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꼭 잘 플레이팅된 요리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다채로운 감정들이 호박빛을 띄고 있는 접시 안에서 서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혹시 심하게 다친 건 아닐지 걱정하는 마음부터 시작해서 내 붕대 위에 보란듯이 제 흔적을 남겨놓은 누군지 모를 여성에 대한 질투심까지.
말 그대로 오만가지 감정이 다 스쳐지나간 탓에 내가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고작해야 그 두 개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수많은 감정들 중에서 그 두 개가 발하는 빛이 가장 또렷하고 짙었으니까.
순간적으로 울컥한 나머지 그만 힘조절을 깜빡해버린 모양이다.
내 팔을 낚아챈채 움켜쥐고 있던 바이올라의 손에 꾸욱하고 힘이 들어가는 걸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순간적으로 힘을 얼마나 준 것인지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건강해보이던 혈색을 띄고 있던 바이올라의 손등이 어느새 희게 변해있었다.
그와 함께 잡혀있는 팔쪽에서 올라온 욱씬거림에 반사적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랬더니 좀 정신이 들었던 모양이다.
평소의 야성미 넘치는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빛이 꺼진 등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던 바이올라의 눈동자 속으로 빛이 돌아오더니 이내 그녀의 입에서 '핫-'하고 정신을 차린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미, 미안하다..! 나, 나는 그냥 걱정이 돼서.."
허둥지둥 사과의 말을 건네며 꽈악 움켜쥐고 있던 손을 푼 바이올라의 얼굴은 이내 더 참담해졌다. 내 팔뚝 쪽에 보란듯이 새겨진 자신의 흔적을 확인한 것이 그 계기였다.
좀 심하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명하게 남긴 했어도 그래봐야 손자국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게 존재했냐는 듯 자연스럽게 사라질 터.
그 사실을 바이올라라고 해서 모르지 않을텐데 그녀는 연신 내 눈치를 봤다.
덕분에 기분이 굉장히 오묘해져버린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바이올라가 하는 행동만 보면 그녀가 내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라도 남긴 듯 했으니까.
'어쩌지 어쩌지'하는 느낌으로 안절부절 못하던 그녀의 기색이 뒤바뀐 것은 팔에 남은 손자국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내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바이올라의 눈에는 그 모습이 뭔가 야릇하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더니 바이올라의 시선이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한 손자국을 열심히 더듬어댔다. 처음에는 미안해서 죽으려고 하더니만 이제 곧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아쉽기라도 했던 걸까.
혹시라도 내가 눈치챌세랴 조심스럽게 그지없는 움직임으로 내 팔뚝 쪽을 더듬는 바이올라의 눈빛 속에는 약간이지만 아쉬움이 어려있었다.
그런 바이올라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 하며 두 번째 선물꾸러미를 꺼내들었다.
앞서 꺼내든 것도 모자라 내가 뭔가를 하나 더 꺼내드니 관심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었는지 팔뚝 쪽에 머물러있던 바이올라의 시선이 부스럭대는 소리를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던 내 손을 쫓아 움직였다.
그렇게 내 주머니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로 조금 전에 자신에게 건네진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포장된 꾸러미의 모습을 확인한 바이올라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뭔가 안 좋은 느낌같은 거라도 받은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군데군데가 살짝 구겨진 꾸러미를 곱게 펴서 주머니 안에 밀어넣기 전의 모습과 가장 유사한 형태로 되돌린 나는 오늘도 여전히 감시자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바이올렛을 향해 그것을 내밀었다.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둘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린 것은.
이쪽에 신경쓰지 않는 척, 들고 있는 책에 집중하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나와 바이올라 쪽을 힐끔대고 있던 바이올렛은 대뜸 자신의 앞으로 들이밀어진 것을 보고 굉장히 당혹스러워 했다.
꼭 마치 '왜 나한테?'라고 의아해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에 비해 바이올라의 반응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가 바이올렛을 향해 꾸러미를 내민 순간 바이올라는 당황하는 대신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덕분에 뒷쪽에서 뿌득하고 살벌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싸그리 무시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당황의 늪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는 바이올렛을 상대로 선물의 이유를 밝혔다.
"저번에 보니까 코쪽에 문제가 있으신 것 같으셔서.."
