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단 한순간에 난장판으로 변해버린 책상 위를 내려다보는 디아나의 얼굴은 망연자실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구현해놓은 듯 했다. 비유하자면 밤 새워 간신히 끝낸 과제를 이제 막 저장하려던 순간 모니터 위로 떠오른 블루스크린을 마주한 것 같은 그런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그만큼 중요한 것을 처리하고 있었던 걸까.
'그럴 리가 없을텐데..'
여기가 학원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교국 아니던가.
학원에서야 생도라는 입장보다는 기사부 부장이라는 앞서는 디아나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것이 바로 참가자라는 입장이니까.
헌데 수련하라고 등을 떠밀어도 모자랄 판국에 서류 좀 처리하라고 일을 맡긴다?
저번에 병문안을 핑계로 내 방을 방문했었던 외무대신이 보여준 태도를 고려하면 그럴 리 없었다.
아, 딱 하나 가능성이 있긴 했다.
디아나가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짬을 당했다면 방금과 같은 모습도 충분히 성립할 수 있겠지.
그리고 일행 내에는 그럴 수 있을만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클레어 말이다.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만큼 클레어와 책상이라는 단어는 그녀와 조신함만큼이나 어울리질 않았으니까. 하루의 태반을 수련으로 보내는 그녀가 책상에 얌전히 앉아서 서류를 처리한다?
솔직히 말해 잘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만큼 안 어울린다고 해야할까.
그렇게 맡긴 서류가 제대로 처리될 것 같지도 않았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가정에 불과했기에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당황한 척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책상 위를 스캔했다.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저렇게 낭패감어린 표정을 할 정도라면 꽤나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는 뜻이고, 그런 거라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둬서 나쁠 건 없을테니 말이다.
그런 계산 하에서 한 행동이었는데 그렇게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고 있자니 시야 속으로 파고들어온 것은 꽤나 이질적인 물건이었다.
'편지봉투..?'
잉크통이 정말 대차게 엎어진 탓에 까맣게 덧칠되어버린 것은 그것도한 마찬가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모양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저게 왜 이 자리에 있냐는 것이었다.
'혹시..'
뭔가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게 아니라 편지를 쓰고 있었던 건가?
막 작성을 끝마쳐가던 와중에 내가 들이닥쳐서 처음부터 다시 쓰게 된 것이고?
편지라.
자긴 잘 지내고 있다고 가족한테 안부를 전하는 편지라도 쓰고 있었던 걸까. 교국에서 지낸지도 꽤 되었으니 가능성이야 충분하다 못해 넘쳤지만 감이 자꾸만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그런 게 아니라고, 편지의 수취인은 따로 있다고.
"어쩌죠. 저 때문에.."
"아, 아니다. 내 실수인 것을."
부딪힐 때 난 소리가 제법 요란하더라니만 부딪힌 곳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상당한 모양이다. 내 말에 네 잘못이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젓는 디아나의 얼굴이 이따금씩 파르르 경련했다.
"괜찮으세요? 혹시 다치신 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디아나를 향해서 바짝 다가섰다. 혹시 방금 그걸로 인해 다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되는 건 진심이었기에 그것을 고스란히 얼굴 위로 띄워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그런 표정을 보란듯이 얼굴 위에 띄워보인채 바짝 다가서니 디아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그녀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으니까.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모양.
"잠시만 앉아보세요. 괜찮은가 확인 좀 해보게."
우두커니 서 있던 디아나의 몸을 떠밀어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가 앉아있었던 자리에 다시 앉혔다. 많은 힘은 필요 없었다. 그저 슬쩍 떠미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어정쩡하게 서 있었던 탓에 내가 살짝 떠밀자마자 곧바로 균형을 잃어버린 디아나의 몸이 그대로 의자 위로 무너졌다. 귓가로 털썩하고 먼지가 붕 떠올랐다가 다시금 내려앉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지는 걸 느끼며 디아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몸이 줄어든 탓에 사실 허리만 숙여도 높이를 맞추기엔 충분했지만 그래서야 모양이 살질 않으니까.
고생을 자처한 보람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아파요?"
꿇어앉은 자세에서 고개만 살짝 들어올린채 그리 물으니 간신히 진정되어가던 디아나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으니까.
"자, 잘 모르겠다.."
