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98)화 (197/366)



〈 19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대로 넘어지는 줄 알았다.

그만큼 시야가 급격하게 기울어졌었으니까.

해서 머지않아 뒤통수를 통해 닥쳐올 고통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하고는 다르게 안 넘어지더라.


나를 대신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른 것은 옆에 놓여져있던, 원래는 바이올라의 것이었던 의자였다.


갑작스럽게 움직인 바이올렛의 몸에 치이기라도 한 걸까.


한가롭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겨를 따위는 없었다.


당장 넘어지는 꼴만 면했을 뿐이지 언제든지 그런 꼴을 겪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변치 않았으니까.


이렇게 뒤로 자빠지다가 말고 멈춰있으니  마치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났다.


어느새 몸을 휘감은 그 느낌을 만끽하면서 내게 그런 느낌을 선사해준 장본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랬다.


 뒤로 밀어서 넘어뜨린 것도, 그 탓에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가던  중간에 잡아서 멈춰세운 것도 다름아닌 바이올렛이었다.

원래 몸보다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이 몸도 어느 정도 무게가 나가는 건 사실이었다. 아니, 단순히 어느 정도 수준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좀 더 나가는 편이었다. 뼈가 통뼈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거기에 대부분이 쇠로 되어있는 의자의 무게까지 합친다면?


분명 적지 않은 무게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렛은 근육이라고는 조금도 붙어있지 않은 가냘프기 그지없는 팔로  무게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탱하고 있었다.


사람이 흥분 상태에 빠지게 되면 평소  수 있는 것보다 몇 배는 되는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더니만 지금 바이올렛이 그런 상태인 걸까.

아까 전부터 날 내려다보고 있던 눈동자 속에서 초점이라는 것이 사라져버린 모습이 그렇게 오싹할 수가 없었다.


"그.. 황녀님..?"

해서 당황한 척 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바이올렛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완전히 연기라고는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 당황한 상태긴 했으니까.

아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당황하지 않았을까?

저렇게 초점없는 눈을 한채 얼굴을 뚫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어떻게 당황을  하겠냐고.

아까 전부터 몸을 감싸고 있는 공중에 붕 뜬 것같은 느낌이 거기에 한 스푼을  보태고 있었다.

아무리 발을 움직여봐도 땅에 닿지를 않으니 거기서 오는 불안함같은 게 있달까. 중심이 오롯이 뒤쪽에 몰려있어서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느낌에서 오는 불안함도 거기에 한몫 보태고 있었고.


이건 몸이 제멋대로 쥐어짜내는 것이라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뭔가를 할 생각이라면 빨리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심장이 자기맘대로 술렁대는 것이 그리 기분 좋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내 내심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바이올렛은 예의 그 초점없는 눈으로 가만히 날 내려다보기 바빴다. 물론, 완전히 가만히는 아니었다. 다 멈춰있는 가운데 코만큼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본격적으로 맛을 보기에 앞서 냄새부터 즐길 생각인 걸까.

내 냄새를 맡은 바이올라가 헤으응거리며 사족을  썼을 때부터 다른 이들에 비해 몇 백배나 민감한 후각을 가진 그녀들에게  냄새가 위력적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그런 바이올렛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갔지만..

'이러다가 동생이 오면 어쩌려고..'

한편으로는 그런 걱정이 들기도 했다.

아니, 생각해보니 단순히 바이올라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시녀들또한 문제가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내게 보이기가 좀 그렇다고 판단해서 자의적으로 누락시켰던 것을 다시 챙겨오기 위해 온실을 빠져나간 바이올라의 뒤를 따라서 시녀들 중 상당수가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남은 이들의 숫자가 꽤 됐다.

그 말은 즉, 그렇게 자리에 남는  택한 시녀들이 지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소린데..


생각이 그곳에 미친 즉시 고개를 길게 빼서 시녀들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지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려고 하기 무섭게 뒤로 기우뚱하고 기울어져 있던 의자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물론, 그것을 흔들어댄 장본인은 다름아닌 바이올렛이었다.

