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일단 내뱉긴 했지만 확신까지는 아니고 살짝 긴가민가 했나 보다.
가까이서 확인해보겠다는 것처럼 곧장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디아나가 날 향해 다가섰다. 순간적으로 후욱하고 끼쳐온 그녀 특유의 달큰한 체향에 내가 살짝 움찔한 사이 그녀의 손이 내 머리 위를 방문했다. 그러더니 그것을 다시금 제 몸쪽으로 쭈욱하고 잡아당기는 게 아닌가.
꼭 뭔가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그런 움직임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진짜네..?"
가늘게 뜨여있던 디아나의 눈동자가 이내 동그랗게 변했다.
살짝 커지기까지 한 걸 보면 꽤나 놀란 모양.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 상태로 그대로 굳어버린 디아나의 손을 잡고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거기다가 슬며시 볼을 비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워올리는 건 덤이었다.
"그렇죠?"
"그 상태에서 크기도 하는 구나.."
뭐가 그리 신기한가 했더니만 그 부분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이 모습으로 지낸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 그동안 새끼손톱만큼도 자라질 않았으니까. 단순히 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카락도 그랬고 하다못해 손톱같은 것도 전혀 자라질 않았다. 마치 처음 모습에서 그대로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 잠깐만..'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른 순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게 일어난 변화를 보고 카트린느가 그토록 당황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손톱도 머리카락도 안 자라게 되어있는 놈이 하룻밤 사이에 키가 몇 센티나 커서 찾아왔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겁할 수 밖에 없었겠지.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기에는 몸에 활력이 흐르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다. 설마 이것도 죽기 전에 보인다던 회광반조인지 뭔지 하는 현상은 아니겠지..
생각이 한 번 그런 쪽으로 쏠리니 자꾸만 그쪽을 향해 흐르는 건 사람 심리상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았다.
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던 것도 잠시, 내가 살짝 멍때리고 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내 볼을 조물딱대고 있던 디아나를 향해 자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몸에 변화가 일어나버린 바람에 가지고 있던 중화제를 못 쓰게 됐다고 말이다.
내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디아나의 표정은 뭐랄까..
마른 하늘에 친 날벼락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상태로 얼어있던 것도 잠시 디아나의 표정이 대번 심각하게 변했다. 그런 얼굴을 한채 그녀가 가장 먼저 물어온 것은 다름아닌..
"그.. 새 중화제는?"
바로 그것의 여부였다.
그럼 새 중화제는 어떻게 된 것이냐.
그리 묻는 듯한 디아나의 발언에 그또한 사실대로 답을 해주었다. 안 그래도 여기 들리기 전에 카트린느의 방을 방문해 내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새 중화제를 부탁했다고.
이미 개발에 착수한 상태라는 걸 밝히니 디아나는 일단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 위로 떠오른 불안감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으음.. 큰일이네.."
디아나또한 카트린느가 일정에 맞추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시작한 모양이다. 고운 선을 그리고 있던 그녀의 눈썹이 슬며시 일그러지더니 그녀의 미간 사이에 깊은 골이 패였다.
이 와중에 혹시 주름이라도 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던 걸까.
손을 들어올린 디아나가 손가락을 이용해 미간 사이에 패인 골을 꾹꾹 눌러댔다. 그 상태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것도 잠시, 가늘게 변해있던 그녀의 눈이 다시금 내게로 돌아왔다.
"그럼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네, 아무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요. 중화제가 제때 완성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훈련을 하러 왔다고 말을 하니 디아나의 얼굴 위로 난색이 떠올랐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몸이 이렇게 되고 나서 몸 쓰는 시간 한정으로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게 바로 디아나니까. 조금만 걸어도 숨 넘어갈듯 헉헉대던 모습이 머릿속에 훤할텐데 그런 몸으로 훈련을 해보겠답시고 찾아왔으니 이번에야말로 훈련을 하다가 기절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
이건 말로 설명한다고 한들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서 직접 확인해보라는 뜻으로 디아나의 손을 잡고 바깥을 향해 이끌었다.
결과가 뻔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기사 부문의 주장이나 다름없는 위치인만큼 확인 정도는 해봐야겠다고 판단한 건지 디아나는 그런 내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다. 물론, 방을 나서기 전에 얼마 전까지 자기가 앉아있었던 책상을 향해 힐끔하고 시선을 던지긴 했지만 말이다.
"아, 잠시만요."
그렇게 숙소 뒤에 딸린 후원으로 향하려던 것도 잠시,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것들의 존재를 기억해낸 나는 디아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잠시 방에 들렸다. 지금 옷으로는 좀 그러니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다는 핑계를 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것들을 짐 사이에다가 적당히 쑤셔넣은 뒤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디아나의 앞에서 달라진 몸 상태를 뽐냈다.
그야말로 잘 단련된 몸의 표준이나 다름없었던 원래 몸과 비교하면 여전히 형편없는 수준이긴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적어도 조금 뛰었다고 숨이 턱하고 막히며 폐가 꽉 조여오지는 않았으니까.
특히나 몸 상태가 개선되면서 꼬맹이 특유의 지치지 않는 체력또한 같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인지 체력만큼은 원래 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만 하더라도 무리하는 건 아닐지, 저러다가 갑자기 픽 쓰러져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어린 눈빛을 한채 날 바라보던 디아나의 눈빛이 바뀐 것도 그쯔음이었다.
적어도 이전처럼 허약하지만은 않다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살짝 마음이 놓였던 모양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근심이란 근심은 혼자서 다 떠안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디아나가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근심이 가득했다.
