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05)화 (204/366)



〈 20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이걸 가지고 주인공 놈, 아니 년을 어떻게 해볼까하는 것이었다.

'놈놈거리던  입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네.'

솔직히 말하자면 어쩔 수 없었다. '주인공 년'보다는 '주인공 놈'쪽이 훨씬 입에 찰싹 달라붙는 뭔가가 있으니까. 주인공 년은 어딘가 어색하달까. 매번 놈으로만 부르다가 갑자기 년으로 부르려니 그게 익숙치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장은 그랬다.


아무튼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 성별을 남들한테 꽁꽁 숨기고 있는 걸 보면 들켜선 안 되는 이유같은 거라도 있는 모양인데 그런 거라면 그걸 이용해보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떠오른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속으로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누가봐도 악역같아보이는 놈들이라면 모를까 주인공이라는 존재를 놓고 협박할지 말지 고민하는 날이 오게  거라고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 감상과 함께 머릿속으로 떠오른 건 그 존재 자체가 평범한 이들에게는 사기나 다름없는 주인공이라는 이들의 약점을 움켜쥐고서 그들을 자기 입맛대로 어떻게 해보려던 이들의 말로였다.

어째 떠오르는 얼굴마다 좋게 끝난 이가 없었다.


죄다 주인공 놈의 손에 목이 달아나거나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이들까지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해버린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나마 좋게 끝난 경우가 주인공 놈이 동정심을 발휘해서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지 않고 추방해버린 것 정도?

그마저도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토해내고 난 후의 일이니 좋게 끝난 거라고 보기 어렵긴 했다.

때로는 제가 가진 부나 직위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 이들에게서 그것들을 빼앗아버리면 그들은 사실상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갈 뿐이겠지.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식이랄까.

순간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던 제법 달콤하게 느껴진 울림을 즉시 고개를 가로저어 부정했던 건 그래서였다.

애초에 주인공이라는 것들은 세상의 사랑을 듬뿍 받는 존재들이었다. 그놈들을 향한 세상의 사랑이 얼마나 진득하고 말이  되는 정도인지는 내가  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옆에서 지켜봐왔으니까.


양아치들에게 시비가 걸린 이들을 구해주면 절세의 미모를 가진 여성이 뿅하고 튀어나오고, 적에게 쫓기다가 더는 도망칠 곳이 없어 천 길 낭떠러지를 향해 몸을 던지면 뒤지는 대신 은거기인을 만나게 되는 것이 주인공이라는 것들이다.


헌데 그런 놈들하고 맞설 생각을 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래, 혹시 내가 갑자기 치매라도 걸려서 홰까닥해버리기라도 하면  모르지.

그게 아니고서야 주인공 놈과 맞선다는 선택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킵.'


꼼짝없이 고추 새낀줄 알았던 이번 회차의 주인공이 실은 년이었다고 해서 당장 그걸 이용해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법같은  없지 않은가.

혹시 또 모르지.

지금 당장은 그걸 써먹을만한 구석이 없지만 나중에라면 다를지도.


그만큼 상황이라는 건 시시때때로 바뀌는 것이니 말이다.


해서 확인에 성공한 사실을 잠시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다만 당장은 묻어버리기로  것과는 별개로 새롭게 알게된 것으로 인한 싱숭생숭함만큼은 내가 어찌할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분이 살짝 요상하긴 했다.

그렇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요상하기 그지없는 기분 속에 퐁당 빠져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흘러 마침내 교류전이 시작되었다.

이만하면 규모의 행사라면 늘 그렇듯 교류전의 시작은 축사부터였다.


평소보다 몇 배는 깔끔하게 차려입고서 교국 측에서 지정한 장소로 집합하니 도착했다는 소식만 들었지 실물은 확인하지 못했던 왕국 연합 측 참가자들의 면면을 확인할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얼굴 옆쪽에 지느러미같은 것들을 달고 있는 푸른 피부의 인간들이었다.

