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역시..'
그럼 그렇지.
다른 무언가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
간단하다.
바이올라가 가져다 준 서류에 적혀있는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가공법'에 비하면 그때 카트린느가 행하고 있던 공정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복잡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서류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게스메리움의 일반적인 가공 방법은 빻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곱게 빻아서 환부에다가 찰싹 붙이는 식이랄까. 왜 지혈제로 널리 쓰이는지 알 것 같을 정도로 간단하기 그지없는 사용법이었다.
그렇게 간단하기 그지없는 사용법에 비해 당시 카트린느가 행하고 있던 공정은 어땠던가?
빻기만해도 충분한 것을 굉장히 비싸보이는 장치까지 동원하가면서 성분을 추출하고 있지 않았던가.
지혈제로 쓸 거였다면 굳이 그런 식으로 복잡한 공정을 거칠 이유 자체가 없었다. 빻아서 써도 충분한 것에 공을 들여봐야 헛수고만 될 뿐이니까.
그렇다는 건?
'다른 용도로 쓰일 예정이라는 거지.'
분명 그럴 거다.
암 그렇고 말고.
한편으로는 살짝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름아닌 바이올라의 반응 때문이었다. 제멋대로 누락시킨 그 한 장에 대체 어떤 내용이 적혀있길래 저렇게까지 당혹스러워하나 싶었으니까.
그게 궁금해서라도 더 확인해보고 싶어 당혹스러워하는 바이올라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요구를 철회하고 있지 않으니 그런 내 시선을 견디기가 퍽 힘이 들었는지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으..'하고 앓는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런 식으로 당혹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결국 바이올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쪽을 택했다.
계속 이렇게 안절부절 못 하고 있으니 차라리 빨리 가져다주고 끝내자고 생각한 모양.
"다, 다녀오마."
날 향해 양해를 구하듯 그리 말하고는 쪼르르 온실을 빠져나가는 바이올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손에 들린 서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돌아오기 전까지 한 번 더 훑어볼 생각으로 그리했던 것인데..
"그게 뭐죠?"
여태껏 시선 외에는 잠자코 있던 바이올렛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 타이밍이 어찌나 절묘한지 누가보면 이 순간만이 도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덕분에 살짝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게 바이올렛의 물음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서 그녀의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대체 언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일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하더라도 멀찌감치 떨어져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바이올렛은 어느새 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굉장히 묘한 향기가 후욱하고 끼쳐왔다.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 같은 그런 향기라고 해야할까. 체향같지는 않았다. 체향이라고 하기에는 살짝 인공적인 느낌이 났으니까.
자연스럽게 코밑을 맴돌기 시작한 향기도 그렇고, 순식간에 좁혀져버린 거리도 그렇고 당황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나도 모르게 얼을 타고 있으니 더욱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생각따윈 없다는 듯 더욱 더 거리를 좁혀 내 바로 옆까지 접근한 바이올렛이 나와 서류 사이로 제 얼굴을 불쑥 들이밀어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격의없는 행동이었고, 그렇기에 당황스러웠다.
거기에 당황을 한 스푼 더 얹은 것은 두어뼘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까 전보다 훨씬 더 강렬해진 특유의 달콤한 향기였다.
제국에서 유행하는 이성을 꼬실 때 뿌리는 향수같은 거라도 되는 걸까.
달콤한 느낌이 부쩍 강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몽롱해지는 느낌또한 더욱 강렬해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기 위해 코로 숨쉬는 걸 멈추고 티나지 않게 입으로 숨을 들이키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흐으음.. 게스메리움?"
내 반응이 어떻든 간에 자신은 신경쓰지 않는다고 주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줄곧 내 손에 들린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바이올렛의 입에서 의문성이 새어나왔다. 물론, 그 목표는 나였다.
어떻게 된 것인지 해명을 요구하는 것같은 그 발언에 잠시 숨을 멈췄다가 그대로 입을 열어 사정을 밝혔다.
