 어처구니 없다는 심정이 그득하게 담겨있는 듯한 음성이 도톰하게 부풀어오른 분홍빛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런 식으로 어처구니 없다는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것도 잠시, 좋은 생각이라도 난 사람처럼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히죽하고 웃은 바이올렛이 이내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한껏 입을 벌려서 저번에 제가 잘근잘근 깨물어댔던 내 어깨 부근을 그대로 와앙하고 베어물었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제 꼬리를 바지런히 쓰다듬어대기 시작했다.
설마 동생한테 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도 해피타임을 갖기로 결심이라도 한 걸까.
대체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황당해하는 눈으로 바이올렛을 바라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저번에 느꼈던, 그러니까 표식인지 뭔지가 내 몸 위로 새겨지던 순간에 느낀 적 있었던 뭔가가 흘러들어오는 듯한 감각이 목덜미를 타고 스멀스멀 흘러들어왔다.
그와 함께 찾아든 것은..
달려있지도 않은 꼬리를 쭈뼛하고 서게 만드는 듯한 강렬하기 그지없는 쾌감이었다.
'..미친?'
순간 머릿속을 쿵하고 때리며 지나간 쾌감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꼬리뼈 부근에 남은 자그마한 흔적만으로도 그 부근이 징징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으으윽.."
혹시라도 벽 너머에 있는 바이올라에게 닿을세랴 최대한 억누른 목소리로 침음성을 흘리고 있으니 바이올렛이 내 목덜미에 박아넣고 있던 입을 떼어냈다.
몸을 타고 올라오던 감각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도 바로 그때였다.
"어떤가요?"
동시에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울려퍼진 바이올렛의 물음 덕분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금 몸을 덮쳤던 그 감각은 그녀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기분좋죠?"
아니나 다를까 바이올렛이 제 손으로 직접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혹시 내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는 것하고 방금 그 감각하고 관련이 있는 걸까.
"이, 이게 무슨.."
그걸 알아보기 위해 당황한 척을 해보이니 그런 내 반응을 확인한 바이올렛이 뭔가에 거나하게 취한 듯한 얼굴을 한채 후후하고 웃었다.
어느새 위로 올라온 그녀의 손이 내 볼을 쓰다듬었다.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쓰다듬는 듯한 그런 손길이었다.
"말했잖아요? 표식의 보유자끼리는 감각을 공유한다고."
어쩐지 그만한 걸 굉장히 순순하게 내놓는다 했더니만..
'이래서였구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힘같은 걸 나눠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말도 안 되는 힘인데 이런 일까지 가능할 줄이야.
바이올렛이나 바이올라가 속해있는 랑인족이라는 종족이 의외로 굉장히 고등한 종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바이올렛의 눈에는 그런 내 모습에 배신감에 젖어 분노하는 것처럼 비춰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어땠나요? 제가 느끼는 '감각'은?"
소감에 대해 묻는 호박빛 눈동자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가 거칠게 일렁거렸다.
그런 눈을 한채 가만히 날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날 겁박이라도 하는 듯 했다.
해서 그녀가 바라는대로 어울려주기로 했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냐.
나무 벽 너머에 있는 바이올라를 의식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그리 물었더니 돌아온 것은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고 따지기라도 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
날카롭게 벼려진 비소가 바이올렛의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하도 얇아서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벽 너머에 동생이 있는데 동생에게 닿아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그녀는 거리낌없이 그런 소리를 입밖으로 뱉어냈다.
"이미 말했던 것 같은데요."
내 말을 뭘로 들었던 거냐.
그녀는 내게 그리 묻고 있었다.
거기에 대고 반박을 할 기회?
그런 건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입을 열려고 하기 무섭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어 내 말을 가로막아 버렸으니까.
"그런데.. 큰맘먹고 표식까지 나눠준 남자가 동생의 치태를 엿들으며 흥분하고 있네요?"
"그건.."
"그것도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 꼴을 두 눈으로 직접 봐야만했던 내 심정이 어땠을 것같냐.
그리 묻는 바이올렛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화가 난 사람처럼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방금 전에 제가 했던 행동이 실은 내 탓이었다며 내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기세를 잘만 유지한다면 원하는대로 밀어붙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테니까.
다만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거기 누구 있어요?"
순간적으로 욱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벽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이의 존재를 순간적으로 간과했다는 것 정도?
아니나 다를까 벽 너머에서 경계심이 듬뿍 배인 목소리가 나와 바이올렛 사이를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