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03)화 (202/366)



〈 20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대련을 위해 디아나와 마주보고 선 앨리스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하고는 살짝 달랐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손목 쪽에 추가된 한 쌍의 아대였다.

평범한 아대 같아보이진 않았다.  증거로 앨리스가 허공에 대고 손을 짤짤 턴 순간 아대에서 바늘을  배로 확대시켜놓은 듯한 쇠침이 뿅하고 튀어나왔으니까.


그곳이야말로 자신이 원래 있었어야할 자리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지극히도 자연스럽게 앨리스의 검지와 중지 사이로 쏘옥하고 기어들어간 쇠침의 끝부분에는 와이어를 생각나게 하는 얇지만 튼튼해보이는 실이 달려있었다. 그것이 아대와 연결된채 쇠침이 거기서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고 말이다.

'던지면 늘어나는 식인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저렇게 실을 달아둘 이유가 없으니까.

몰래몰래 뭔가를 준비하길래 대체 뭘 그렇게 몰래 준비하나 했더니만 신무기를 준비했던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흥미로웠다.


딱 봐도 알겠지만 저런 건 다루기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니까. 어설픈 솜씨로 다루려고 해봐야 득보다는 독이 될 가능성이 컸다.


앨리스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테니 그럼에도 저런 것을 당당히 꺼내들었다는 건 제대로 다룰 자신감이 있다는 거겠지.

'확실히..'


제법 익숙해보이는 모양새긴 했다.


고작 며칠만에 익힌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혹시, 급하게 익힌  아니라 옛날에 자주 사용하던 걸 이번 기회에 꺼내오기라도 한 것일까.

가능성은 충분했다.


일단 왕국 측에 적을 두고 있는 앨리스지만 그녀의 진짜 소속은 바로 이곳, 교국이니까. 앨리스에게 있어 이곳은 일종의 홈그라운드라 할 수 있었고, 그런만큼 그녀의 진짜 신분에 대해 알고 있는 이와 접촉하는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옛날에 주로 사용하던 것들을 조달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정말로 그런 거라면 디아나 쪽으로 많이 치우쳐져 있는 추를 앨리스 쪽으로 조금 기울여도 될  같았다.


아무튼 그래서 시작은 언제  생각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양측의 준비가 얼추 끝났다고 판단한 건지 둘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클레어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이윽고 울려퍼진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고, 대련이 시작되자마자 앨리스는 즉시 뒤로 몸을 날렸다.


탓-


일단 거리를 벌려두려는 모양.

가볍게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앨리스의 몸이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뒤로  미끄러졌다.


물론, 디아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거리를 주게 되면 일방적으로 얻어맞게될 뿐이라는 사실을 그녀라고 해서 모르지 않았는지 곧바로 추격에 나섰으니까.

그러나 그런 디아나의 움직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앨리스는 그냥 도망만 치지 않았으니까.

손목이 살짝 흔들린다 싶더니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있던 쇠침이 일직선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며 추격에 나선 디아나를 향해 쇄도했다. 악랄한 것은 그렇게 날아든 것이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동시에 날아든 게 아니라 절묘한 시간차를 두고 날아든 탓에 어렵지 않게 처음의 것을 쳐내는데 성공한 디아나라도 결국 추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디아나가 멈칫한 사이 앨리스가 가볍게 손목을 휘둘렀다.


그러자 디아나가 휘두른 목검에 채여  멀리까지 날아갔던 쇠침이 앨리스의 손목에 채워진 아대 안으로 쑤욱하고 빨려들어왔다.


'역시..'

원래 사용하던 장비가 맞나 보다.


저렇게 능숙하게 다루는 걸 보면 분명 그런 거겠지.

새로운 장비의 활약에 힘입어 앨리스의 일방적인 공세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물론, 단순히 장비빨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장비가 추가되면서 덩달아 바뀌어버린 앨리스의 전략또한 일방적인 공세를 유지하는데 단단히 한몫 했으니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앨리스에게 있어 비도는 상대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헌데 그 역할을 새로운 장비가 대신해주니 비도또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바로 상대에게 결정타를 입히는 역할 말이다.

그래서일까?


틈만나면 비도를 던져댔던 전과는 다르게 앨리스는 쉬이 비도를 뽑아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앨리스가 비도를 뽑아서 던질 때면 어김없이 아찔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연출되곤 했다.

일전에 내가 그녀를 보고 지금  수준으로는 황녀를 상대하기 힘들거라고 했던  때문에 꼴받기라도 한 것일까.

