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88)화 (187/366)



〈 18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엎질러진 물을 되돌릴 수 없듯 바이올라의 발언 이후로 애매하게 변해버린 분위기또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 원래 목표였던 본론을 꺼내들지 못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걸 꺼내들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제가 늘어놓은 것들을 주섬주섬 주워들어 다시 바구니 안으로 밀어넣길래 갈 때 가지고 갈거라고 생각했는데 바이올라는 그렇게 정리를 끝마친 것을 침대 옆에 놓여져있던 서랍장 위에다가 올려놓았다.

"그럼.. 가보마."

그러더니 몸 조리 잘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배웅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오히려 한 소리 듣기까지 했다. 몸도 안 좋은데  자꾸 무리를 하려고 드냐고 말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바이올라가 방을 빠져나가고, 그렇게  안에 홀로 남겨지게된 순간 여전히 손 안에서 또렷한 존재감을 발하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래서..'

대체 이건 뭐였던 걸까.


설마 정말로 그 슬라임 인간에게서 채취한 뭔가는 아니겠지.

아무리 급했어도 그런 짓까지 했겠냐만은 색이 워낙 똑같다보니  가능성을 차마 배제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입을 가져다대기가 굉장히 꺼려졌지만..

'궁금하긴 하네.'


한편으로는 그렇기도 했다.

무슨 맛이 날지 상상이 안 된달까. 색이 푸르딩딩해서 더 그랬다.

현생에서 파란색 젤리라고 하면 보통 소다맛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여긴 어떨까.

잠시 망설이다가 주머니를 움켜쥐고 있던 손에 슬쩍 힘을 실어보았다.

그러자 동그란 입구 사이로 퍼렇고 물컹해보이는 것이 뽁하고 튀어나와 앞뒤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낼름거리는 혀가 떠올라서 문득 궁금해졌다. 슬라임 인간들의 혀는 어떤 색일지가 말이다.

피부는 물론이거니와 몸 전체가 푸르딩딩하니 혀도 푸른색이려나.

아직 약기운이 완전히 가시질 않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바이올라를 보며 느꼈던 불쾌한 기시감을 외면하고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시덥잖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잠이나 자자고.


마음 속을 맴돌던 망설임을 지워내고 여전히 입구 위로 튀어나와 있던 젤리를 닮은 파란색의 무언가에 혀를 가져다댔던 것은 그래서였다.


젤리 중에서도 탄력 좋기로 소문난 푸딩 형태의 과일젤리를 생각나게 하는 탄력적인 것이 마침내 혀에 닿은 순간 혀를 타고 올라온 것은 상큼하기 그지없는 맛이었다. 어찌나 상큼한지 먹으면 몸이 가벼워질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들 정도였다.

그래서 조심스레 베어물어 봤더니 오히려 이빨을 튕겨내더라.

자긴 씹어서 먹는 게 아니라고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괴랄한 맛이 날지도 모른다는 예상하고는 다르게 의외로, 아니 상당히 괜찮아서 그것을 조금 더 짜내 입 안에다가 털어넣었다.

그러다보니 알게 되었다.

바이올라가 많고 많은 것들 중에서 굳이 이것을 권했던 이유를 말이다.


아무래도 이게 제국판 죽인 것 같았다.

굳이 씹을 필요 없이 술술 넘어갈 뿐더러 목넘김이 굉장히 부드러웠다. 이 정도면 목이 팅팅 부어있더라도 부담없이 삼킬 수 있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든든했다.

 주먹보다 조금 큰 주머니 안에 담긴 것을 먹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포만감이 장난 아니었으니까.


포만감은 순식간에 노곤노곤한 감각으로 변해 내 몸을 감싸안았다.


바이올라를 상대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피로가 뒤늦게 밀려오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시간이 지날수록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느낌에 들고 있던 것을 대충 옆에다가 내려놓고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누군가 찾아올 때까지 조금만 자자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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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대로 정신없이 잤던 모양이다.


서로 찰싹 달라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눈꺼풀을 손으로 비비다가 그대로 열어젖힌 순간 깨달았다.


