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이안~?"
날 부르는 바이올라의 목소리가 우리가 숨어있는 비품창고 안으로 흘러들어올 때마다 꽉 밀착해있는 부분을 통해 내 것인지 아니면 바이올렛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박동이 쿵쿵하고 울려퍼졌다.
아마도 바이올렛의 것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갑작스러운 바이올라의 등장에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바이올렛만큼 놀랐냐고 하면 그건 분명 아니었으니까.
그만큼 바이올렛은 크게 당황한 상태였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기본적으로 여유로운 모습을 유지하던 표정이 완전히 무너질 정도로 말이다.
내가 단번에 알아차린 그녀의 실수를 여지껏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도 분명 그 때문이겠지. 사람은 당황하면 시야가 좁아지는게 보통이니까.
그렇기에 내 입으로라도 깨우쳐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바이올렛이 그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바이올라가 이곳으로 들이닥치는게 먼저일 수밖에 없을테니까. 날 벽까지 밀어붙인채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 있는 바이올렛을 상대로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던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부디 그런 내 숭고한 뜻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한 행동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생각만큼 잘 전달이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동생 몰래 살짝 맛좀 보고 있던 상황에서 동생이 들이닥친 탓에 안 그래도 당황스러워 죽겠는데 거기에 대고 내가 반항 비스무리한 것까지 해대니 순간적으로 그게 배가 되기라도 했던 것일까.
이래서야 곤란하다는 표정과 함께 바이올렛이 제 분홍빛 입술을 콰득 소리가 나도록 짓씹어댔다. 그러더니 표정을 대번 사납게 물들이고는 그 상태로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날 향해 그르렁거렸다.
"가만히 좀 있어요. 들켜봐야 피차 곤란해지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거 아니에요?"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대체 왜 이러는 거냐는 식으로 지껄여대길래 속으로 헛웃음부터 흘렸다. 동시에 생각했다. 확실히 많이 당황하긴 한 모양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이도 아니고 바이올라가 상대라면 모습만 숨긴다고 끝이 아니라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사실을 지금껏 생각해내지 못할 리 없으니까.
"이상하네 왜.."
지금이야 다른 곳도 아니고 여자 화장실같은 곳에 남성인 내가 들어가 있을 리 없다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착각 때문에 저렇게 바깥만 맴돌고 있지만 솔직히 저 착각이 오래가봐야 얼마나 오래가겠는가?
지금도 저렇게 뭔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판국인데 말이다.
'돌겠네 진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몸부림치던 것부터 멈추었다. 안 그래도 당황 속에 퐁당 빠져있는 사람을 상대로 그런 짓을 계속해봐야 그걸 더욱 부추기는 꼴밖에는 되지 않을테니까.
해서 즉시 움직임을 멈추었더니 이제야 내가 좀 말귀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건지 날카롭게 치솟아있던 바이올렛의 눈꼬리가 약간이지만 누그러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곳에 비하면 한결 자유로운 손을 움직여 혹시 무슨 이상한 소리라도 튀어나올세랴 내 입을 아주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 바이올렛의 손을 가볍게 톡톡 두들겼다. 조용히 있을테니까 이만 놔달라는 뜻이 부디 무사히 전해지기를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물론, 달랑 그것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는 살짝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바이올렛을 향해 던지고 있던 시선에 나름의 간절함을 담아 그녀를 올려보기까지 했으니까.
효과?
당연히 있었다.
그리 행동한 순간 혹시 또 난리를 피우진 않을지 유심히 내 상태를 들여다보고 있던 바이올렛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윽..!"
작게나마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으니까.
빨갛게 변한 얼굴을 내게 보이기 싫었던 걸까. 아니면 계속 날 바라보고 있으면 얼굴이 화끈거려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바이올렛의 고개는 위로 올라간 상태에서 돌아오질 않았다.
그래서 이대로 놓아주지 않는 건가 싶었는데..
