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울려퍼지던 목소리가 뚝 멎으며 어색하고도 싸한 침묵이 방 안으로 내려앉았다.
그걸 느낀 순간 직감했다.
디아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가 뭔가를 눈치깠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그럼 전달했으니까. 난 이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침묵을 깨뜨리며 울려퍼지기 시작한 목소리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 말 뒤로 따라붙은 것은 누군가 방 밖으로 물러나는 소리였다.
곳곳에 있는 틈을 이용해 들려오는 그 소리 덕분에 굳이 직접 확인하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지금쯤 디아나의 얼굴 위로 떠올라있을 표정을 말이다.
'언제 내보내주려나..'
아무래도 좀 걸릴 것 같았다. 일단 당황에서 깨어나야 움직이든 말든 할테니 말이다.
해서 몸에 힘을 뺀채 나름 편안한 자세에서 디아나가 당황 속에서 빠져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드드득하고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빈틈없이 밀착한채 내게 압박감을 선사해주고 있던 디아나의 하체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겨난 바깥으로 통하는 출구에 곧장 그쪽으로 향하니 그런 날 반긴 것은 얼굴 한 가득 걱정을 베어물고 있는 디아나의 모습이었다.
"괘, 괜찮아?"
"네에, 뭐.."
디아나의 물음에 답을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아이러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따지고보면 저런 질문을 받아야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녀였으니까.
아무튼 분위기를 계속 어색한채로 두기는 좀 그랬기에 아까 보다가 말았던 무릎을 다시 내놓을 걸 요구했다.
물론, 디아나는 그런 내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그렇게 다시금 눈앞으로 들이밀어진 것을 들여다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어떡하지."
왜 자꾸 내 얼굴을 힐끔대나 했더니만 그 말을 하고 싶어서 그랬나 보다.
그래서 한 번 모르는 척을 해봤다.
"뭐가요?"
뭘 말하는 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디아나와 눈을 맞춘 채 고개를 갸웃해보이니 그녀의 연분홍빛 입술이 안쪽으로 말려들어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 상태로 주저주저하던 것도 잠시,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지 디아나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눈치챈 것 같던데.."
이쯤되니 뭘 말하는 건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해서 아까 급하게 붙인 탓에 살짝 어설픈 느낌으로 붙어버린 붕대를 조심스레 떼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소문 나면.."
"왜요?"
"..응?"
"혹시 싫어요?"
디아나와 시선을 똑바로 맞춘 채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으며 그리 물으니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것은 꽤나, 아니 상당히 격렬했다.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처럼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펄쩍하고 튀어올랐으니까.
"그, 그럴 리가..!"
그 기세가 어찌나 격렬했던지 순간적으로 펄쩍하고 튀어올랐던 디아나의 몸을 받아낸 의자가 덜컹덜컹하고 격렬하게 흔들릴 정도였다.
목소리가 많이 컸다는 인식 정도는 있었던 걸까.
"..어, 없잖아."
디아나가 한결 작아진 목소리로 잽싸게 덧붙였다.
그럼에도 디아나의 입장에서는 모자라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오해하지 말아달라는 듯 그녀가 날 향해 격렬하게 손을 내저어보였다.
"그럼 됐죠. 뭐."
그런 그녀의 다시 한 번 시선을 맞추며 피식하고 웃어보인 뒤 아까보다 더 깔끔하게 붙은 붕대를 손바닥을 이용해 찰싹하고 두들겼다.
"읏..! 그런가? 헤헤.."
살짝 아프긴 했는지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던 것도 잠시, 디아나가 그저 좋다는 듯 헤픈 웃음을 흘려댔다. 대체 뭐가 그리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귀여운 그 모습에 덩달아 피식피식 웃다가 그녀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내 행동을 일으켜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곧바로 손을 뻗어 그녀를 향해 내밀었던 손을 꼬옥하고 움켜쥐길래 이게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펜이요. 펜 좀 줘보실래요?"
"펜?"
갑자기 펜을 찾아대는 내 행동이 상당히 뜬금없게 느껴졌는지 디아나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손을 움직였다. 그 와중에 살짝 웃겼던 점은 마주잡은 손만큼은 결코 놓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마주잡은 걸 놓고 그걸 움직이면 더 편할텐데 거 참..