'어인.. 같은 건가?'

그런 느낌이 물씬 풍겨서 그런지는 몰라도 왠지 수영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잘 할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수영은 교류전의 종목으로 채택되진 못했지만 말이다.


 외에도 몸 곳곳에 금속이나 암석으로 보이는 것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는 이들도 있었다.


'신기하게 생겼네..'


강도는 어떠려나?

일단 보기에는 제법 딱딱해보이는데 말이다. 무기가 박힐지 모르겠다.


특이하다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이질적으로 생겨먹은 이들에다가 제국 출신의 다양한 종족들까지 어우러지니 흡사 인종 박람회장에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걸까.

주변에  있는 이들의 반응도 대개 비슷했다. 눈을 크게 뜬채 여기저기 둘러보기 바쁘거나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기라도 한 것마냥 감격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는 식이랄까.

물론, 그런 식으로 특이하게 생긴 이들만 있는 건 또 아니었다.

구성원이 전부 순수한 인간인 이쪽하고는 다르게 그 비율이 상대적으로 작긴 하지만 저쪽에도 우리와 같은 이들이 섞여있긴 했으니까.


그런만큼 딱히 신기함을 느낄만한 구석이 없을텐데도 저쪽또한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우리 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일단은 외국인이다보니 그저 신기하게 느껴지기라도 하는 모양.

그런 우리보다 더 주목을 받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개최국 특전으로다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한 교국 소속의 인원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참가자들이랍시고 모인 이들이 죄다 금발이었으니까. 사람마다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긴 했지만 일단은 그랬다.


그렇다보니 그쪽을 향해 선뜻 시선을 주기가 좀 난감했다. 하필이면 시간대가 또 정오인 탓에 그쪽을 향해 눈을 돌리면 시야 속으로 반짝반짝한 것들이 가득 차서 거기서 오는 피로감이 장난 아니었으니까.  마치 눈동자 표면에서 팝핑캔디가 터지는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잠깐이라도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따끔따끔한 것이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유독 그쪽만 외면하고 있는 것도 그 탓이 컸고.

'그나저나..'


대체 언제 시작하려나.


슬슬 시작할 때도 된 것 같은데 말이다.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텅 비어있어서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던 곳이 지금은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폭탄같은 거라도 터지면 난리가 나겠는데..'

사람들로 가득 찬 광경을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 교류전때 뭔가 일을 터뜨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놈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당장이라도 테러가 마려워서 손이 달달 떨리지 않을까.

그렇다고 당장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하겠지. 주최 측인 교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교류전에 발을 담군 여러 나라들 중에서 테러의 위협에 대해 가장 선명하고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교국일 것이다.

 증거가 바로 지금  옆에 서 있었다.


앨리스라는 이름을 한채로 말이다.


일전에 앨리스가  상대로 스스로 밝혔던 것들을 떠올려보면 그녀는 교국 측에서 왕국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심어놓은 첩자 격의 존재였다.


교국에서 모시는 여신이 성녀의 입을 빌려 멸망과 관련된 신탁을 읊조리고 난 후부터는 수집하는 정보가 왕국의 동향에서 신탁 속의 남성과 관련된 것으로 바뀌었을테지만  전까지는 분명 왕국의 사정을 파악하는데 주력하고 있었겠지.

그러한 일이 과연 우리 왕국에서만 벌어졌을까?

그렇지는 않을 거다.

분명 우리 왕국을 포함해 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이루어졌겠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각국으로 보낼 사람을 마련하는게 문제지 첩보작업을 위한 자금조달이나 첩보원을 위한 인프라 구축같은 거야 각지에 위치한 신전에 일임하면 그만이니까. 그만큼 신전이라는 장소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심지어는 자그마한 마을에도 번듯하지는 못해도 정갈한 모습으로 존재할 정도니 오죽할까.