몸이 달라졌다는 걸 말이다.


원래 몸으로 돌아갔다거나 그런 뜻이 아니었다.


몸이 가벼웠다.


조금 과장해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몸이 쪼그라들고 난 후부터는 딱히 힘들게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늘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으니까.


그랬던 몸이 지금은 지극히도 가볍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주 잠깐이지만 내 몸 같지 않다는 생각마저  정도였다.

이런 느낌이 드는  제대로 푹 앓고 일어났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카트린느의 약이 감기기운과 함께 내 몸안에 남아있던 나쁜 기운들을 싸그리 태워버린 걸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거 때문인가?'


그 왜 바이올라가 가져다  병문안 선물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것 덕분일지도 모르지.

생긴 게 조금.. 그래서 그렇지 척봐도 보통 물건 같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날아갈 것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몸하고는 다르게  위를 덮고 있는 것은 찝찝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아무래도 잠들어있는 동안 또   땀을  뺀 모양.


해서 옷도 갈아입을 겸 땀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을 게 분명한 몸도 씻을 겸 방에 딸린 욕실 안으로 들어온 순간 깨달았다.


'엥..?'

몸이 단순히 가벼워지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키가 커져있었으니까. 정확히 재보질 않아서 확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 거울에 비치고 있는 모습만 보면 대충 3~4cm 정도는 커진  같았다. 잠들기 전과 비교하면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이게..'

말이 되나?

허둥지둥 몸을 씻고 방 안을 굴러다니던 것들을 대충 몸에 걸치고서 그녀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곳으로 향했던 건  때문이었다.

카트린느의 입장에서는 그런  방문이 꽤나 갑작스럽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하긴,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그녀를 찾은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 노크 소리에 반응해 문을 열고 나온 카트린느의 얼굴 위에는 살짝이지만 당혹스러움이 묻어있었다.  정도면 다음에 찾아오라고 할 법도 하건만 그녀는 날 밀어내지 않고 맞아주었다.

어느새 그런 그녀의 얼굴 위에는 나에 대한 걱정이 맴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갑자기 찾아온 걸 보고 몸에 뭔가 문제가 찾아온 거라 지레짐작한 모양.

비록 그녀가 예상하고 있는 것하고는 원인이 다르긴 했지만 몸에 문제가 생긴 건 맞았기에 그런 그녀의 착각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몸에 걸치고 있는  얇아보이는 잠옷 한 장 뿐인 걸 보면 내가 문을 두들기기 전까지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불쾌해하는 기색을 일절 내비치지 않았다.

"괜찮아? 또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오히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있는 힘껏 걱정을 드러내며 그리 묻기 바빴다.

그런 그녀의 물음에 일단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픈  확실히 아니었으니까.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닐지 마음을 졸이고 있던 찰나에 내 대답을 들으니 그나마 좀 마음이 놓였나 보다. '휴우..'하고 안도의 기색이 짙게 깔려있는 한숨소리가 그녀의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렇게 얼굴 위로 안심한 기색을 내비치던 것도 잠시, 그녀가 새로운 감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새롭게 떠오른 것의 정체는 다름아닌 의아함이었다.


아픈 게 아니라면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날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그녀는 그리 묻고 있었다.


해서 그런 그녀를 향해 보란듯이 양팔을 쫙 펼쳐보이며 물었다.

"누나, 나 달라진 거 없어?"

마음이 급해서 그만 많은 것들을 생략하고 말았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카트린느에게는 그런 내 발언이 살짝 오묘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처럼 카트린느의 몸이 우뚝하고 정지하더니 그녀의 입에서 '어...'하고 장고의 기색이 듬뿍 담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꼭 마치 일생일대의 질문이라도 받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덕분에 알게 되었다.

방금  발언이 '오빠, 나 오늘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이건 명백히 내 실수가 맞았기에 장고라는 함정 속에 빠져버린 카트린느를 구해주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 안색이 좋아진 것 같네."


무슨 일이 있어도 틀린 답을 내놓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카트린느가 간신히 그 한 마디를 입밖으로 내뱉었다.

