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08)화 (207/366)



〈 20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흠..'

어떻게 한 번 찾아봐?

진의 부재를 자각하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다름아닌 그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궁금했으니까. 성녀가 모습을 드러내려고 할 때마다 이렇게  자리를 벗어나는 이유가 말이다.

이미 이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던만큼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는 상황.


그리고 뭣보다 타이밍이 공교로워도 너무 공교로웠다.


이래서야 진이 성녀와 마주치는 걸 피하는 것 같지 않은가?

날 이토록 심각하게 만드는 점은 다름아닌 그것이었다.


왜?

대체 왜 진은 성녀를 피하려 드는 것일까?

일단 일반적인 경우라고는 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주인공이 여성인 경우는 나도 처음 겪는 것인지라 그동안 경험한 것들을 통해 알게된 지식들이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을테지만, 그럼에도 성녀라고 하면 주인공과는 호흡이 좋은 것이 보통이니까.

성녀 본인이 광신도라도 되지 않는 한 보통 그랬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뭘까.


혹시 주인공이 여성이라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여자라고 해서 성녀를 피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뭣보다..'


성녀는 진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처럼 피해다닌다?

'대체 뭐지..'

꼭 마치 가느다란 실같은 것이 이빨 사이에 끼어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묘하게 신경에 거슬린다고 해야할까. 바라보고 있는 방향의 반대쪽을 향해 몸을 돌린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지금 머릿속은 물론이거니와 가슴 속까지 가득 채운 의구심을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이 느낌에 시달릴 것만 같았으니까.

물론, 당연히 그냥 자리를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몸을 돌리기 무섭게 옆에서 참견이 들어왔으니까.

"응? 어디가?"


이제 곧 개막식 시작인데 어딜 가려고 그러는 것이냐.


그리 묻는 듯한 앨리스의 목소리와 함께 그에 반응한 이들의 힐끔거림이 몸에 와닿았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문을 느낀 건 앨리스 뿐만이 아니었는지 궁금함이라는 감정이 제법 진득하게 담겨있는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받아내며 앨리스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는 살짝 난감해하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놓고 있다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잠시 가까이 와줄 수 없겠냐는 의미였고, 그에 응한 앨리스가 내쪽을 향해 몸을 기울여 온 순간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화장실이요."


"아."

뭔가 깨달은 듯한 탄성 비스무리한 것이 울려퍼지고, 그 뒤로 따라붙은 것은 확 번져나가는 붉음이었다.


혹시 뭐 이상한 상상같은 거라도 한 것일까. 앨리스는 필요 이상으로 민망해했다.

"그.. 같이 가줄까?"

그러더니 붉음이 채 완전히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한채 날 향해 그리 물어오길래 피식하고 가볍게 웃으며 거절했다.


"됐어요. 제가 무슨 애도 아니고."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덧붙인 뒤에 그대로 대열을 이탈해 그것의 맨뒤를 향해서 나아갔다. 그러고 있자니 호위를 목적으로 대열의 후미를 지키고 있던 교국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모여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내게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이제 곧 성녀님께서 연설을 시작하실텐데 감히 어딜 가는 것이냐고 말이다.


하나같이 뒷짐을 지고 선채 눈빛으로만 그러는 것이 살짝 기묘하면서도 웃겼다. 그러지 말고 한 명이라도 날 찾아와서 물으면 될텐데 말이다. 뭣하러 눈에 그리 힘을  주는지 원..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교국에 소속된 이들과 비슷한 열에 자리를 잡고 있던 왕국 측 기사가 날 향해 물어왔다.

곧 있으면 행사가 시작될텐데 지금 어딜 가는 거냐고.

"그.. 화장실이 급해서요."

"아, 크흠..!"


민망했는지 부러 헛기침을 한 번 한 그녀가 이내 손을 들어올려 한쪽을 가리켰다.

"얼른 다녀오도록."

저렇게 말한다는 건 저쪽으로 가면 화장실이 나온다는 소리겠지.

