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93)화 (192/366)



〈 19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참 오랜만이다.


이렇게  방 한 방 받아낼 때마다 '벅차다.'라는 느낌이 몸을 타고 훅훅 올라오는 건.

 방이 날아들 때마다 흘릴  있을만한 건덕지가 보이는 건 최대한 흘려냈지만 그럼에도 이미 충분한 데미지에 노출된 팔은 저릿저릿거리며 부하를 호소하고 있었다.  같아서는 대련이고 뭐고 항복을 외친 다음에 저릿저릿한 팔을 마음껏 주무르고 싶었다. 그러지 않은 건 꽤나 몰입한  같은 디아나의 모습 때문이었다.

밥을 먹다가도 성장하기도 하는 것이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들이라고는 하지만 설마  타이밍에 뭔가 건덕지를 잡아버릴 줄이야.


덕분에 발을 빼기가 굉장히 애매해졌다.


저렇게 몰입할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손으로 망치긴 좀 그랬다.

뭐, 그것도 슬슬 한계였지만 말이다.

파각-!


연습용으로 가져다가 놓은 거라 쳐도 살짝 허술해보이는 감이 없잖아 있어서 불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시 한  디아나의 공격을 받아낸 방패 쪽에서 지금껏 들려온 것하고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른 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맞부딪힌 부분에서 비산한 나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오르며 제법 위협적인 풍경을 그려냈다.

그것들 중 하나가 볼을 스치고 지나갔던 모양이다.


일순간 볼쪽에서 화끈한 느낌이 올라오더니 알싸한 통증이 그곳을 쿡쿡 찔러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볼쪽에서 뭔가가 주륵하고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엄습해왔다.


 순간 깨달았다.


피를 보기 전에 멈추기로 했던 약속은 이미 물 건너갔다는 것을.


 정도면 멈출 법도 하건만 디아나는 여전히 몰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내 방패와 충돌하고서 튕겨져나갔던 것이 다시   들어올려지고 있었다.

헌데 아까보다 저릿저릿함이 더 강해진 내 팔은 마비라도 된 것마냥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방패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아니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


그에 옆으로 몸을 날리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클레어가 디아나의 뒷쪽에  있는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언제 거기까지 접근한 걸까. 머리까지 치켜든 목검을 움켜쥔 클레어의 팔에는 근육이 바짝 치솟아있었다.

흐릿하게 변해있던 디아나의 눈동자 속으로 초점이 돌아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으니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고는 아주 잠깐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것도 잠시 디아나의 시선이 내게 와서 닿았다. 그렇게 제가 벌여놓은 참상을 확인한 디아나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방패가 더 버티지 못하고 부숴졌듯  몸도 슬슬 한계였으니까.

특히나 팔쪽이 그랬다.

데미지가 가장 많이 누적된 곳이 그곳이었으니까.

몸에 깃들어있던 긴장이 쫘악 빠져나가니  그래도 욱씬욱씬거리던 곳이 이제는 짜르르 울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시급히 상태를 확인해봐야할 것만 같아서 반토막나다시피 한채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던 방패를 대충 집어던진 뒤 소매를 걷어보았다.

그러자 눈으로 들어온 건..


'어이구야..'

아까 보았던 디아나의 무릎보다 더욱 푸르딩딩한 색을 띄고 있는 팔뚝의 모습이었다.


상태를 확인하니 통증이 더 심해지는  같아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딱봐도 심각해보이는 내 상태에 정신이 번쩍 든 것인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마냥 우두커니 서 있던 디아나가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으.."


뭐라고 하면 좋을 지   없었던 모양이다.


한순간에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같은 소리를 내며 디아나가 푸르딩딩하게 변해있는 내 팔목을 향해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왔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었다.


아픈 건 난데 왜 자기가  아픈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손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차마 손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나는 달달 떨리는 와중에도 기껏 뻗은 손을 차마 내 몸에다가 가져다대지 못했다.


"카트린느 양한테 가봐야겠군."

동시에 뒷쪽에서 들려온 클레어의 목소리가 안 그래도 심각하던 분위기에 심각함을 한 스푼 더  넣었다.