암요, 그러시겠죠.
자기 몸인데 모르는 게 말이 되냐 싶겠지만은 지금 디아나의 상태를 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얼굴이 손을 가져다대면 그대로 펑하고 터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새빨간 것이 얼굴에서 올라오는 홧홧한 느낌을 견디기 바빠 다른 쪽에 신경 쓸 겨를같은 게 없을테니 말이다.
그 귀엽기 그지없는 반응 때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는 아까 전부터 얼굴 위로 띄워놓고 있던 걱정 반 심각함 반의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턱에 힘을 꽉 주었다.
"잠시만요.."
내가 척봐도 심각해보이는 표정을 풀지 않고 계속 유지하고 있으니 설레서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디아나의 얼굴또한 덩달아 심각해졌다.
"좀 볼게요."
"괘, 괜찮은데.."
"그래도요."
짤막한 한 마디로 디아나의 저항을 분쇄한 뒤 쪼그려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손만 움직여 그녀를 향해 뻗었다.
오늘 디아나는 살짝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 걸까. 최근 많이 쌀쌀해졌는데 말이다.
'하긴, 많이 움직이는 편이니까..'
추울 새가 없겠지.
아무튼 덕분에 바짓단을 걷어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보들보들한 면으로 된 바짓단을 착착 걷어올리다보니 모습을 드러낸 것은 디아나가 평소 운동할 때 입는 것처럼 몸에 쫙 달라붙는 검은색의 타이즈였다.
다만 기장이 좀 달랐다.
평소 입는 것이 반바지에 가까운 길이였다면 지금 입고 있는 것은 반바지라고 하기엔 너무 길었으니까.
'어쩐지..'
얇게 입고 다니더라니만.
안에 이런 걸 입고 있으니까 추위를 안 타지.
그런 걸 입고 있는 모습을 내게 보이는 것이 디아나의 입장에서도 꽤나 민망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슬쩍 시선을 들어올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해보니 내가 처음 바짓단을 움켜쥐었을 때만 하더라도 안절부절 못 하는 시선을 던지기 바쁘던 디아나의 얼굴은 어느새 옆으로 돌아가있었다.
덕분에 훤히 드러나게 된 귀도 얼굴만큼이나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말이다.
사람 심리라는 게 참 신기한 것이 그렇게 민망해서 죽으려고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덩달아 민망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단 한순간에 어색하게 변해버린 분위기를 느끼고 있던 것도 잠시,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고 이 사태를 촉발시킨 주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입고 있는 동안 땀을 머금은 탓인지 아니면 몸에 찰싹 달라붙는 성질 때문인지는 몰라도 바지하고는 다르게 걷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해서 바지처럼 걷어올리는 건 포기하고 대신 잡아당기는 쪽으로 선회하니 그런 내 끙끙거림을 보다 못한 디아나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왔다. 그런 그녀의 조력에 힘입어 마침내 부딪힌 곳을 확인하게 된 순간 눈으로 들어온 것은 이제 막 푸르딩딩하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무릎의 모습이었다.
"아이고야.."
교류전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말 그대로 큰일났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는 상황.
이대로 방치해두면 지금보다 더 심각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기에 곧장 고개를 들어올려 디아나를 향해 물었다.
"혹시 연고같은 거 없어요?"
없을 리는 없었다. 스승인 클레어만큼이나 수련을 사랑해마지 않는 것이 바로 디아나다.
그리고 수련을 하다보면 때때로 자잘한 부상을 입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만큼 그에 대한 대비또한 충분히 되어있을 터.
아니나 다를까 내 물음에 디아나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저, 저기.."
동시에 그리 말하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길래 그 잠깐 사이에 더욱 퍼렇게 변한 부분을 손가락 끝을 이용해 쿡 눌렀다.
"읏..!"
효과는 확실했다. 막 몸을 일으키던 디아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의자 위에 풀썩 주저앉아버렸으니까.
그렇게 디아나를 강제로 자리에 눌러앉힌 뒤 그녀를 대신해 몸을 움직였다. 목표는 아까 그녀의 시선이 향했던 곳이었다.
그런 식으로 아까 디아나의 시선이 향했던 곳을 향해 나아가면서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책상을 향해 슬쩍 시선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까보다 훨씬 가까워진 덕분일까. 아까봤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시야 속으로 파고들어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저 빨간 도장같은 게 그랬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저건 지급을 요하는 서신에나 찍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게 편지봉투 옆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는 건?
