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야말로 폭풍같은 퇴장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요.."
그래서 그런 소리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저런 걸 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냥 넘어가는 건 이상하니 말이다.
물론, 바이올라가 보여준 반응또한 내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글쎄.."
바이올라는 꽤나 당황한 사람처럼 제 언니가 나간 방향을 연신 힐끔거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방금과 같은 바이올렛의 모습을 보는 건 바이올라도 처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식으로 바이올라의 얼굴 위를 차지하고 있던 당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감정으로 변질되었다.
안절부절 못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딱 보니까 언니가 저렇게까지 당황해서 서두를 정도의 일이라면 자신도 따라나서야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따라나서자니 아쉬웠을 것이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바이올라를 상대로 왜 그러냐고 물은 뒤 적당한 말로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던 바이올라를 달래주었다.
"그만큼 급한 일이었다면 어련히 부르셨겠죠."
헌데 그러질 않았으니 급한 볼일이라 하더라도 개인적인 것일게 분명하다는 식으로 말을 하니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듣고보니 제법 일리가 있었는지 잠시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바이올라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으니까.
그리고 정확히 그 다음부터였다. 바이올라의 표정이 한결 편안하게 변했던 건.
"역시 그렇지?"
"그럼요."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바이올라를 자리에 눌러앉힌 이유는 간단했다.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던 바이올렛이 자리를 비운 지금은 바이올라 뿐만이 아니라 내게도 기회였으니까.
적어도 뭔가 말을 꺼낼 때 바이올렛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이 그러했다.
눈치 볼 사람이 사라지니 한결 편해진 건 바이올라또한 마찬가지였다. 거의 티를 내지 않았던 나하고는 다르게 그동안 나름대로 언니의 존재가 신경쓰인다는 티를 내긴 했던 바이올라지만 아무래도 내 눈에 비춰졌던 것보다 훨씬 더 언니의 존재를 신경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살짝이지만 경직된 것 같은 느낌이 싹 사라지더니 바이올라의 태도가 한결 편하게 변했다. 그렇다고 격의가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고, 말 그대로 또래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런 식으로 자리의 분위기가 가벼워지니 그동안은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 혹시 게스메리움이라고 아세요?"
같은 이야기 말이다.
물론,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것은 딱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어.. 글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바이올라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런 얼굴을 한채 바이올라가 자연스럽게 반문을 해왔다.
"그게 뭔데?"
"느낌상 약초같던데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약초?"
고개를 옆으로 까딱해보이는 바이올라의 얼굴 위에는 어느새 진득한 호기심이 내려앉아있었다.
"네, 누가 혹시 아냐고 물어보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건 잘 모르니까.."
혹시 알까 싶어서 물어봤다는 식으로 말을 하니 바이올라의 얼굴 위에 맺혀있던 호기심이 한층 더 짙게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내 말을 듣고 나니 누구한테 그런 질문을 받은 건지 궁금해진 모양.
"흠, 그래?"
그렇지만 바이올라는 그런 의문을 섣불리 꺼내들지 않았다.
"정 궁금하면 내가 한 번 알아봐줄까?"
대신 에둘러 그렇게 제안해올 뿐이었다.
내게는 그게 살짝 의외였다. 첫인상대로라면 그런 것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누구한테 그런 질문을 들었냐고 곧장 물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어찌보면 민감한 주제일수도 있는 만큼 아무리 그녀라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겁이 났던 걸지도 모르겠다.
만에 하나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내 입에서 여자친구나 약혼자 따위의 단어가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호시탐탐 내 옆자리를 꿰찰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바이올라 입장에서는 그것만큼 최악이 또 없을테니까.
아무튼 바이올라가 던져온 제안은 안 그래도 가려웠던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식의 제안이었기에 나로서는 사양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해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럼 그 건에 대해서는 자신만 믿고 있으라는 듯 가슴을 살짝 펴고 그것을 팡팡 두들기던 바이올라가 은근슬쩍 질문 하나를 덧붙였다.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차마 궁금증을 억누를 수가 없었던 모양.