물론, 카트린느에게 도착하고 나서도 난리가 난 건 마찬가지였다.

카트린느가 내보인 반응은 디아나나 클레어가 보여준 것 이상이었다.

푸르딩딩하게 물든 내 팔을 보고 눈까지 까뒤집었으니까.


 와중에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멍만 들었을 뿐이지 금이 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뭐, 애초에 금이라도 갔다면 이렇게 태평할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놀러나갔다가 다쳐서 돌아온 자식을 마주한 부모마냥 눈을 까뒤집은 카트린느가 적극적으로 나서준 덕분에 내 팔 위에 자리하고 있던 푸르딩딩한 자국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누가봐도 다쳤다는  알 수 있을 두툼한 붕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말이다.

"그 누나..?"

자기 입으로 금이 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고 말했으면서 왜 깁스를 만들 기세인거람.


가만히 내버려두면 타박상 환자에서 골절 환자로 강제로 진화하게될 기세라서 다급하게 카트린느를 만류하고 나섰다.  그래도 아까 후원에서부터 줄곧 울 것 같은 표정인데 내 팔을 휘감은 붕대가  겹씩 늘어날수록 디아나의 얼굴 위에 자리한 표정이 더욱 일그러지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금방 이성을 찾은 카트린느가 디아나를 한 번 째릿하고 노려보고는 붓기를 빼는 데 도움이 될만한 약을 챙겨오겠다며 방을 빠져나갔다.


클레어또한 비슷한 타이밍에 자리를 비웠다.

보아하니 디아나에게 사과할만한 기회를 주고 싶었던 모양.

그리고 디아나는 스승이 내어준 기회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다.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내 눈치만 볼 땐 언제고 단둘이 남겨지자마자 쭈뼛쭈뼛대면서도 날 향해 다가왔으니까.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디아나가 상당히 용기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과라는 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건네면 끝나는 것처럼 간단해보여도 거기까지 다다르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딱 보니까 거기에 필요한 걸 어찌어찌 쥐어짜내다시피 해서 마련한 것 같은데..


여유분이 없었던 게 문제였을까.

그녀가 기껏 쥐어짜냈던 용기는 내게 닿기도 전에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디아나는 딱 두어걸음을 남겨두고 내게 다가오질 못했다.

보아하니 거기까지가 그녀의 양심히 허락하는 한계였던 모양.

그렇게 살짝 떨어져 선채로 연신 내쪽만 힐끔거리는 것이 가만히 내버려두면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기세라서 슬며시 몸을 일으켜 디아나의 손을 잡고 내쪽을 향해 잡아끌었다. 어쩌면 저항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런 건 없었다. 그녀도 내심 내가 먼저 다가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

아무튼 그렇게 내 앞까지 도달한 그녀를 향해 물었다.

"많이 미안해요?"

그러자 디아나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살짝 끄덕여보였다.


"그럼 됐어요."


"하, 하지만..!"


이대로 용서받고 끝내기에는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질 않는다고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딱봐도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길래 그나마 멀쩡한 손을 움직여 바지로 덮인 디아나의 무릎 부분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윽..!"


그러자 디아나의 표정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


"저도 선배를 다치게 했으니까요. 서로  방씩 주고받은 셈 쳐요."

"그, 그래도.."


"아니면 화 풀지 말까요?"

그래서 내가 계속 피해다녔으면 좋겠냐고 물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는지 디아나의 표정이 일순간 멍해졌다. 그렇게 온몸으로 그건 절대로 싫다는 감정을 표출할 때는 언제고 디아나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됐어요.  정도 가지고 뭘."


유난이냐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그렇게 그 문제를 가지고 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친 뒤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디아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당겨 내 옆에다가 앉혔다.

그리고는 타이즈로 덮여있음에도 붕대의 모양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그녀의 무릎 쪽을 향해 흘깃 시선을 던지면서 큼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좀 걱정이긴 하네요. 이제  있으면 교류전인데 그때까지 나을지 모르겠어요."

"..."