해서 곧장 기사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니 등뒤에서부터 날아온 감시라는 이름의 시선이 등으로 와서 푸욱하고 박혀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확신했다. 보나마나 진도 이쪽으로 향했을 거라고.


그도 그럴 것이 중간에 다른 곳으로 쏙 빠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까 그나마 좀 나았다.

적어도 밖에 있을 때처럼 감시하는 시선 때문에 등짝이 뚫릴  같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안쪽에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건 마찬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화장실 앞까지 철저하게 지키기는  그랬던 모양인지  근처는 비교적 인적이 뜸했다.


여태껏 뒤집어 쓰고 있던 탈을 벗어던지고 수색모드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중간에 순간이동 같은 거라도 하지 않았다면..'

분명 이 안에 있을 거라는 소린데.. 어디있지?

시험삼아 고개를 좌우로 돌려봤지만 역시나라고 해야할지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어디로 간 걸까. 혹시 화장실 안에 쳐박히기라도 했나?

당장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유력한 후보군은 그곳 뿐이라서 직접 안으로 들어가서 꼼꼼히 살펴봤지만 화장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없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딜까. 솔직히 말해 이제 떠오르는 곳은 딱 한 곳 뿐이었다. 그러니까.. 여자 화장실 말이다.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은 본래 여성이지 않은가? 그러니 남자 화장실 쪽보다는 여자 화장실 쪽이 짱박히는 장소로 더 끌렸을지도 모르지.


해서 조심스레 화장실을 빠져나와 그쪽으로 향해봤다.

그렇게 누가봐도 여성용 화장실 임을 알  있는 곳 앞에 도착하게 되었지만..

'음..'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명백히 별개의 문제였다.


딱히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아, 이건 좀..'하는 생각부터 먼저 들면서 안으로 들어가는 게 무지하게 꺼려진달까. 사실 입구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는 시점에서 아웃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내 최선이었다.


그러니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 쪽에서만 안쪽의 기척을 살피는 것이 말이다.


이 이상은 아무리 나라도  그렇달까.


허나 그것만으로는 역시 한계가 있는 법.

암만 안쪽의 기척을 살펴보려 해봐도 걸려드는  쓰잘데기 없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전부다보니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했고, 그러면 그럴 수록 자꾸만 고개를 치켜드는 것은 '눈  감고 한 번 저질러봐?'라는 생각이었다.


조금씩 그쪽을 향해 마음이 기우는  느끼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흐음? 지금 뭐하는 거죠? 화장실 앞에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목소리가 뒤쪽에서부터 울려퍼졌다.


하고 있던 짓이 있다보니 놀라지 않을래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 탓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흠칫하고 튀어오르며 한껏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몸이 제멋대로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바닥이 가까워지고 있던 순간, 앞으로 고꾸라지던 날 건져낸 것은 다름아닌 방금 울려퍼진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조심해야죠. 다칠라."


두 번째로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목소리고 말투고 하며 퍽 익숙하다는 걸 말이다.

그에 내심 안도하고 있으니 앞으로 고구라지다 말고 중간에 강제로 멈춰진 탓에 대롱대롱 흔들리던 몸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홱하고 끌려갔다. 물론, 내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뒤로 돌아서게 된 순간 가장 먼저 눈으로 들어온  역시나 은빛에 가까운 회색빛 털로 뒤덮인 세모꼴의 귀였다.

귀는 하늘을 향해 쫑긋하고 솟구쳐 있었다.

방금 제가 본 광경에 대한 흥미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듯한 그 모습에 슬쩍 시선을 밑으로 내려보니 그제서야 볼 수 있었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내걸고 있는 바이올렛의 모습을 말이다. 꼭 마치 건수라도 잡은 듯한 얼굴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그녀의 표정을 목도한 순간 직감했다. 방금 본 걸 빌미로  어떻게 해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거참..'


설마 협박이라도  생각인가?

아무튼 계속 이렇게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로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기울어져 있던 몸을 잽싸게 바로 잡은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바이올렛의 손을 조심스레 떨쳐냈다.

어쩌면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바이올렛은 굉장히 순순했다.

이미 확실한 건수를 잡았으니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모양.