스륵-
어느 순간 내 입가를 꾸욱하고 짓누르고 있던 바이올렛의 손이 떨어져나갔다. 혹시라도 내가 소리라도 지를 기세를 보이면 그대로 다시 틀어막아버리겠다는 듯 천천히 뒤로 물러나는 희고 고운 손의 모습을 목도한 순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말부터 입밖으로 내뱉었다.
물론, 그녀에게만 닿도록 음량을 조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냄새요!"
그렇게 내뱉어진 짤막하기 그지없는 한 마디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바이올렛으로 하여금 그녀가 여태껏 놓치고 있던 부분을 깨닫게 만들기에는 말이다.
내 등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던 나무벽을 타고 내 목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바이올렛의 얼굴 위로 느낌표가 떠올랐으니까. 그래 느낌표 말이다. 그 말 외에는 지금 바이올렛이 하고 있는 표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크게 놀랐는지 그런 얼굴을 한채 그대로 굳어버린 바이올렛을 당황이라는 이름의 속박에서 건져올린 것은 다름아닌 바이올라의 목소리였다.
"흐으음.. 혹시.."
드디어 생각이 화장실에까지 미치기 시작한 걸까.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미 근처는 전부다 찾아봤을테니 말이다. 남은 곳은 분명 이곳뿐일테고, 그런만큼 자연스럽게 이쪽에 관심이 기울 수밖에 없을 터.
솔직히 말하자면 여태껏 들키지 않고 버틴 게 용한 수준이었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바이올라가 화장실 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상, 바이올렛이 특출나게 특별한 수라도 쓰지 않는 한 들키는 건 분명 시간 문제일 터.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건 다한 상태라고 생각했기에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으로 들이닥칠 바이올라라는 이름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곧 있으면 바이올라가 이곳으로 들어올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바이올렛이 허둥지둥하다가 꺼내든 뭔가를 나와 자신의 몸 위로 끼얹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곱게 빻아진 가루같기도 하면서도 어딘가 살짝 끈적끈적한 느낌을 주는 것이 옷 위로 드러나있던 살갗 위로 끼얹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소리소문없이 움직인 바이올렛의 꼬리가 그대로 내 몸을 감싸안았다.
그것에 포옥하고 감싸여있자니 꼭 잘 만들어진 모피코트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감촉이 좋았으니까.
딱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끼이익-
아까 들었을 때는 딱히 아무렇지도 않았던 문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음산하게 느껴졌다. 어찌나 음산한지 그 소리가 꼭 사신의 발자국 소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자박-
문 열리는 소리 뒤로 이어진 것은 누군가의 발이 가볍게 화장실 바닥을 밟는 소리였다.
"흐으음.. 왜 여기서.."
역시나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바이올라였다.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걸 보면 다른 곳도 아니고 왜 하필 여자 화장실에 내 냄새가 남아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
"화장실이 급해서 착각했나?"
나름대로 그 이유를 추론해보려 했던 것인지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피식하고 웃어버리는 바이올라의 행동 덕분에 깨달았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그녀가 내 냄새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혹시 아까 바이올렛이 다급하게 내 몸 위로 흩뿌렸던 요상한 가루하고 관련이 있는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바이올렛이 한껏 낮춘 목소리로 내게 주의를 주었다.
"쉬이-"
어느새 귀 바로 옆에 딱 붙어버린 바이올렛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그 소리가 제멋대로 귓속을 헤집어댔다. 그 느낌이 그렇게 오싹오싹할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거리고 있자니..
"흐흥.."
바로 조금 전까지 동생에게 이 현장을 들키기라도 할까봐 허둥지둥 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새 까먹기라도 한 것인지 흡족함이 그득하게 담겨있는 음성이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 뒤로 따라붙은 건..
"윽..!"
말캉하고 따뜻하면서도 살짝 축축한 것이 귓볼을 잘근잘근 짓씹어대는 감각이었다.
조금만 힘을 줘서 때리면 그대로 뻥 뚫려버릴 것 같은 얇디 얇은 나무벽 너머에 바이올라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미친 짓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는 상황.