"그런데 대체 누가.."
그런 질문을 한 거냐면서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물어오는 바이올라의 행동에 아주 잠깐동안 고민했다.
바이올라의 경쟁심을 부추기기 위해 은근슬쩍 내 옆에 누군가 있다는 걸 어필해볼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세계 여자들의 경쟁심과 독점욕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 정도는 이미 확인한지 오래였으니까. 굳이 그런 꼴을 두 번이나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뭣보다..'
상대가 바이올라라서 좀 그랬다.
자신을 억누르는 성향이 좀 있는 바이올렛이 상대였다면 억누르는 걸 폭발시키기 위한 기폭제 용도로다가 한 번 써볼만도 했겠지만 바이올라니까.
기본적으로 브레이크라는 것이 없어보이는 바이올라인데 거기다 대고 꼴받게 하는 날에는..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진짜배기 납치를 당하게 될 지도 모르지.
게다가 굳이 내 입으로 자극하지 않더라도 머지 않아 바이올렛이라는 바이올라 한정으로 원래보다 몇 배는 강력한 효과를 내는 자극제가 투입될 예정이니만큼 거기에 뭔가를 더 보탤 필요성또한 느끼지 못했고.
"아, 친구가 물어보더라구요."
해서 그리 답했다.
"친구? 남자?"
그러자 돌아온 건 아직 혹시하는 기색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 친구라는 게 놈일지 년일지 꼭 확인해보고 싶어하는 눈치같은 것이 날 향해 내려꽂히는 바이올라의 눈빛 속에 깃들어있었다.
"그럼요. 그럼 여자겠어요?"
게스메리움과 관련이 있는 건 다름아닌 주인공 놈이었기에 그건 어찌보면 사실이기도 했다. 덕분에 굳이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사실 그대로를 말하면 될 뿐이었으니까.
헌데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것이 좀 이상했다.
살짝 섭섭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것이 어느새 바이올라의 얼굴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왜..?'
나로서는 그 순간적인 변화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뭘 했다고 저런 표정인 걸까.
'설마..'
방금 내 발언을 여자하고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라도 한 건가?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저런 표정이 튀어나올 이유가 없으니까.
이건 필히 확인을 해봐야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던 바이올라가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질문 하나를 던져왔다.
"나하고 너는.. 친구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던져진 그 질문에는 참으로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개중에서 제일 도드라지는 것은 다름아닌 불안과 우려였다.
자신에게는 기껍기 그지없는 이 시간이 내게는 윗선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울려주며 보낼 수밖에 없는 시간은 아닐지 걱정이라도 됐던 걸까. 저렇게 묻고 나서 조마조마한 눈빛을 보내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맘같아서는 그렇다고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바이올라는 내게 긍정적인 대답을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의 관계가 '친구'라는 단어로 못박히게 되는 것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내가 이 시간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하면서도 '우리는 친구잖아.'라는 말은 듣기 싫어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쉬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역시 황녀님이라고 해야할까.
까다롭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뭐라고 답을 해야하나..'
뭐라고 답을 하면 복잡하기로 소문난 여심을 만족시킬 수가 있을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곧 깨달았다.
저걸 백퍼센트 만족시킬 수 있을만한 대답같은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글쎄요."
해서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려서 지어보인 미소와 함께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내 모습이 바이올라의 눈에 의미심장하게 비춰지기를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건 앞으로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리 말했더니 다행히 효과가 나쁘지 않았다.
내 말을 듣고 그걸 우리 사이가 단순히 아는 사이로 남게될지 아니면 친구 그 이상의 관계가 될지 네가 하기에 달려있다고 받아들인건지 조마조마한 느낌은 사라지고 대신 의욕이라는 것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 시작했으니까.
그 날의 만남은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그 날 부탁했던게 어떻게 되었는지는 다음 만남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자리에는 바이올렛이 함께했다.
