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이야..'
이걸 이렇게 먹인다고?
사람 멕이는 솜씨가 아주 수준급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어렸을 적부터 주로 배워온 것들이 저런 것들일테니 말이다.
아무튼 순간적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침묵하고 있자니 바이올렛은 그런 내 침묵을 민망함내지 난감함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얼굴 위에 눌러붙어 있던 미소가 조금 더 빙글거리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마치 먹잇감의 급소를 포착한 것 같은 그런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대충 그런 느낌이길래 한 번 거기에 맞춰줘보기로 했다.
"그.. 아무리 그래도 화장실은 좀.."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다는 식으로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니 바이올렛이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한채로 되물어왔다.
"왜요?"
왜요라니.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 아닐테고 내가 뭐라 말하는지 들어본 다음에 하나하나 봉쇄해버리겠다는 생각인 거겠지. 그렇게 해서 날 더 도망칠 수 없는 곳까지 몰아간 다음에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 생각 아닐까.
"그야.. 안에 누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디 어떤 식으로 내 입을 틀어막을지 한 번 보자는 심정으로 이런 상황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될만한 핑계거리를 꺼내들어봤다. 그랬더니 내가 그리 말할 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바이올렛이 피식하고 웃었다.
"없는데요?"
"..네?"
"안에 아무도 없다구요."
친절하게 덧붙인 바이올렛이 나로 하여금 보란듯이 제 코를 톡톡 두들겨댔다. 아마도 저건 안쪽에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바이올렛이 착각했을 가능성?
거의 없었다.
앓고 있던 코병이 치료된 덕분에 바이올라와 비슷할 정도로 후각을 회복하는데 성공한 그녀니까. 미리 대비라도 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의 코를 속인다? 그런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면 된다.
'미리 알고 대비했을 가능성은..'
없겠지. 진이 예언자라도 되지 않는 한은 말이다.
'저 안에 없단 말이지..'
그럼 대체 어디에서, 어디로 샌 걸까.
그런 의문이 머릿속으로 떠오른 즉시,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혹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나쳐온 곳중에 빠져나갈만한 구석이 있었나하고.
물론, 성과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건물 안이라고 해서 지켜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니까. 경계를 도맡은 이들이 협조라도 하지 않는 한 몰래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할텐데..
머릿속으로 그런 추측을 이어나가면서 겉으로는 바이올렛을 상대로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당장은 없어도 혹시 중간에 누가 들어올 수도 있는 건 아닙니까?"
"흠, 하긴 그렇죠."
"그러니까 저쪽 말고 다른 곳으로.."
"그렇지만 상관없을걸요?"
아니, 대체 어떻게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걸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황당해하는 눈빛으로 바이올렛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그런 내 시선을 받은 그녀가 보란듯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눈이 멀쩡하다면 그대로 다시 나갈테니까요."
그러더니 설마 내가 황녀인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날 상대로 까불겠냐는 식으로 말을 하더라.
나름 그럴 듯하게 들리긴 했다. 오늘 직접 본 게 있다보니까 반박하려고 하면 반박하지 못할 것도 없긴 했지만 일단은 그랬다.
그런 내 기색이 그녀에게까지 닿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는 거울이 없잖아요."
바이올렛이 잽싸게 명분 하나를 더 추가해왔다.
"성녀님 다음, 다음 차례가 되면 저도 단상 위로 올라가야 할텐데 되도록 깔끔한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정돈이 끝나면 잘 됐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고, 그를 위해서라도 거울의 존재는 필수다. 그러니까 그냥 화장실에서 하는 게 어떠냐.
바이올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 그냥 다른 곳에서 한 다음에 화장실에 들려서 확인하면.."
"귀찮잖아요. 그럴만한 시간이 없을 수도 있고."
암요.
그러시겠죠.
조금씩 말이 거칠어지는 걸 보면 슬슬 이성이 흐릿해지기 시작한 모양인데..
여기서 더 끌었다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화장실로 끌려들어가게 될 것만 같아서 한숨과 함께 바이올렛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인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걸까. 제법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며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내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길래 그러지 말고 얼른 내놓으라는 뜻으로 그녀를 향해 펼쳐보인 손을 살짝 흔들어주었다. 그랬더니..