내가 들이닥치기 전까지 열심히 작성하고 있었던 게 어딘가로 긴급하게 보내질 예정이었다는 뜻이겠지.
뭘까.
대체 쓰고 있던 게 뭐였길래 저 뻘건 도장까지 찍어가며 빨리 보내려고 했던 걸까.
이럴 줄 알았다면 놀래키지 않았을텐데.
아쉬움을 뒤로한채 아까 디아나의 시선이 가리켰던 서랍장의 손잡이를 움켜쥐고는 그대로 쭉 잡아당겼다.
서랍 안에는 온갖 약품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서 딱 봐도 꾸덕꾸덕해보이는 연고가 담겨있는 통을 꺼내들어 디아나를 향해 확인차 내밀어보이니 내 손에 들린 것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맞나 보네.'
연고만 덜렁 발라놓고 끝내는 건 좀 그럴 것 같아서 겸사겸사 같이 들어있던 붕대와 접착용 테이프까지 챙긴 다음에 곧바로 처치에 들어갔다.
디아나를 향해 돌아앉은 즉시 그녀가 본인이 직접 하겠다는 듯 손을 뻗어왔지만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거절했다.
"발라드릴게요."
그러니까 무릎이나 잘 내밀라는 뜻을 담아 허벅지 옆쪽을 찰싹찰싹 두들겼더니 일순간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던 디아나가 이내 눈을 꼭 감은 채 내쪽을 향해 제 무릎을 내밀었다.
다행히도 아까 봤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환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에 연고를 듬뿍 발라 퍼렇게 변해있는 부분 위에다가 조심스레 펴발랐다.
멍이 들어 욱씬욱씬거리는 부분에 자꾸만 손가락이 닿았다가 떨어지니 꽤나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지금 제 눈앞에 펼쳐져있는 광경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는 듯 눈을 꼭 감고 있던 디아나가 몸을 흠칫흠칫 떨어댔다.
딱 그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말 그대로 갑작스럽게 울려퍼진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멈칫했던 것도 잠시, 디아나를 향해 시선을 들어올렸다. 물론, 거절하라고 신호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헌데 그 누군지 모를 방문객의 움직임이 몇 배는 더 빨랐다.
내가 보낸 신호가 디아나에게 닿기도 전에 달칵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울려퍼지길래 일단 몸부터 숙였다. 대체 왜 그랬던 건지 이해는 안 가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나와 비슷한 판단을 내렸던 건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녀가 책상 아래쪽으로 제 하체를 밀어넣기 시작했다.
덕분에 책상과 그녀의 하체 사이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지만 일단 참았다. 얼떨결에 책상 밑으로 몸을 구겨넣어버린 탓에 아까보다 더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으니까.
거기까진 문제될 게 없었다.
해서 이제 누군지 모를 손님이 다시 방을 빠져나갈 때까지 들키지 않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디아나의 생각은 또 달랐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지?"
그런 물음과 함께 안으로 밀고 들어와있던 그녀의 하체가 조금 더 안쪽을 노리며 파고들기 시작했다.
문제가 있다면..
꾸욱- 꾸우욱-
책상 밑이 이미 포화상태였다는 것 정도?
덕분에 디아나가 몸을 밀어넣으려고 하면 할수록 이래저래 닿는 부분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연고를 바르다가 만 무릎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한 번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주 거침없이 파고드는 무릎의 움직임에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행동은 딱 하나 뿐이었다.
무릎 위에 발라놓은 연고가 내게 묻지 않도록 그 위를 아까 챙긴 붕대를 이용해 덮는 것, 바로 그것 말이다.
무사히 그 일을 끝마친 순간 디아나가 다시 한 번 무릎을 들이밀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얼굴에 니킥이라도 갈겨버릴 것 같은 그것의 기세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반대방향으로 떠밀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그녀의 무릎을 꾸욱하고 짓누르게 되었고..
"알겠다. 책상 위만 정리하고 나서 나가볼테..흐으읏-!"
그 결과는 제법 참담했다.
누군지 모를 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디아나의 입에서 요상하게 들리기 딱 좋은 소리가 터져나와 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