저번에 네가 갑자기 온실을 떠나고 난 후에 대화를 주고받다보니 이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어쩌다보니 네 동생이 알아봐주기로 했다.
그런 이야기를 죽 늘어놓으니 바이올렛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짝 들이밀고 있던 몸을 뒤로 물렸다.
그와 함께 마음 속에 찾아든 것은 아쉬움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 속으로 치켜든 감정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아쉽다니 이게 무슨..
불쾌한 마음에 찌푸려지려 하는 미간을 최선을 다해 억누르고 있으니 어디선가 피식하고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이 돌아오기 전까지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그 뒤로 이어진 말은 그랬다.
이야기라.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혹시 아까 전부터 의심어린 눈초리로 날 바라보고 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직 제멋대로 머릿속을 점령한 몽롱함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라 이걸 받아야할지 아니면 거절해야할지 쉬이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해서 침묵하고 있으니..
"제안할 게 있거든요."
바이올렛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 네게 있어서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날 안심이라도 시키려는 것 같은 그런 미소였다.
고개를 끄덕였던 건 그것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지 들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다 싶었으니까.
그러면서도 내심 날 제국 측으로 회유하려는 제안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나름대로 조사를 좀 해봤어요."
어째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리 말하면서 날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 나름대로 해봤다던 조사가 누구에 관한 조사였는지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분명 나에 대해 조사한 것이겠지.
문제는 그렇게해서 어디까지 알아냈냐는 것인데..
지레짐작했다간 피보기 딱 좋았기에 잠자코 침묵하고 있으니 그런 내 행동을 바이올렛은 조금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기분 나쁘더라도 이해해주길 바래요. 이쪽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거니까."
황녀쯤 되는 직위에 있는 이와 어울리는 것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이올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오해를 해준다면 나로서는 나쁠 게 없었기에 나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표정만큼은 풀지 않았다.
"이해했다니 다행이네요. 아무튼 그쪽에 대해서 좀 알아봤는데.."
과연 무슨 말을 할 생각인 걸까.
눈치를 보니 내가 겪은 일이나 나에 관한 추문을 접한 것 같은데 말이다.
혹시 너는 내 동생과 어울리지 않으니 이쯤에서 네가 알아서 끊어내라는 말을 할 생각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대우를 받고 있더군요."
이어진 바이올렛의 발언은 내 예상을 살짝 벗어나있었다.
표정또한 마찬가지였다.
흘깃하고 바이올렛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눈으로 들어온 것은 어처구니 없다는 감정과 분노보다는 분개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감정에 덮여있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겪은 일들이 꼭 마치 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처구니 없어하고 화를 내고 있었다.
덕분에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 건네려던 제안의 정체를 말이다.
그런 내 추측은 이어진 바이올렛의 발언 덕분에 확신이 되었다.
"제국으로 오세요."
엄숙한 어조로 내뱉어진 짧고 강렬한 한 마디가 그대로 귀를 꿰뚫었다.
"그곳은 당신하고 맞지 않아요."
그 말 뒤로 이어진 건 날 설득하기 위한 말들이었다.
뭣하러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왕국에 붙어있으려고 하느냐.
제국으로 와라. 제국은 왕국 놈들처럼 널 멸시하지도 남자라고 차별하지도 않을 것이다.
솔직히 힘들지 않으냐.
너라는 사람에 대해 모르는 제국에서라면 지금처럼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 때문에 고통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능력대로 대우해주겠다.
지금 이 순간을 꽤나 공들여서 준비한 것인지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게 내가 아니고 다른 놈이었다면 홀라당 넘어가고도 남았을 법한 주옥같은 말들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렇기에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이게 지금..'
뭐하자는 걸까?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것이 바로 조금 전인데 말이다.