"자요."
바이올렛의 손이 그 위로 올라왔다.
그 상태로 이제 됐냐는 식으로 날 쳐다보는데 헛웃음부터 나왔다. 아니, 빗을 달라는 뜻이었는데 이건 또 뭔..
"손 말고 빗 말입니다."
해서 곧바로 그녀의 착각을 바로잡아주니 '에..?'하고 살짝 얼빠진 소리가 분홍빛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와 함께 살짝이긴 하지만 뭔가에 취한 듯한 느낌을 풍기던 바이올렛의 얼굴 위로 붉은 자욱이 폭발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소리로 따지면 '펑!'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보아하니 방금 제가 한 행동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이었는지를 새삼 깨달아버린 모양.
'하긴..'
당연히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무려 황녀라는 위치에 있는 자가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행동한 셈이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치스러울텐데 그녀는 부분적으로나마 늑대의 형질을 물려받지 않았던가. 그러니 남들보다 데미지가 곱절은 될지도 모르지.
그런만큼 당연히 회복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바이올렛은 회복이 굉장히 빨랐다.
뿐만 아니라 역으로 철면피를 깔아대기까지 했다.
"그러면 그렇게 말을 했었어야죠."
방금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확실하게 행동하지 않은 내 잘못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 당연히 오해할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식으로 말을 해대길래 일단은 굽혀주는 척을 했다.
간단한 사과의 말과 함께 바이올렛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니 이쯤하겠다는 식으로 작게 헛기침을 한 그녀가 이럴 때가 아니라며 날 화장실 안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어어하는 사이에 화장실 안으로 끌려들어가게 된 순간, 날 그 안으로 끌어들인 이가 가장 먼저 보인 행동은 다름아닌 화장실 안에 비치되어 있는 세면대를 붙잡고 날 향해 제 엉덩이를, 아니 꼬리를 내미는 것이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시간이 없으니 부디 서둘러 달라는 식으로 말을 해대는 바이올렛으로 하여금 보란듯이 떨떠름한 표정을 얼굴 위에 띄우고 있는 동안에도 날 향해 들이밀어진 그녀의 꼬리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묘하게 태평하게 느껴지는 것이 꼭 이 문제는 자신하고 상관없다고 선을 긋는 듯 했다.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대체 꼬리의 어떤 부분이 붕 떠있다는 걸까. 저것의 주인이기에 저걸 매일 보고 사는 바이올렛에게는 그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면 혹시 그냥 날 화장실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생각나는대로 핑계를 댄 건가?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게 보자니 손에 들려있는 빗의 존재가 살짝이지만 마음에 걸렸다.
거기에 정말로 그런 목적이라면 지금처럼 꼬리만 내밀고 얌전히 벽을 짚고 있는 것이 말이 안 되기도 했고.
'그나저나..'
허리쯤 오는 세면대를 손으로 짚은 채 날 향해 엉덩이만 쭉 빼고 있는 모습이 뭐랄까.. 굉장히 야릇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장소가 주는 묘한 느낌까지 어우러지니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쿵쾅 뛰어대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 살짝 민망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언제까지고 그런 느낌에 시달리게 될 것만 같아서 어쩔 수 없다는 듯 포옥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바이올렛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자박-
어쩜 벽을 타고 울려퍼지는 발자국 소리마저도 이렇게 자극적으로 느껴지는지.
그것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바이올렛을 향해 다가선 순간 요가라도 하는 것처럼 예쁜 선을 그려내고 있던 그녀의 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오늘 그녀는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입고 있었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꽁꽁 싸맨 제복 스타일 말이다. 그 위에 그때는 보지 못했던 온갖 장식들이 달려있었다. 그때보다 공식적인 자리임을 고려해 좀 힘을 준 것일까.
'하긴..'
듣자하니 성녀 다다음 차례에 단상 위로 올라가서 연설을 할 예정인 듯 했으니 말이다. 황녀쯤 되는 이의 복장이 단촐해서야 제국의 면이 서질 않겠지.