"그렇.. 아니,  말은 그게 아니고.."

그또한 맞는 말이긴 했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했지만 빠르게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정답을 알려주었다. 내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말이다.


"키 말이야. 커진 것 같지 않아?"

그 순간 카트린느의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 덕분에  수 있었다. 내게 일어난 일이 보통 일은 아니라는 걸 말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카트린느의 얼굴 위로 '어?'하는 표정이 떠오를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을텐데..?"


살짝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한채 카트린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게 일어난 것이 보통 수준을 뛰어넘어 원래는 불가능한 수준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카트린느의 표정이 대번 심각해졌다.


"..이리와 봐."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채 날 향해 손짓을 해보이는 카트린느에게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한 분야에서 거장이라 불릴만한 경지에 오른 이들이나 낼  있을 법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해서 이리 오라는 그녀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카트린느의 부름에 응해 그녀의 앞에 서니  한쪽에서 요상하게 생긴 도구를 들고 내 앞으로 돌아온 그녀가 그것을 이용해 내 몸 곳곳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카트린느의 얼굴또한 점차 딱딱하게 변해갔다.

"이럴.. 이럴 리가 없는데.."

그 상태로 자꾸만 그런 말을 중얼대는데 덕분에 나까지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그런 식으로 카트린느가 느끼고 있을 불안감을 편린이나마 공유하고 있자니 내 팔뚝을 꼬오옥 움켜쥔채 나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말을 열심히 웅얼대던 카트린느가 대뜸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제 뭐뭐 먹었어."

"어제?"


어제 먹은 거라고 해봐야 생각나는 건 두  뿐이었다.

정체불명의 퍼렁 젤리와 요거트 맛이 났던 셔벗 말이다.


둘 중에 범인일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쪽을 꼽자면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퍼렁 젤리 쪽이 유력해보였지만 전문가의 소견은 다를 수도 있으니  두 개를 숨기지 않고 오픈했다.

"병문안 선물이라고 해서 먹었는데.."

"셔벗하고.. 젤리?"


"정확히 말하자면 젤리는 아니고 젤리 같은 거였는데.."

뭔지 이해가   되는 모양이다.


"혹시 남은 거 있어?"

실물을 확인해봐야 겠다고 생각한 건지 카트린느가 곧장 남은 것을 요구해왔다.


남은 거라.

"어제 먹은 다음에 그대로 침대 옆에 놓아두긴 했는데.."

남았을지는 잘 모르겠다.

기괴하기 짝이 없었던 첫인상하고는 다르게 생각보다 느낌이 괜찮아서 호로록 다 마셔버렸으니까.

그러니 남았다해도 개미 코딱지만큼만 남아있을게 뻔해서 당장 확인을 해봐야겠다면서 곧장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카트린느를 만류해봤지만 먹히질 않았다.


생각이 온통 그쪽에 매몰되어 버리기라도 했는지 내 말은 들은 척도 안한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버렸으니까.


금방 다녀올테니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은 덤이었다.

대충 남겨두고 간 말과 함께 졸지에 방 안에 방치되어버린 탓에 얼떨떨한 심정을 느끼고 있자니 벌컥하고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와 함께 카트린느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 다녀오겠다고 하더니만 전력으로 뛰어갔다 왔나 보다.

문고리를 손으로 움켜쥔채 몸을 앞으로 굽히고 있던 카트린느의 상체가 격렬하게 들썩거렸다.

"흐어헉.. 허억.."


나만큼이나 형편없는 몸을 가진 것이 카트린느인만큼 카트린느는 쉬이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그 정도면 흐트러진 호흡부터 어찌할 법도 한데 말이다.


카트린느는 그럴 시간마저 아깝다는 듯 덜덜 떨리는 손을 재촉해 다른 손 안에서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향해 뻗었다.

허나 생각만큼  되진 않았던 모양이다.

카트린느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몇 번 허우적대더니 이내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면 울음을 쏟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눈이 그렁그렁한 것이 솔직히 보기  안쓰러워서 보다 못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줘봐요."

그리고는 그녀가 움켜쥐고 있던 것을 빼앗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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