그렇기에 깨달았다.
바이올렛이 지금 많이 취한 상태라는 걸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로 옆에 바이올라가 있는데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한편으로는 그런 그녀의 상태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랑 이렇게 바짝 밀착한 건 저번에 내 목덜미에 표식이라는 걸 새길 때 이후로 최초니까. 심지어 그때보다 더 오래 붙어있기까지 했으니 취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동생이 바로 벽 너머에 있는데 언니라는 인간은 내 목덜미에 코를 묻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상황.
장소까지 고려하면 배덕적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한 상황이건만 의외로 그런 느낌은 별로 없었다.
그런 느낌이 들만하면 콧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결코 좋은 냄새라고는 말할 수 없는 냄새 때문이었다.
그랬다.
나와 바이올렛이 숨은 장소가 장소다보니 아까 전부터 숨을 들이킬 때마다 쿰쿰한 냄새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콧속으로 파고들어와 그 안을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래 묵은 걸레 냄새라고 해야할까. 좋게 포장해서 그 정도지 가감없이 말하면 여름 방학 내내 사물함 안에서 방치된 우유에서 날법한 그런 냄새가 나고 있었다.
살짝 맡은 것만으로도 우욱하고 구역질이 치솟은 그런 냄새랄까.
그런 류의 냄새에 상대적으로 면역이 있을 뿐더러 후각도 평범한 수준인 나도 이렇게 괴로운데 나보다 최소 몇십 배는 민감한 후각을 지닌 바이올렛은 어떻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지금쯤 콧속으로 제멋대로 파고들어오는 냄새 때문에 상당히 괴로울 터.
그러니 지금도 이렇게 내 목덜미에서 코를 떼지 않고 있는 거겠지. 저 구역질 나는 냄새에 비하면 내 냄새는 백배 천배 나을테니 말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계속해서 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토록 빠르게 취해버린게 아닐까.
라고 여유롭게 추측만 하고 있을 여유따위는 없었다.
정말 맛탱이가 가버린 것인지 이제는 아예 혀까지 쭉 내밀어 내 목덜미를 핥짝거리기 시작했으니까.
그 와중에 더 환장하겠는 건 화장실 안으로 발을 들인 바이올라가 보여준 행동이었다.
"뭐야.. 아무도 없네? 흠.."
바이올렛이 부린 수작으로 인해 그토록 뛰어나던 후각이 사실상 무력화되니 바이올라는 사실상 탐지능력을 상실해버렸다. 벽 바로 너머에 나와 바이올렛이 있는데 그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태평하게 저따위 말이나 중얼대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없다는 걸 확인했으면 다시 나갈 것이지 바이올라는 무슨 생각인지 그대로 화장실에 눌러앉아버렸다.
"흐흥~"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뭔가를 슥슥 쓰다듬어대는 걸 보면 화장실에 들린 김에 제 자태를 거울에 비춰보며 그걸 가다듬고 있기라도 한 모양.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머리인지 꼬리인지 모를 것을 쓰다듬어대던 바이올라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갈 생각인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처음 울려퍼지기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조금씩 멀어져가던 발자국 소리가 어느 순간 나와 바이올렛이 몸을 숨기고 있는 비품 창고를 향해서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
그 정도면 하고 있는 짓거리를 조금이라도 자제할 법도 하건만 바이올렛은 내 목덜미에서 나는 냄새를 만끽하는 것 외에 다른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렇다는 건?
뭔가 대처를 하더라도 나 혼자서 해야한단 소리였다.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도 자박자박하고 울려퍼지는 발자국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바이올라의 목표가 이곳이라고 속삭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점점 더 커져가는 발자국 소리에 맞춰서 아까 전부터 쿵쿵하고 울려퍼지던 심장의 소리가 조금씩 북소리처럼 변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나와 바이올렛이 몸을 숨기고 있는 비품 창고의 문 바로 너머에서 뚝 멎은 순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렇게 바짝 긴장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끼이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게 꼭 비명소리처럼 느껴졌다.
귓가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