중요하고 긴밀한 정보같은 건 첩자의 손을 빌려 수집하고 각지에 위치한 신전으로부터 동향같은 것만 보고받아도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가 교국으로 몰려들 것이고, 그 정도면 교국의 수뇌부는 앉은 자리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겠지.

그런만큼 여신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교국 입장에서는 그 무엇보다 경계해야할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사교도들의 동향에 대해서도 굉장히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 그런 놈들이 본격적으로 발호하여 세를 불리기 전에 정의라는 이름의 철퇴 맛을 보여줘서 일찌감치 뿌리뽑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사교도 놈들에 대해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는만큼 당연히 놈들이 뭔가 일을 벌인다면 교류전만큼 좋은 목표도 없다는 것또한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터.


얼추 준비가 끝난 것 같은데도 이토록 시작이 지연되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급한 마음에 대충 시작했다가 뭔가 일이라도 터지면 교국 입장에서는 그것만큼 개쪽도 또 없을테니까.


그런 식으로 슬슬 시작할 법도 한데 시작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를 추측해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옆대열의 앞쪽에서부터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동시에 질서정연하던 것이 살짝이지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설마 그 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여기서 더 지연되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개막식을 위해 꾸려진 대열을 보면 차례대로 왕국연합, 교국, 제국, 왕국 순이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이 소란은 제국 측 대열에서 뭔가 일이 터졌다는 소린데..

'뭐, 사람이라도 쓰려졌나..?'


 정도가 아니고서야 무슨 훈련병이라도 빙의한 것마냥 꼿꼿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던 제국 측 참가자들이 이리 부산을 떨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개의 열을 이루고 있던 제국  대열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 마저도 질서정연하기 짝이 없는 것이 흡사 모세를 영접한 홍해 앞바다의 모습을 보는  했다.

그렇게 좌우로 갈라진 곳을 통해 등장한 이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여태껏 잠잠하던 놈들이  그리들 부산을 떨어댔는지를 말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황녀님께서 행차하고 계시는 판국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을테니까.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제법 화려한 광경을 연출하며 모습을 드러낸 바이올라는 주변에 있는 이들이 부산을 떨건 말건 딱히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보다는 고개를 자꾸만 요리조리 돌려대고 있는 것이 뭔가를 애타게 찾는 듯한 눈치랄까. 그런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깨달았다. 바이올라가 찾고 있는 게 나라는 사실을.


내게서 풍겨져나오는 냄새를 쫓아 여기까지  것일까.

혹시라도 못 보고 지나칠세랴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바이올라의 코는 아까부터 바쁘게 움찔대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내 냄새를 제대로 포착한 모양이다.

콧망울이 움찔대는게 아주 잠시동안 멈추더니 이내 멈추기 전보다 몇 배는 더 격렬해졌다.


주변에 둥둥 떠다니는 냄새 입자들을 모조리 제 안으로 빨아들이기라도  것처럼 오똑한 코를 격렬하게 움찔대던 바이올라가 이내 내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어우 씨..'

솔직히 말하자면 그 순간 아주 살짝이지만 오금이 저렸다. 왠지 모르게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으니까.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침내  발견하는데 성공한 바이올라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표정이 어찌나 밝은지 바로 조금 전까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내가 그리도 반가웠던 걸까.


만개한 꽃을 생각나게 하는 얼굴을 한 바이올라가 이내 손을 들어올리기 시작했고,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불안감을 느꼈던 건.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들어올려지던 바이올라의 손이 그녀의 상체와 정확히 평행을 이룬 순간 살포시 닫혀있던 분홍빛 입술이 벌어지며 그 안에서 터져나온 것은 우렁차기 짝이 없는 외침이었다.

"이안!"

반가움이라는 감정이 꾹꾹 눌러담겨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주변으로 울려퍼진 순간, 나보다 한 발 앞서 반응을 보인 건..

"으응?"

다름아닌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앨리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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