이제는 이렇게 날 성심성의껏 자기들 쪽으로 꼬시려고 든다고?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동생이 좋아하고, 자기도 관심이 가니 일단 제국에다가 들여앉혀놓고 그 다음에 의심스럽게 느껴지는 점을 검증해보겠다는 걸까. 겸사겸사 날 이용해 교류전에서 확실한 우위도 가져가고?
'하긴..'
꼴랑 네 명이, 그것도 차례대로 출전하는 경기에서 한 명을 포섭하게 되면 내부자만 알 수 있는 정보부터 시작해서 그로인한 이득이 적지 않을테니 말이다.
어쩌면 진실로 원하는 건 그것일지도 모르지.
제안만 놓고 본다면 확실히 혹할만한 제안이긴 했다.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그렇지.
문제는 이걸 어떻게 거절하냐는 것인데..
잠시 고민하다가 아까 전부터 굳히고 있던 얼굴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렇게 모기 주둥이조차 박히지 않을 정도로 얼굴을 딱딱하게 만든 다음에 바이올렛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런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굉장히 분노한 사람처럼 행동해봤다. 그렇게 하면 분명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헌데 예상과는 다르게 바이올렛은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왜요? 믿기 힘든가요?"
내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신뢰의 문제 때문이라 판단한 듯 바이올렛이 상당히 도발적인 어투로 그리 물어왔다.
그리 말하는 바이올렛의 눈빛을 확인한 순간 깨달았다.
상대방의 향기에 영향을 받은 쪽은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날 향해 내려꽂히는 바이올렛의 눈빛에서 평소의 절제된 것같은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높이 떠오른 보름달을 맞이한 늑대마냥 흉포하기 짝이 없는 느낌이 같은 색의 보색을 닮은 호박빛 눈동자 속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렬한지 바이올라가 보여주던 야성미같은 건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평소에 그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있는 힘껏 억누르며 지내는만큼 한 번 터져나오기 시작하니 겉잡을 수 없게 변해버린 걸까.
'화 안 내는 사람이 화내면 무섭다더니..'
지금 바이올렛의 모습이 딱 그랬다.
스스로를 단속할 수 있을만한 이성?
그녀의 모습에서 그런 것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이성이 남아있었다면 저렇게 끊임없이 내 체취에 섞여있는 뭔가를 탐내는 것처럼 탐욕적으로 숨을 들이키고 있지도 않았겠지.
그랬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이올렛은 열심히 제 콧망울을 움찔대며 주변에 흐르고 있는 것을 있는 힘껏 들이키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일렁거림이 하도 심해서 소용돌이가 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성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은 강렬하기 그지없는 그것에 휘말려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아집같은 것들이었다.
"믿지 못하더라도 이해해요. 당연히 그럴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차분하다는 것이 굉장히 묘한 느낌을 선사해주었다.
바이올렛의 말에 가타부타 대꾸를 하지 못했던 건 바로 그 기묘한 느낌 때문이었다.
어느새 몸을 휘감은 그 느낌을 어떻게든 떨쳐내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이제는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바이올렛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오롯이 제 할 말만 해대는 것이 꼭 뭔가에 거나하게 취한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부마 자리를 약속하죠."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대체 어떤 흐름을 거치면 거기까지 다다를 수 있을지 짐작조차 되질 않는 내용의 제안이었다.
부마라고 하면 공주나 황녀의 배필을 말하는 걸텐데 뭐 바이올라의 남편 자리라도 보증해주겠다는 뜻일까.
"원한다면 내가 그 사실을 약조했다는 증표도 넘겨줄 수 있어요."
증표라.
말만 들어보면 친필로 쓴 계약서에다가 황녀를 상징하는 인장까지 손수 찍어주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래서 물었다.
"이미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그 말을 한 것이 바로 조금 전의 일인데 굳이 왜 이렇게까지 하려는 것이냐.
그리 물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갖고 싶으니까."
진심이 듬뿍 담긴 목소리와 함께 의자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기우뚱하고 시야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뭔가에 밀려서 넘어지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