문제는 그런 목적으로 달린 게 하도 많다보니 바이올렛이 몸을 움직여댈 때마다 잘그락잘그락하는 소리가 난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타이트한 제복에 쫙 감싸인 그녀의 육신이 파르르 경련하기 시작하니 그에 맞춰 자갈이라도 고르는 듯한 소리가 화장실 벽을 타고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그 소리가 조미료가 되어 나와 바이올렛을 둘러싼 상황에 야릇함을 더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꼬리만큼은 여전히 태연했다.
남은 자꾸만 손에 땀이 차서 고역인데 자기 혼자만 태평한 듯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심술이 나서 곧장 그것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얼른 자길 잡아달라고 유혹이라도 하는 것처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던 그것을 그대로 꽈악하고 틀어쥐었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보드랍고 따뜻한 감촉이 착 감겨들어옴과 동시에 앞을 향해 살짝 굽혀져있던 바이올렛의 상체가 펄떡하고 튀어올랐다.
"히잇..!"
날카롭게 벼려진 신음성이 바이올렛의 입술 사이에서 튀어나와 귀를 꿰뚫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방금 그 한 방이 꽤나 치명적이었던 걸까.
위를 향해 튀어올랐던 상체를 다시금 앞을 향해 숙인 바이올렛이 그 상태로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하려던 일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평소였다면 바이올렛에게서 저런 반응이 튀어나온 시점에서 하던 걸 멈추고 일단 그녀의 눈치부터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 내게는 명분이랄게 있었으니까. 바로 바이올렛에게 겁박 비슷한 것을 당했다는 명분이 말이다.
비록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온건한 형태로 일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겁박당한 건 겁박당한 것이니 그것 때문에 살짝 열받은 척을 해도 이상하게 여겨질만한 구석은 없겠지.
물론, 화난 척 하고 있는 것하고는 별개로 부탁받은 일만큼은 제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그것도 그냥 제대로가 아니라 한올 한올 신경써서 아주 꼼꼼하게 빗어줄 생각이다.
모처럼 부탁(?)을 받았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도구도 딱 좋았다. 빗살 간의 간격이 촘촘하기 그지없는 것이 이걸로 빗으면 굉장히 가지런한 모양새가 나올 것 같달까.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예의상 예고를 한 번 날려준 뒤에 빗을 쥐고 있는 손을 반대쪽 손에 잡혀있는 꼬리를 향해 가져갔다.
그러고 있자니 볼 수 있었다. 바이올렛이 세면대를 짚고 있던 손 중에 하나를 떼어내어 그것을 이용해 제 입을 다급하게 틀어막는 모습을 말이다. 아까처럼 그걸 자유롭게 내버려뒀다간 또 무슨 소리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일단 틀어막고 본 모양.
그 모습을 내게서 숨기려는 듯 그대로 고개를 살짝 숙여버리는 바이올렛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꼬리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까지 가져다붙였던 빗을 풍성하기 그지없는 꼬리 안으로 푸욱하고 박아넣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쭉 빗어내리니..
"으읏..!"
아까 튀어나왔던 것에 비하면 많이 억눌린 듯한 신음성이 입술 쪽을 꾹 짓누르고 있던 손바닥 틈 사이에서 새어나와 화장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금이라도 손을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그 소리를 만끽하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안~?"
굳게 닫혀있는 화장실 문쪽에서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화장실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에 조심스레 귀쪽을 향해 귀를 기울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목소리가 재차 울려퍼졌다.
"이안~?"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날 찾고 있었다.
문제는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당장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일단 앨리스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목소리가 아니니까.
그럼 누구지?
누가 날..
딱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홱하고 몸이 잡아당겨졌다.
그렇게 어어하는 사이에 끌려간 곳은 다름아닌 화장실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비품창고였다. 그러니까 주로 청소도구 같은 것들을 넣어두는 공간 말이다.
바이올렛의 손길에 이끌려 한 명이라면 모를까 둘이 동시에 들어가기엔 여러모로 비좁은 그 공간 안에 틀어박히게 된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미친..?'
지금 화장실 밖에서 열심히 날 찾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바이올라.
지금 날 비품창고 벽으로 몰아붙인채 내 입을 있는 힘껏 틀어막고 있는 여성의 동생이 날 찾아 화장실 바깥을 거닐고 있었다.
제법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