투척만으로 이 대련을 끝내버리고 말겠다는 듯 앨리스는 허리춤에 꽂아둔 단검 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대련을 이어나갔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디아나가 실시간으로 빡쳐가는 모습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럴만도 했다.

간격을 유지하는 솜씨가 어찌나 교묘하고 뛰어난지 보는 내가 다 열이 받을 정도였으니까. 지켜보는 나조차도 그럴진데 단 한 번도 가까이 접근하는데 성공못한 디아나의 입장에서는 어땠겠는가.


자꾸만 도망치는 앨리스를 한 번이라도 잡아보겠답시고 사방팔방 열심히 뛰어다닌 탓에 땀방울을 매달고 있는 가느다란  위로 도드라진 힘줄의 모습이 지금 그녀가 얼마나 빡친 상태인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 힘줄의 모습이 어찌나 또렷한지 비교적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눈에  띌 정도였다.


결국 참다참다 못해 폭발해버리고 만 것일까.

디아나가 그 자리에 우뚝하고 멈춰섰다.

뭔가를 던지는 입장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표적만큼이나 맞추기 쉬워보이는 표적은  없는 법.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제자리에 멈춰선 디아나의 모습이 굉장히 탐스럽게 보이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줄곧 견제용으로 사용되었던 쇠침을 비롯해 여태껏 아껴놓았던 비도들이 디아나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흥분해서 마구잡이로 던지는 것 같았지만 여태껏 봐온 게 있었기에   있었다.

디아나가 몸을 움직여 피할 걸 대비해 저마다 절묘하기 그지없는 텀을 둔채 던져진 거라는 걸 말이다.


심지어 개중에 몇 개는 디아나가 도망칠지도 모르는 방향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어느 타이밍에 움직이든, 어디로 몸을 움직이든 간에 적어도 하나는 맞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었고, 그에 이건 피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수많은 암기들을 상대로 디아나는 상당히 골 때리는 대응을 보여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날아드는 것들을 다 맞아주기라도  것처럼 가만히 서 있던 디아나가 어느 순간 눈을 부릅뜨며 허공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 손놀림이 어찌나 재빠른지 숙련된 소매치기도  수 접어줄 기세였다.

그렇게 휘둘러진 손이 마침내 멈춰섰을 때 그곳에는 디아나의 어깨부근을 노리고 날아들던 쇠침이 잡혀있었다.


'미친..'

동체시력이 좋다는 사실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저걸 잡아버릴 줄이야.


그야말로 기예라는 말로도 부족한 행위였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련을 지켜보다가 디아나의 손에 잡혀있는 쇠침의 모습을 확인한 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구경꾼들만큼이나 놀란 이가 있다면 다름아닌 앨리스였다.

피했으면 피했지 설마 잡아버릴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모양이다.


무슨 미친 년이라도 바라보는 것처럼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뜬채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는  보면.


그 상태로 굳어있던 것도 잠시, 이러다가 견제 수단 하나를 잃어버리겠다 싶었는지 정신을 차린 앨리스가 디아나의 손에 잡혀버린 걸 회수하기 위해 그것과 연결된 아대를 차고 있던 손을 뒤로 홱 잡아당겼다.

그렇게하면 손아귀 안에서 빠져나올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모양인데..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디아나의 대응이 한 발 더 빨랐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을 뿐.

어떻게 잡은 건데 이대로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듯 디아나가 쇠침을 움켜쥔 손을 빙빙 돌려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움직임에 힘입어 쇠침과 연결되어 있던 얇은 실이 그녀의 손 위로 휘감겼다.


'저거  아플텐데..'

그보다는 여태껏 당하기만 했던  갚아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앨리스가 되찾아 가지 못하도록 쇠침을 제 손에다가 단단히 고정시킨 디아나가 그 다음으로 보인 행동은 줄행랑이었다.


뒤늦게 날아드는 것들을 손에 든 목검으로 하나하나 걷어내며 그녀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움직임에 힘입어 그녀와 앨리스 사이로 늘어진 투명한 실의 길이가 점점 늘어났다.


과연 어디까지 늘어나는지 한 번 확인해보겠다는 것처럼 디아나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기만 하니 오히려 다급해진 쪽은 앨리스였다.

교류전 때 사용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 디아나의 행동으로 인해 고장이라도 나진 않을지 걱정이 됐던 걸까.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디아나를 노려보고 있던 앨리스가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그대로 추적에 나섰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꼭 '대련인데 이렇게까지 해야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이 정도면 한  정도는 져줄 법도 한데 기를 쓰고 이겨먹으려고 드니 살짝 분하기라도 했던 모양.