뭐라 딱 꼬집어 설명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자니 책상을 향해 뻗어져나갔던 디아나의 손이 펜을 움켜쥔채 눈앞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그대로 내쪽을 향해 내려오기 전에 잽싸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잉크도 좀 찍어주세요."
그에 순간적으로 멈칫했던 것도 잠시, 디아나가 다시금 책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로 돌아온 그녀의 손 안에는 검게 물든 끄트머리가 인상적인 깃털펜 하나가 쥐어져있었다.
그대로 잡고 휘두르면 검은색 물방울을 사방으로 흩뿌릴 것처럼 생긴 그것을 조심스레 받아들어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대로 붕대로 덮인 디아나의 무릎을 향해 가져갔다.
사각- 사각-
펜의 상태가 상태다보니 붕대 위에 뭔가를 적는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펜대가 좀 딱딱하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고 조금 힘을 줄 때마다 이리저리 휘어대는 탓에 멋들어지게 쓰기가 어렵달까.
해서 끙끙대고 있자니 디아나의 눈에는 굉장히 희한하게 비춰졌나 보다.
"뭐하는 거야?"
살짝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그리 물어오길래 순순히 답을 해주었다. 내가 마음대로 되질 않는 펜을 잡고 끙끙대고 있는 이유를.
"저도 어디서 들은 건데 이렇게 붕대 위에다가 빨리 나으라는 말을 적으면 더 빨리 낫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물론, 돌아온 반응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현생에서나 통용되던 말이었으니까.
그래도 달랑 붕대만 붙여놓는 건 너무 살풍경하지 않은가.
해서 나름 꼼꼼하게 쾌유를 비는 말을 적고 있자니..
위에서부터 그런 내 행동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디아나가 이내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부탁 하나를 해왔다.
"그.. 하트도.."
글만 적지 말고 하트도 좀 그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기에 피식하고 웃으며 열심히 적고 있던 것 옆에다가 자그마한 하트 하나를 그려넣었다.
"이렇게요?"
분명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 성에 차질 않았나 보다.
"으, 응.."
살짝 아쉽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고개만큼은 순순히 끄덕이길래 하나를 더 그려주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만족할 수 있도록 최대한 크게.
남는 부분을 모조리 하트로 채우기라도 할 기세로 커다랗게 그려넣으니 그제서야 좀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디아나의 입꼬리가 위를 향해 치솟았다. 이왕 그린 김에 하트 안쪽까지 꼼꼼하게 색칠을 해주고 물러나니 디아나가 곧바로 손을 뻗어왔다.
한 번 만져보고 싶었던 모양.
물론, 허락해주지 않았다.
아직 잉크도 안 말랐는데 그런 상태에서 만져봐야 좋은 꼴 못 볼 건 뻔하니까.
해서 무릎을 노리고 스멀스멀 기어오던 디아나의 손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쳐내니 그녀가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그렇게 응급처치를 끝마치고는 디아나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용도를 다한 펜을 책상 위로 돌려놓으며 지나가듯 물었다.
"편지 쓰고 있던 중이었나봐요?"
"..응?"
대답이 돌아오는데까지 걸린 시간이 제법 길었다. 꼭 마치 생각치도 못한 질문을 받고 당황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아까와 같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편지봉투가 있길래요."
그래서 그냥 한 번 물어본 거라는 뜻으로 그쪽을 향해 턱짓을 해보이니 '아.'하는 소리와 함께 살짝 입을 벌렸던 디아나가 이내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들을 허둥지둥 덧붙였다.
"그.. 아무래도 어머님께 잘 지내고 있다고 안부 정도는 전해야할 것 같아서.."
"흠, 하긴 왕국을 떠난지도 꽤 됐으니까요."
그렇구나.
요즘 안부 편지에는 지급 도장을 찍어서 보내는 구나.
겉으로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확신했다.
그녀가 편지에 대해 내게 숨기려고 하고 있음을 말이다.
이유가 뭘까.
대체 무슨 내용이었길래 내게 숨기려고 드는 걸까.
디아나는 자신의 어머니한테 보낼 거라고 말했지만 그럴 리 없었다. 편지의 진짜 수령인은 아마도..
'레이시아?'
그래, 그럴 확률이 높겠지.
내가 궁금한건 디아나가 레이시아한테 어떤 내용의 편지를 보내려 했는가다.