바이올라에게 줄 답례품을 준비하는 김에 겸사겸사 준비를 해봤다는 식으로 '너는 어디까지나 덤일 뿐이다.'라는 부분을 강조해서 내뱉으니 당황으로 물들어있던 바이올렛의 얼굴이 점차 누그러졌다. 그런 언니에 비해 바이올라의 반응은 여전했다. 아무래도 내가 저번에 했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모양.
"고, 고맙군."
선뜻 받기에는 동생의 눈치가 보이는 상황.
그렇다고 손님인 내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내가 내미는 걸 챙겨두라는 뜻으로 시녀를 향해 손짓을 해보이는 바이올렛의 얼굴에는 떨떠름한 기색이 묻어있었다.
이대로가면 기껏 챙겨온 것이 빛도 보지 못하고 책상 서랍 구석에 처박히게 될 것은 자명한 상황.
해서 살짝 억지를 써보기로 했다.
물론, 무리한 행동이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오늘로 벌써 세 번째 만나는 것인데 그동안 내가 참고 넘어가 준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바이올렛 입장에서는 내가 다소 억지를 쓰더라도 받아줄 수밖에 없겠지.
아니나 다를까 날 향해 뻗어오는 시녀의 손을 피하며 그러지 말고 한 번 여기서 피워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니 바이올렛은 '굳이?'라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이면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바이올렛의 손짓에 맞춰서 날 향해 다가오던 시녀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온실을 빠져나갔다가 돌아온 시녀의 손에는 물이 조금 담긴 오목한 접시가 들려있었다. 여기다가 초를 올리면 된다는 듯 그걸 그대로 내 앞으로 들이밀길래 꾸러미 안에 들어있던 것을 꺼내 그 안에다가 똑바로 세웠다.
비슷한 일을 여러번 해본 것처럼 초에 불을 붙이는 시녀의 솜씨는 굉장히 능숙했다. 그 와중에 꽤 재밌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길다란 종이같은 걸 꺼내들길래 저게 뭔가 싶었는데 시녀가 그것을 움켜쥔 손을 허공에 대고 거칠게 턴 순간 종이 끝으로 불꽃이 확 피어나더라.
저건 또 무슨 원리일까 신기해하고 있으니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이올라가 잽싸게 설명을 덧붙였다.
"저건 화접지라고 하는 물건인데.."
생긴 건 평범한 종이처럼 보여도 끝부분에 얇게 특수한 용액이 발라져있어서 방금처럼 손으로 잡고 거칠게 흔들면 저절로 불이 붙는단다.
"우리 제국의 특산물 중에 하나지."
"아하.. 신기하네요."
저런 게 왜 수출이 안 된 걸까. 굉장히 편리해보이는 것이 여기저기서 많이 찾을 것 같은데 말이다.
가만히 있기 좀 그래서 은근슬쩍 그러한 의문을 내비춰봤더니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나가던 바이올라가 애매한 얼굴을 한채 볼을 긁적거렸다.
"그게..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만들기가 굉장히 까다롭거든."
그래서 만드는 족족 제국 내에서 소비가 되어버리는 탓에 개인 차원에서 진행하는 소규모라면 모를까 본격적인 수출은 좀 힘들단다.
그 말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 타이밍을 쟀다.
이왕 대화의 주제가 특산품 쪽으로 흐른 김에 저번에 먹었던 그 푸르딩딩한 것에 대해 묻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아, 그러면 혹시 저번에 병문안 와주셨을때 선물해주셨던 그 파란 것도 특산품인가요?"
해서 그리 물으니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게 좀 이상했다.
"어, 그, 그렇지?"
묘하게 눈치를 본다고 해야할까.
내 눈치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바이올라는 내 눈치가 아닌 언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꼭 마치 몰래 저지른 짓을 들키지는 않을지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을 목도한 순간 감이 팍 왔다.
모르긴 몰라도 그 퍼런 것은 바이올라로서도 선뜻 내어주기 힘든 귀한 것이었다는 걸.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황녀들에게 분배된 비상약같은 거라도 되는 걸까.