내 몸 상태가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아졌다는 건 확인했지만 그것이 교류전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을까하는 의문까지는 해소시켜주지 못한 모양.
그러니 어쩌겠는가.
전처럼 끝판왕 역할은 힘들더라도 1인분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또한 직접 확인시켜줘야겠지.
디아나에게 대련을 요청했던 건 그걸 위해서였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원래 몸과는 다른 곳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보니 원래 쓰던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었으니까.
승산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선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고, 그걸 위해서라도 사용하는 무기의 교체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이 와중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만한 구석이 있다면 자그마한 몸으로 싸우는 것이 낯설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떠올리기조차 싫은 1회차때는 다 자라지 못한 몸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이 죽어나자빠지는 곳으로 내몰리곤 했으니까.
그때를 떠올리니 오랜만에 가뿐함이 느껴지는 몸 덕분에 둥실둥실해졌던 기분이 단숨에 바닥까지 내려꽂혔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사정이 궁하니 거지같긴해도 그런 거라도 땡겨와야지.
해서 그때 주로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것들을 갖춰보려고 했는데 의외로 거기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여기가 우리의 홈그라운드였다면야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을테지만 여긴 교국이고, 우리는 일단 신세를 지고 있는 입장이니까.
사비를 들여 뭔가를 들여온다고 쳐도 어느 정도 절차라는 것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당장 구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임시방편으로 교국 측에서 훈련을 위해 구비해둔 것을 쓰기로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디아나의 도와준 덕이 컸다. 나 대신 몸소 훈련용 장비들의 수선을 해주었으니까.
그렇게 디아나가 손수 잘라내어 장창에서 단창이 되어버린 것을 들고 흔히 버클러라 부르는 원형 방패를 반대쪽 팔에 찬채 그녀와 마주섰다.
내가 간곡하게 부탁하니 일단 들어주기는 했지만, 디아나는 이 대련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내 허약함이 뿌리깊게 각인된지 오래라는 걸.
그러니 저렇게 불안해하는 거겠지.
지금 날 바라보는 디아나의 눈빛은 혹시 잘못 때렸다가 어디 한 군데 부러지진 않을지 크게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저건 내가 뭐라고 떠들던 간에 내 선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걸 가지고 뭐라 말하는 대신 손에 든 단창을 그녀를 향해 치켜들었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단창의 상태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장창이었던 것을 잘라내서 급조한 것이다보니 미묘하게 균형이 맞질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당장은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해야겠지.
'후우..'
속으로 짧게 숨을 고르면서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었다.
아까 디아나의 앞에서 생쑈를 하면서 알게된 점은 나아진 몸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잽싸다는 점이었다. 내게는 잘 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리치싸움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고민이었으니까.
본격적으로 대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몸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고는 그 확인이 끝났을 때 바로 맞은 편에 서있던 디아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진중하게 변해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걸까.
왠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그녀의 시선을 느끼며 속으로 가볍게 웃었다. 우리 둘 중에 누가 본때를 보게될지는 끝날 때까지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살짝 방심하고 있는 듯한 디아나하고는 다르게 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디아나와 시선을 마주한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이니 그녀가 두어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날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작하자는 의미였다.
그렇게 시작된 대련에서 디아나는 의외로 신중하게 행동했다. 아까 날 향해 던지고 있던 눈빛을 생각하면 분명 시작하자마자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물러난 자리에 두 발을 단단히 박은 채 굳건히 버티고 선 디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짝 자세를 낮추고는 방패를 찬 팔을 앞으로 내세웠다. 그 상태로 천천히 그녀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언제까지고 가만히 서 있을 것처럼 보여도 어느 순간 갑자기 달려들지도 모르는 노릇이었기에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언제든지 대응할 수 있도록.
자박- 자박-
발바닥에 힘을 준 탓일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발밑에서 모래나 돌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바스라졌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자꾸만 느슨해지려하는 긴장의 끈을 바짝 잡아당겼다.
그런 식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디아나의 손에 쥐어져있는 것의 간격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그 간격을 유지한채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기묘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다름아닌 디아나였다.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다리가 살짝 움직였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은 어느새 내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피하긴 타이밍이 살짝 애매한 상황.
해서 방패를 찬 손을 들어올려 날 향해 날아들고 있는 것의 궤도에다가 가져다댔다.
퍼억-!
방패를 통해 전해져온 충격은 묵직하다 못해 얼얼했다. 부딪히는 순간 몸을 살짝 뒤로 뉘여서 충격을 줄였음에도 그러했다.
덕분에 손목이 시큰거렸지만 제법 컸던 공격이 무위에 그침으로써 디아나의 헛점이 훤히 드러난 상황.
아직 흐트러진 자세를 미처 수습치 못한 그녀의 모습이 얼른 자신을 향해 달려들라고 손짓이라도 하는 듯 했지만 그 속삭임에 응하지 않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들려온 것은 작게 혀를 차는 소리였다.
'역시나..'
함정이었구만.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순간적으로 그게 궁금해졌지만 이내 피식하고 웃었다.
생각해보니 뻔했으니까.
'어떻게 되긴..'
보나마나 들어가자마자 방패채로 분쇄당하고 거기서 끝났겠지.
그동안 훈련에 매진하더니만 확실히 성장하긴 한 것 같았다.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간 디아나에게서 쉬이 넘볼 수 없는 태산과도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무슨 수를 써도 뚫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비관적인 예감이 몸을 콕콕 찔러오는 가운데..
속으로 비뚜름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 감각이 참으로 마음에 들어서,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실소하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