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87)화 (186/366)



〈 18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솔직히 말하자면 저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 못했었다.

내가 예상한 반응이라고 해봐야 난색 정도였으니까.

바이올렛의 상황이 아무리 급하다고 한들 타국의 약사가, 그것도 얼마 뒤면 서로 누가 더 잘났는지를 놓고 경쟁할 처지인 국가에 소속된 이가 건네준 것을 선뜻 복용하기엔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테니 말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서도 혹시라도 그 약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나 황녀의 일이니만큼 최선을 다했을텐데도 결국에는 그 문제를 해결치 못한 이들의 사기와 관련된 문제같은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해서 내 제안을 들은 바이올라가 그건 좀 어렵겠다는 식으로 난색을 표하면 일단 납득하고 넘어간 다음에 카트린느한테 복용하는 약말고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부탁해서 이거면 괜찮지 않겠냐는 식으로 은근슬쩍 건네는 것까지가 내 계획이었는데..

시작부터 꼬여버리니 차마 그걸 써먹을 수가 없었다.

해서 그건 잠시 뒷전으로 미뤄두고 바이올라를 향해서 반문했다.


"..네?"

당연히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의미였다.


그런 반응을 얼굴 위로 내보이며 바이올라를 향해 시선을 던진 순간 알  있었다. 이제는 내 귓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 방금의 그 말이 특정한 의도 하에서 내뱉어진 것이 아니라 얼떨결에 튀어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바이올라의 얼굴 위에 떠올라있는 표정이  사실을 내게 넌지시 일러주고 있었다.


뭔가 의도를 가지고 내뱉은 것이었다면 저렇게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말아야할 실수라도 한 사람처럼 낭패감어린 표정은 아니었을테니 말이다.

그렇다는 건.. 하나겠지.


평소 언니인 바이올렛에게 쌓인 게 많다는 것.


바로 그것 말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방금과 같은 말이 얼떨결에 튀어나올 이유가 없었다.

'뭐, 확실히..'


그럴만한 처지긴 했다.

바이올라와 바이올렛처럼 쌍둥이인 경우는 본 적 없긴 하지만 자기보다 몇 배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형제를 둔 탓에 하는 짓마다 비교를 당하면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들을  번 본적이 있으니까.

형제 간에 제법 나이 차가 있다고 해도 사람 한  미쳐버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양의 스트레스가 쏟아지던데 하물며 비교대상이 되는 쪽과 나이가 같다면 어떻겠는가.


입고 다니는 스타일같은게 많이 달라서 그렇지 똑같이 입혀놓으면 구분하기 어려울 게 분명할 정도로 닮은 둘이니만큼 함께 자라면서 바이올라가 받았을, 그리고 그녀 안에 알게 모르게 쌓였을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일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보통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딱봐도 바이올렛은 레이시아 과였으니까.

타고난 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노력까지 하는 타입이라고 해야할까.

뭔가를  때마다 뭘 하던 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뿐더러 더 잘하기 위해 노력까지 하는 상대와 비교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기분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바이올라가 황녀가 하기에는  많이 엇나가있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니는 것또한 충분히 이해할  있었다.


아마 저건 바이올라 나름의 생존방식이었을 거다.

그것도 그냥 깨우친 것이 아니라 열등감과 패배라는 것을 몇 십, 아니  백번 곱씹은 후에야 깨우치게 된 것이겠지.


어찌보면 몇 번이고 반복되는 패배 끝에 결국에는 무기력하게 변해버린 것이라  수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겠지.'


고통또한 계속해서 겪다보면 결국에는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열등감이라는 놈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반복될수록 강렬해지는 놈이 바로 열등감이라는 놈이었다.

그게 어디까지 커질  있는지 이미 경험해본바 있는 나였기에 그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살짝 입맛이 썼다.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바이올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의미가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버둥거리는  멈추지 않았던 누군가의 모습이 그녀의 얼굴 위로 오버랩 됐으니까.

그럭저럭 괜찮은  같았던 기분이 단 한순간에 바닥으로 쳐박혔다.

불쾌했다.

 마치 이제는 기억조차 흐릿한 과거의 흑역사를 생각치도 못한 방식으로 마주하게 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아, 아냐.."


"아, 네.."


황급히 말을 얼버무리는 바이올라를 상대로 그러냐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말을 다른 쪽으로 돌린 건 그 때문이었다.

바이올라가 계속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느낌이 가시질 않을 것 같았으니까.

참으로 다행히도 바이올라는 그런 내 의도에 착실하게 따라주었다. 그녀 입장에서도 다행이었겠지. 얼떨결에 내뱉은 말을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고 있던 와중이었을테니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먼저 화제전환을 시도해줬는데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었겠지.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아슬아슬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것도 그냥 아슬아슬함이 아니라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아슬아슬함이라고 해야할까.


아무래도 그리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간간히 티나지 않게 입술을 짓씹는 걸 보면.

그렇기에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런 걸 방치해둬봐야 좋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내게도, 바이올라에게도 말이다.

그렇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봐야한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다할 해결법이 떠오르질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흐음..'