아니나 다를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바이올렛이  향해 재차 물어왔다. 여성용 화장실은 왜 기웃거리고 있었던 거냐고. 그리 묻는 그녀의 입가에는 여전히 예의 그 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게 참 악질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당하는 입장에서 말이다.

차라리 그녀가 대놓고 이쪽을 협박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초조한 느낌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적당히 맞춰주고 치워버리자고 생각했겠지.

헌데 협박 대신 저런 식으로 '너 나한테 약점 잡힌 거 알지? 그래서 나한테 뭘 줄래?'라는 느낌으로 생글생글 웃고만 있자니 벌써부터 골치가 지끈거린달까.


'이래서 선제충은..'


얼굴이 제멋대로 구겨지려고 했지만 꾹 참아가며 빠르게 짱구를 굴리려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그리고는 바이올라를 향해 역으로 물었다.


"그.. 황녀님? 여기는 어쩐 일로..?"


자신이 던진 질문은 싹 무시한채 그렇게 물어오는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순간적으로 바이올렛의 눈썹이 꿈틀하고 떨렸지만 그런 것치고 그녀는 순순히 내 물음에 답해주었다.

"그야 당연히 화장실에 들리기 위해서죠."


물론, 그렇게 흘러나온 대답마저도 내게 긍정적인 건 아니었다. 내 질문에 답을 하는  하면서도 그녀는 은근히 묻고 있었으니까.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너는 남자 화장실도 아니고 여자 화장실 앞에서 뭐하고 있었던 거냐고.

"어, 음.."

뭐라고 답을 하는 게 좋을까.

길게 고민할 시간은 없어보였다. 내가 답을 하지 못하고 침묵하니 바이올렛의 얼굴 위로 내걸린 미소의 색이 한층 더 진해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찐득찐득해지고 있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싸리 사실대로 답을 해봐?

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으로 떠오르기도 했지만,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여자 화장실 쪽을 기웃거리고 있던 판국에 누굴 찾고 있었다고 말해버리면 바이올렛을 자극하는 꼴밖에 되질 않을테니까. 어지간하면 그렇게 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본적으로 자제심이 강한 편이라서 그렇지 한  브레이크가 사라지니 동생보다 더 빠꾸가 없어진 게 바로 바이올렛이니까.

헌데 다른 여성의 존재를 암시하는 식으로 그런 그녀를 자극한다?

그것 때문에 바이올렛이 꼴이라도 받는 날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나로서도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해서 마땅한 답변을 찾지 못하고 끙끙 앓고만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여기서 더 고민할 시간을 줘봐야 정상적인 답변을 듣긴 힘들 거라 판단한 것일까. 어디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번 보겠다는 식으로 나름 흥미진진하게 날 내려다보고 있던 바이올렛이 대뜸 짝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쳤다.


"아! 마침 잘됐네요."

뭐가 마침  됐다는 걸까.

대체 어떤 흐름을 거쳐야 그런 결론이 나오게 되는 건지 나로서는 감히 알 수가 없어서 살짝 멍한 눈으로 바이올렛을 응시하고 있자니 그녀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제 품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품 속으로 들어갔던 손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곳에는 꽤나 촘촘해보이는  하나가 쥐어져있었다.

"안 그래도 긴장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꼬리털이 자꾸만 붕 뜨는 게 고민이었거든요."

"..."


"혹시 바쁘지 않다면 정리하는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녀와 날 둘러싼 상황을 고려하면 온건하기 그지없는 제안이었지만 내게는 바이올렛의 말이 그 무엇보다 강력한 협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그 때문이었다.

"..네, 원하신다면."

바라는 게 그게 전부라면 빠르게 해주고 치워버리자는 생각으로 그리 대답했던 것인데..


"그럼, 자리를.."

"아뇨, 그럴 필요까지 있나요? 시간도 별로 없으니까 그냥.."


바이올렛은 거기에 대고 한술을  떴다.

"여기서 빨리 해버리죠."

그리 말하는 바이올렛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에는 바로 조금 전까지 내가 기웃거리고 있던 여자 화장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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