다만 날 바라보는 눈빛이 전과는 살짝 달랐다. 내쪽을 힐끔대는 빈도또한 마찬가지였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바로 전의 만남까지만 하더라도 바이올렛은 나보다는 제 동생 위주로 시선을 주는 편이었다. 비율로 따지자면 바이올라가 8이고 내가 2정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나와 바이올라 중에 어느 쪽이 돌발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높은가를 따져보면 그건 단언컨대 바이올라일테니까.
그러니 당연히 동생 쪽으로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겠지.
까닥 잘못해서 동생이 눈이 홱 돌아가서 날 덮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외교적으로 그만한 참사가 또 없을테니 말이다.
분명 그랬던 것이 어느새 4대 6으로 변해있었다.
물론, 내쪽이 6이었다.
눈치채지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는 그 극명한 변화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바이올렛이 날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일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던 바이올렛의 시선이 탄산이 터질 때나 날법한 따끔따끔한 느낌을 선사해주었다.
그 기묘하기 짝이 없는 감각을 느끼면서 바이올라가 내민 것을 받아들었다.
바이올라가 날 향해 내민 건 다 합쳐서 세 장정도 되는 분량의 서류였다.
어디 한 번 확인해보라는 듯 내밀어진 그것을 받아드니 가장 먼저 눈으로 들어온 것은 서류의 맨 앞장에 보란듯이 붙어있는 약초 샘플이었다.
그때 카트린느의 방에서 봤던 것과 비교하면 살짝 마른 느낌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둘이 같은 물건이라는 걸 확인하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눈에 띄는 특징같은 게 모두 일치했으니까.
"그게 맞아?"
"네, 맞는 것 같아요."
확인차 던져진 바이올라의 물음에 답을 하며 샘플 밑에 적힌 내용에 시선을 주었다.
딱 봐도 빼곡하기 그지없는 것이 어디 백과사전같은 거라도 잘라다가 가져온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상세하다고 해야할까.
물론, 이쪽은 인쇄본이 아니라 필사본이었지만 말이다.
'고작 며칠만에..'
이 정도 퀄리티의 보고서라니.
대체 사람을 얼마나 쪼아댄 걸까.
이걸 작성한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고생했을게 눈에 훤히 보여서 아주 잠깐동안 그 누군지 모를 이를 대상으로 심심한 애도를 보내주었다.
그리고는 서류에 적혀있는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장에는 게스메리움이라는 식물 자체에 대한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그러니까 주로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다 자라는데까지 어느 정도 걸리는지 같은 정보들 말이다.
뭣하러 이런 것들까지 세세하게 적어놨나 싶긴 했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관련없어 보이는 것들이 생각치도 못하게 힌트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첫 장에 적힌 내용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다가 이내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내 입장에서는 별로 실속이 없었던 첫 번째 장과는 다르게 두 번째 장은 꽤나 본격적이었다.
게스메리움이라는 약초의 효능에 대해 말하고 있었으니까.
개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구는..
-주로 지혈제의 원료로 많이 사용됨.
바로 그것이었다.
그 외에도 게스메리움에 무슨무슨 성분이 있어서 지혈작용을 촉진시킨다는 식의 내용이 있긴 했지만 그건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혈제라..'
이미 내 신경은 오롯이 그쪽에 꽂혀있었으니까.
그럼 그때 카트린느의 방에서 봤던 그 광경은 지혈제를 만들고 있었던 걸까.
'그럴 리는 없겠지.'
그런 걸 만들고 있었다면 굳이 그런 식으로 숨기려고 들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지혈제 용도 말고 다른 용도가 존재한다는 건데..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 말고 알음알음 알려진 효능은 혹시 없나 싶어서 남은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았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장까지 넘겨서 확인해봤음에도 그랬다.
세 번째 장에 적힌 내용은 게스메리움이라는 풀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에 대한 것이 전부였으니까.
"혹시 이게 전부인가요?"
해서 혹시하는 마음에 그리 물었더니..
"아니, 한 장이 더 있긴 한데.."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건 어쩐지 살짝 난감해하는 듯한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