그렇게 시작된 앨리스의 추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녀가 쫓으려고 하기 무섭게 디아나가 역으로 달려들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앞으로 쑤욱하고 내밀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앨리스의 추적을 봉쇄한 디아나가 마침내 대련장의 끝에 닿았고, 끝을 모르고 늘어나던 실이 뭔가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덜컥하고 팽팽하게 당겨진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 순간 디아나의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은 뭐랄까..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입질을 느낀 낚시꾼을 생각나게 했다.


'걸렸다!  놈!'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표정과 함께 쇠침을 낚아챈 후로 줄곧 뒤로 물러나기만 했던 디아나가 태세를 전환했다.

더이상 물러나지 않고 다시 앨리스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것.


물론, 평범하게 그냥 나아가진 않았다.


낚싯대 릴이라도 감는 것마냥 쇠침을 움켜쥔 손을 빙빙 돌려가며 앨리스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앨리스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때부터 디아나의 접근을 저지할 수 있을만한 수단이 죄다 동원되기 시작한 것.

그렇지만 끝끝내 디아나와 연결된 실만큼은 끊어내질 못했다.


실전이었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끊어냈을테지만 대련이니만큼 그렇게까지  생각은 없었던 모양.

그리고 그게 결정적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가까워졌다 싶었는지 디아나가 앨리스와 연결되어있는 팔을 뒤로 잡아당기기 시작한 것.

그런다고 앨리스가 끌려오기나 할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가능하더라.


지이익-

"이익..!"

앨리스는 나름대로 버텨보겠다고 악을 쓰는  같은데 그럼에도 신발을 질질 끌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차츰 디아나와 가까워졌다.

'아니,  놈의 힘이..'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고 있자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앨리스가 뽑을 생각이 없어보였던 허릿춤의 단검을 뽑아 역수로 움켜쥐었다.


그렇게 둘 사이의 거리가 차츰 좁혀지던 가운데..


"그만-"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가 둘 사이를 잇고 있던 실만큼이나 팽팽하게 당겨져있던 긴장감을 거침없이 끊어냈다.

"그쯤하지."

어느새 클레어는 디아나와 앨리스 사이에  있었다.

주인공 놈쪽을 살핀다고 잠깐 그곳에서 눈을 떼긴 했었는데 대체 언제 저기까지  걸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분명 연무장 벽에 기대어 서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아무튼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둘 사이로 끼어든 클레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따악-!

디아나에게 꿀밤을 먹이는 것이었다.

경쾌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연무장 안으로 울려퍼짐과 동시에 디아나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악!'하고  이마가 다 아파지는 비명은 덤이었다.

이윽고 뒤로 넘어갔던 디아나의 고개가 제자리로 복귀한 순간, 그런 디아나를 향해 쏟아진 것은 작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핀잔이었다.


"아주 그냥 손을 작살내지 그러니?"


그리 말하면서 꽈악하고 쥐어져있던 디아나의 손을 강제로 풀어버린 클레어가 칭칭 감겨있던 실들을 일일히 풀어냈다.

그렇게 디아나의 손을 감싸고 있던 실이 한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드러난 것은 파고든 실 때문에 너덜너덜하게 변해버린 디아나의 손바닥이었다.


"어이구야. 아주 걸레가 됐네. 걸레가 됐어."


험하게 쓴 걸레도 이보다는 나을 거라고 다시 한 번 디아나에게 핀잔을 먹인 클레어가 입술을 삐죽하고 내밀고 있던 디아나의 등을 툭 떠밀었다. 클레어로부터 미리 언질이라도 받았던 것인지 그곳에는 붕대와 연고를 손에 든 카트린느가 대기하고 있어싿.


그런 식으로 부상자를 의료진 쪽으로 보내버린 클레어가 앨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바쁘더니만 오늘은 지켜보는 눈이 많아 차마 그럴 순 없었던 걸까.

"결과는 무승부로 해야할 것 같은데 불만이라도?"


어쩌면 반항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앨리스는 순순히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리를 떠나기 직전에 아대를 찬 손을 한 번 거칠게 휘둘러 불어터진 면발마냥 흐물흐물하게 늘어져있던 실과 쇠침을 회수한 앨리스가 그대로 연무대 밑으로 내려가고, 그제서야 클레어의 시선이 나와 주인공 놈쪽으로 돌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