반응을 보니까 못 알아들은 눈치라서 조금 더 힌트를 주기로 했다.


"빨리 나으라고 누가 주문같은 거라도 걸어줬으면  안심이 될 것도 같은데.."

그제서야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자, 잠시만..!"

그렇게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디아나가 방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책상을 향해 달려갔다.

물론, 그 책상의 주인은 말할 것도 없이 카트린느였다.


평소의 디아나였다면 남의 것임을 고려해서라도 최대한 조심조심 뒤졌을 것이다.


헌데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런 기색따윈 찾아볼  없었다.

어찌어찌 책상 위에 자리하고 있던 것들을 무너뜨리지 않고 원하던 것을 찾아내는데 성공한 디아나가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잉크로 촉부분이 까맣게 변한 펜을 내 팔에 감겨있는 붕대에다가 가져다댄채 날 향해 시선을 던져왔다.

막상 펜을 가져오긴 했는데 뭐라고 적으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모양.


"이런 건 원래 쓰고 싶은대로 쓰는 거에요."

그래서 충고를 해줬더니 잠시 고민하더니 그녀가 이내 뭔가를 슥슥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뭘 적고 있는 걸까.


민망해서인지 아니면 미안해서인지는 몰라도 훔쳐보는걸 원치않는 눈치라서 일부러 눈을 돌리고 있었는데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해서 티나지 않게 슬쩍 시선을 던져보니 가장 먼저 눈으로 들어온 것은 '미안해.'라는 그녀의 진심이 담겨있는 문장이었다.

-미안해. 그리고 빨리 나아졌으면 좋겠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기분이 살짝 묘한 걸 느끼고 있자니 열심히 적어넣은  옆에 마침표를 찍은 디아나가 이내 펜끝을 살짝 떨며 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주저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던 디아나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펜을 쥔 손을 크게 움직였다.


그와 함께 펜 끝에서부터 피어난 것은 꽤나 앙증맞아 보이는 크기의 하트였다.

하트만으로는 좀 부족해보였던 건지  다음으로 새겨진 것은 디아나 본인으로 추정되는 포니테일의 여성이 양손을 모은 채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듯한 그림이었다.


현생에서 봤던 이모티콘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귀여운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으니 그런 걸 그려넣고서 은근히  눈치를 살피고 있던 디아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 뒤에 한 발 늦게  팔에 감겨있는 붕대의 존재를 확인하게된 앨리스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면서 부산을 떨어대긴 했지만  점을 제외하면 그 건은 무탈하게 넘어가는 듯 했다.

"아, 그리고 이건 저번에 가져다주셨던 것들에 대한 답례품입니다. 약소하긴 하지만.."


병문안을 왔을 때 들고왔었던 것들에 대한 답례라는 핑계로 카트린느에게서 받아서 챙겨두었던 향초를 바이올라에게 건네주려던 찰나 살짝 흘러내린 소매 사이로 얼핏 드러난 붕대의 모습을 그녀가 알아채고 잡아채지만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됐겠지.

내가 뭐라고  새도 없었다.


내 팔을 잡아챈 바이올라가 곧장 그것을 움직여 팔을 가리고 있던 소매를 치워버렸으니까.

"이게 대체.."

그렇게 만천하에 드러나게된  팔을 확인한 바이올라가 표정을 찡그렸다. 그런 그녀의 호박빛 눈동자에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걸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그득하게 담겨있었다.

"어, 어쩌다가.."

며칠 전에 봤을 때만해도 멀쩡했는데 어쩌다가 이 정도로 다치게 된 건지 묻고 싶었던 모양이다.

바이올라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바이올라의 목소리가 중간에 뚝 끊어진 것은  팔을 휘감고 있는 붕대 너머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곳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붕대 중 유일하게 까맣게 물들어있는 부분에 닿았을 때였다.


보석 중에서도 토파즈를 연상시키는 호박빛 눈동자 한 가운데에 박혀있던 동공이 일순간 확 줄어들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커졌다.


그리고는 그대로 빛을 잃어버렸다.

두 눈을 의심케하는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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