내가 자기 말고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고개를 돌리려다가 말고 멈칫한 상태로 굳어있던 것도 잠시, 다시금 바이올렛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눈으로 들어온 것은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왜 다른 곳을 보는 거죠? 혹시 바이올라라도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갑자기 그 소리가  나오나 싶어서 침묵하고 있었더니 그런 내 침묵을 바이올렛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그녀가 이내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꼭 마치 날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둘이  정도로 친해졌을 줄은 몰랐네요."


"..."


"그런데 어쩌죠? 당장은 오기 힘들텐데."


아무래도 바이올라를 상대로 무슨 수작질을 부려놓았나 보다. 저렇게 말하는  보면.

'어쩐지..'

시녀들이 과할 정도로 우르르 따라나서는 느낌이더라니.

살짝이지만 의문이었던 부분이 해소됨을 느끼면서 가만히 바이올렛을 올려다보았다. 살짝이지만 눈에 힘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바이올렛이 내 눈빛에 위압을 당하거나 그럴 거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리 했던  어필을 위해서였다.


맹수의  갈래에 속하는 늑대의 형질을 타고 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바이올렛은 순순한 것보다는 살짝 튕겨주는 편을 더 선호하는 듯 했으니까.


그래서 그리했던 것이었는데 내 몸에서 풍겨져나오는 페로몬 때문인지는 몰라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좋았다.

그리 행동한 순간 여전히 초점이 사라진 눈을 한채 날 내려다보고 있던 바이올렛이 몸을 부르르 떨어댔으니까.


흡사 진하게 감격이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런 식으로 슬며시 몸을 떨던 것도 잠시, 고양된 무언가를 진정시켜보려는  작게 숨을 몰아쉬던 바이올렛이 살짝 탈선했던 이야기의 방향을 다시 본론 쪽으로 틀었다.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요."

"..."


"이대로 왕국에 남아서 왕국을 위해 봉사한다고 한들 왕국의 인간들이 당신의 노고를 알아주기나 할 것 같나요?"

바이올렛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말은 훌륭하다는 생각이 절로  정도로 완벽하게 정곡을 꿰뚫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랬으니까. 모였다 하면 나랏님도 거침없이 까내리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거기에  잘되는 꼴을 못보는 것도 인간이고.


그런 인간들에게 있어 나만큼 까내리기 딱 좋은 존재도 또 없을 것이다.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것치고는 신분이 고작 평민따리에 불과해서 가루가 되도록 까내려도 부담이 별로 없을테니 말이다.


거기에 씹기에  좋은 구설수도 몇 개 있으니 그야말로 씹기 좋은 껌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바이올렛은 그것에 대해 말하며 은연 중에 자신이 권한 부마 자리가 가진 장점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면?

황녀의 반려가 되는 것이니만큼 황실 소속이 된다.


가진  재능이 암만 뛰어나도 일단은 평민에 불과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신분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뒷담을  놈들은 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대놓고 수군대는 광경은 완전히 사라질테지. 황실에 몸 담게  날 대놓고 깐다는 건 황실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홰까닥 돌아버린게 아니고서야 그 따위 행동을 할 위인은 없을 터.

아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게 내가 아니라  세계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남성이었다면 어땠을까.

바이올렛의 말을 들은 즉시 그렇게만 되더라도 어딘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틈만나면 수군대기 바쁜 인간들 때문에 알게 모르게 받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 했을테니 말이다.

바이올렛의 말을 듣고 살짝 흔들린  같은 모습을 내보였던  그 때문이었다.


바이올렛으로 하여금 보란듯이 입술을 꾸욱하고 짓씹으면서 눈을 질끈하고 감아보였더니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짝 들이밀어져있던 그녀의 얼굴이 살짝이지만 뒤로 물러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면 더 흔들기 위해서라도 기다렸다는 듯이 밀고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아까 내가 보여주었던 완강하기 그지없었던 태도를 고려해 당장은 그것이 한풀 꺾인 걸로 만족할 생각인 걸까.