편지가 저렇게 되어버린 이상 그걸 확인하는 건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이미 끝나버린 걸 붙잡고 낑낑대봐야 꼴사나워질 뿐이었기에 그대로 몸을 돌려 책상 옆에 위치해있는 쓰레기통 쪽으로 향했다. 응급처치를 하고 남은 것들을 털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쓰레기통 앞에 도달한 순간, 눈으로 들어온 것은 대충 찢어진채 구깃구깃하게 구겨져있는 편지지들의 모습이었다.
그것들의 모습이 시야 속으로 박혀들어온 순간 몸이 제멋대로 앞으로 기울어지려고 했지만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 안에 쥐고 있던 응급처치의 잔해들을 쓰레기통 안에다가 털어낸 뒤에 그 새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한 디아나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일을 거들었다.
아니, 거들려고 했다.
디아나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다면서 밀어내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했겠지.
대신 책상을 치우면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내가 날라다가 버리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그렇게 디아나가 부지런히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에 맞춰 쓰레기통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가득 차자마자 곧장 그것을 집어들었다.
"쓰레기통 좀 비우고 올게요."
그리고는 그리 말한 뒤 그대로 디아나의 방을 빠져나왔다.
쓰레기를 모으는 곳은 각 층의 구석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도 그냥 구석이 아니라 눈에 띌 것을 우려해 모퉁이을 돌아야만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곳에 도달한 순간 다른 이들의 시선은 신경 쓸 필요 없이 들고나온 휴지통을 까뒤집을 수 있었다.
휴지통을 거꾸로 안아든 채 바닥에 대고 털털 흔들어대니 그 안에 꽉꽉 눌려있던 것들이 제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샛노란 종이가 구겨져있는 것들을 집어들어 그대로 쫙 펼쳤다.
그리고는 맨 위에 적혀있는 글자부터 확인했다.
-레이시아 님께..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한 글자가 눈으로 박혀든 즉시 그것을 다시 꼬깃꼬깃하게 구겨서 그대로 주머니 안에다가 챙겼다.
맘 같아서는 이곳에서 끝까지 확인까지 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았다.
혹시라도 디아나가 날 따라나왔을 수도 있으니까.
아직 기척같은 건 느껴지지 않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주머니 안에 챙긴 걸 확인하는데 집중하다가 그녀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해 그 광경을 고스란히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할 말이 굉장히 궁해질테니 이 편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원하던 것을 챙기고 난 후, 바닥에 널브러져있던 것들을 대충 주워서 커다란 쓰레기통 안에다가 모조리 쑤셔넣은 뒤 깔끔하게 비워진 쓰레기통을 들고 디아나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까 디아나의 방에 들렸던 이가 고새 입을 털기라도 한 것일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얼굴을 흘깃대는 시선과 함께 꼭 마치 들으란 듯이 울려퍼지는 수군거림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왔지만 싸그리 무시했다.
떠들테면 떠들라지 뭐.
오히려 더 떠들어보라는 뜻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보란듯이 씩하고 웃어보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모양새가 참으로 하찮기 그지없었다.
그런 식으로 수군대는 것들의 입을 하나하나 틀어막으며 디아나의 방으로 돌아오니 그녀는 그새 정리를 끝마치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 정리하는데 사용했던 천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걸 보고 곧장 휴지통을 내밀었더니 디아나가 모아놓은 것들을 그대로 휴지통 안에다가 쏟아부으며 질문을 던져왔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혹시 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닐지 내심 걱정이 됐던 걸까.
딱 보면 괜찮아보인다는 걸 알 수 있을텐데도 얼굴로 날아와 꽂히는 디아나의 시선에는 날 향한 걱정이 듬뿍 배어있었다.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맞춘 채 씨익하고 웃어보였다.
당연히 디아나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저 뭐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그 상태로 카트린느를 향해 이미 한 번 던진 적 있는 질문을 던져봤다.
물론, 디아나가 답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쪽으로는 영 눈치가 없는 게 바로 그녀니까.
해서 난감해하면 곧바로 답을 알려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 그러고 보니 키가.."
한 번 맞춰보겠다는 듯 나름 진지하게 내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던 디아나의 눈이 일순간 동그랗게 변하더니..
"커진 것 같은데? 맞지?"
놀랍게도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정답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