그런 거라면야 그것이 생각치도 못했던 효과를 낸 것도 이해가 됐다. 황녀의 입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던만큼 필시 보통 물건은 아니었을테니까. 분명 귀하기로 손에 꼽히는 약재들로 만들어진 것이었을 터.
그리고 귀한 약재라는 건 대체적으로 그 성질이 굉장히 독한 법이다.
헌데 그런 것들이 내 안에서 서로 충돌한 거라면?
그래서 기존에 몸 안에 흐르고 있던 것이 틀어져버린 거라면?
카트린느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긴 것도 충분히 설명 가능했다.
아무튼 바이올라는 그 건에 관해서는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하는 눈치였다. 언제 언니한테 들킬지 몰라 전전긍긍해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그녀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멈춰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궁금증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귀한 걸 저한테.."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구체적인 언급은 피해주기로 했다. 파랗다거나 젤리마냥 물컹거린다거나 하는 말만 하지 않으면 내가 말하는 것이 뭔지 바이올렛으로서는 알 수 없을테니 말이다.
긴가민가한 느낌까지는 들 수 있어도 확신까지는 하지 못할테지.
해서 아까하고는 다르게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며 살짝 감동한 척을 하니 열심히 언니의 눈치를 보고 있는 와중에도 흡족한 건 흡족한 거였는지 바이올라가 코 밑을 슥 훑으며 멋쩍어하는 기색을 온몸으로 내뿜었다.
"아니 뭐.."
널 위해서라면 그게 뭐든 아깝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헌데 막상 말하려니 좀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바이올라의 얼굴 위로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하는 기색이 떠오르더니 그녀가 '으..'하고 살짝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치, 친구니까.."
아무래도 지금의 바이올라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던 모양이다. 간신히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은 바이올라가 이내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일단 급한대로 내뱉고 봤는데 뱉고보니 뭔가 좀 아닌 것 같았던 모양.
그리 생각한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는지 바이올렛이 앉아있는 쪽에서 작게나마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처럼 내게 제대로 어필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걸 고스란히 날려먹은 동생의 모습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안쓰럽기도 했던 걸까. 한숨에는 그러한 기색이 잔뜩 깔려있었다.
"친구.."
많이 아쉬워하길래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 있도록 바이올라가 입에 담았던 것들 중 하나를 내 입으로 옮겨 그대로 곱씹어주니 덩달아 축 처져있던 바이올라의 꼬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등 뒤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번에 나름 공을 들어 관리를 해줬더니만 그때부터 바이올라도 꼬리의 상태에 신경쓰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처음 봤을 때하고 비교하면 한결 풍성하고 탐스러워진 꼬리 쪽에 시선을 때려박고 있자니 그런 내 시선을 알아차린 바이올라가 두 볼을 발그레하니 물들이며 나로서는 쉬이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건네왔다.
"한 번 만져볼래?"
물론, 거절하지 않았다.
의자째로 일어나서 잽싸게 바이올라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니 그런 내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라도 했는지 피식하고 웃은 그녀가 살랑살랑 흔들리던 꼬리를 내쪽을 향해 내밀었다.
대체 어떤 관리를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바이올라의 꼬리에서는 꼬순내가 났다.
그것도 그냥 꼬순내가 아니라 한 번 맡으면 계속 맡고 싶어지는 그런 꼬순내라고 해야할까.
'어디서 맡아본 것도 같은데..'
아무튼 굉장히 중독적이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자꾸만 꼬리 쪽을 향해 기울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까지 하긴 좀 그랬기에 제멋대로 기울어지는 몸을 몇 번이고 바로잡고 있자니 그런 내 모습이 보기 안쓰럽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내 손이 닿은 이후로 쭉 잠잠하던 바이올라의 꼬리가 꿈틀하고 움직이며 살짝 앞으로 기울어져있던 내 얼굴을 찰싹하고 두들겼다.
그와 함께 코밑에서 아른거리던 특유의 꼬순내가 얼굴을 확 뒤덮어왔다.
순식간에 거기에 퐁당 빠져버린 날 그 안에서 끌어낸 것은 어느새 콧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향초 특유의 약초향이었다.
자연스레 콧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그 향기를 맡고 '드디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덜컥-!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는 요란하기 그지없는 소리와 함께 의자 위에 편히 몸을 뉘이고 있던 바이올렛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