'하긴..'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으니까.


바이올렛 입장에서도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래서 당장은 이걸로 끝인 걸까.

금방이라도 덮칠 것처럼 달려들어올 때는 언제고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줄이야.


살짝이지만 아쉬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였을 것이다.

이제 더는 눈을 감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힘을  준채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떠보았다.

그러자 가장 먼저 눈으로 파고들어온 것은 아까보다 확실히 뒤로 물러난채 날 향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바이올렛의 모습이었다.

지금쯤 아까보다 이성이 훨씬  흐릿해진 상태일텐데 그런 상태에서 대체 어떻게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걸까. 꼭 여우한테 홀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앞에 앉아있는 건 여우가 아니라 늑대인데 말이다.

아무튼 그런 느낌 때문에 나도 모르게 살짝 멍을 때리고 있자니..

"말로만 해서는 역시 믿기 힘들겠죠."


얼굴 위로 띄워올리고 있던 미소를 굳이 지우지 않은 채 바이올렛이 그렇게 말했다.


자기도 말로만 끝낼 생각은 없었다는 것처럼.

또 뭘 하려는 걸까.


내심 궁금함을 느끼고 있으니 바이올렛의 입에서 뜬금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와 바이올라가 적을 두고 있는 보통 랑인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종족의 생태에 관한 것이었다.


"알고 있나요? 우리 랑인족은 일생동안  한 명의 반려만을 두고 살죠."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게 있었다.

언제 들은 건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동물들 중에서 철저하게 일부일처를 지키며 살아가는 종중에 하나가 바로 늑대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했으니까.

딱봐도 늑대의 형질을 물려받은 게 분명한 바이올렛의 종족이 평생   명의 반려만을 둔채 살아가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는 걸까.

그런 시덥잖은 추측을 이어나가고 있자니 바이올렛의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그 평생의 반려를 맞이할 때에는.."

특별히 하는 행동이 있단다.


그 말을 듣고  특별한 행동이라는 게 뭘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귓가로 울려퍼지던 바이올렛의 목소리 뚝 멎더니 날 향하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착 가늘어졌다.

"이건 선금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그러더니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다시금 날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뒤로 물러났던 그녀의 얼굴이 내쪽을 향해 들이밀어지기 시작했다.

저항?


  있을 리 없었다.


한다고 해도 통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순순히 당하기도 좀 그랬기에 갑작스런 그녀의 접근에 당황해서 굳어버린 것처럼 몸을 경직시키고 있으니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내쪽으로 얼굴을 들이민 바이올렛이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뭔가가 벌어지는 것같은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바이올렛 정도 되는 미녀의 품 안에 갇히다시피 한 상태로 듣는 그 소리는 아찔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 몸이 제멋대로 흠칫거렸다.

그게 바이올렛의 눈에는 다른 식으로 비춰졌던 모양이다.

내가 겁을 먹어서 그런 거라고 본 것일까.


"쉬이-"

아까보다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된 것이 귓가로 울려퍼지더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아프진 않을테니."

날 다독이기 위해 내뱉어진 것 같은 말이 그 뒤로 따라붙었다.


아프진 않을 거라니.


바이올렛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속에서 곱씹고 있던 순간, 어깨와 목덜미의 경계선이라   있는 곳을 보드랍고 말캉하면서 따뜻한 것이 꾸욱하고 짓누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랬다.

바이올렛은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이게 그녀가 말했던 특별한 행동인 걸까.


그런 것치고는 단순한 입맞춤인데 말이다.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바이올렛의 입술과 맞닿아있던 목덜미 쪽에서 따끔따끔한 감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톱니를 생각나게 하는 뾰족뾰족한 것이 목덜미 부근의 살을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바이올렛은 이빨로 추정되는 것을 이용해 내 목덜미를 잘근거렸다.


그렇게해서 그곳에 제 이빨 자국을 새기고 말겠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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