얘를 어쩌면 좋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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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라 시점****


실수했다.


얼떨결에 말을 내뱉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면 안 됐는데,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자신과 마주보고 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언니의 이름을 입에 담는 이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배 안쪽에서부터 시커멓고 뜨거운 뭔가가 울컥하고 솟아오른 탓에 순간적으로 스스로를 제어하는데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그게 그렇게 쪽팔릴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덜컥 겁이 났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이안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오기라도 한다면 거기에 대고 뭐라고 답을 하면 좋을지 생각이 나질 않았으니까.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질 않았다.

누구에게나 무슨 일이 있어도 감추고 싶은 것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언니를 향한 열등감이 바로 그랬다.

자신이 무슨 수를 쓰던 간에 언니를 이길  없다는 건 이미 인정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언니를 향해 열등감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추하게 느껴졌다.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가 그런다면야 거듭되는 패배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길 멈추질 않는 멋진 모습으로 비춰지겠지만, 이길 가능성도 없고 노력하는 것또한 이미 포기해버린지 오래인 자신이 그런  드러내봐야 패자가 승자를 상대로 질투심을 불태우는 추한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을테니까.

그래서 숨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그 시커멓고 끈적거리는 것들을 긁어모아 꽁꽁 싸맸다. 그리고는 안쪽 깊숙한 곳에다가 묻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방금과 같은 상황을 겪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조치가 실은 누군가의 짤막한 한 마디에 완전히 풀어헤쳐질 정도로 어설프기 짝이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다시 숨기려고 해본들 늦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훤히 드러나버린 것을 다시금 꽁꽁 싸맸다.


그러면서 내심 이안이 제국 출신이 아니라서, 제국에 대해 잘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안이 제국 출신이었다면 방금 자신의 말에 의아하다는 반응을 내비치는 대신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을테니까.

어쩌면 자신을 보며 비웃음을 날렸을지도 모르지.

그런 상상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어대는 탓에 더더욱 뭐라고 둘러대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농담이었다고 둘러대면서 은근히 떠보는 척을 하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지만, 그러긴 싫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려웠다.

떠보는 자신의 말에 이안이 아니라고 부정을 한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에 하나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쓸데없는 걱정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그 쓸데없는 걱정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쭉 그랬으니까.

언니는 늘 완벽했다.


애초에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난 것 같은 사람이 바로 언니였다.

그렇기에 한때는 우스갯소리로 언니는 태어날 때도 앙앙하고 요란하게 우는 대신 다부진 표정을 하고 태어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가진 바 능력이 뛰어나면 조금은 느슨해질만도 하건만 언니는 그렇지도 않았다.


처음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자신을 보며 자만할 법도 한데 언니는 결코 그러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로는 성에도 차질 않는다는  더 잘해내기 위한 노력또한 멈추질 않았다.

물론, 자신이라고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잘해보기 위해 언니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기울였던 적도 많았다. 그 어린 나이에 잠까지 줄여가면서 말이다.

다른 아이들은 진작에 잠자리에 들고도 남았을 시간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더 뛰어난 성과를 거두는 쪽은 언니였다.

기울인 노력이 얼마나 되던 간에 자신은 매번 그 다음이었다. 그 탓에 한때는 억울함을 느낀 적도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매번 지기만하니 애초에 그렇게 정해진 상태로 태어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아무튼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었던만큼 칭찬과 관심, 그리고 애정또한 늘 언니의 것이었다.

그렇게 언니에게 쏟아지고 남은 것들이 자신의 몫이었다. 순수하게 그것만 주어지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열등감을 느끼는 일도 없었겠지.

사람들은 비교하는 걸 참 좋아했다.

마침 상황도 나쁘지 않았겠지.

멀리  필요도 없이 바로 옆에 비교하기에  좋은 대상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선심이라도 쓴다는 것처럼 내뱉어지는 짤막한 칭찬 한 마디 뒤로 매번 따라붙은 것은 언니와 자신을 비교하는 말들이었다.


더 잘 해볼 수는 없겠느냐.


고작 몇 초 먼저 태어난 언니는 저렇게 잘하는데 넌 왜 이것밖에 못하느냐.

언니만큼 할 수 없다면 언니만큼의 노력이라도 해봐라.

아마 지금껏 자라오면서 가장 자주 들었던 말 세 개를 꼽아보자면 대충 저렇지 않을까.

아무튼 저 말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하나 뿐이었다.


모르니까.


너희들은 아무 것도 모르니까 그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일 수 있는 거라고.

지금이야 더 잘해보겠다는 마음도, 노력이라는 것도 다 내던진지 오래지만  전까지만 해도 노력을 게을리한 적은 단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안 되는 것을 사람들은 항상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치부해버리고는 했다.

처음 한두 번이야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매번 그러니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여대는 말을 듣고 있자면 자신이 기울였던 노력과 시간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으니까.

그렇게 억울함을 느낄 때마다 시커먼 것이 자꾸만 가슴 안쪽에 켜켜이 쌓여갔다.

그런 것이 자신에게는 일상이었듯 언니는 사랑받는  당연한 사람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 사실을 실감한 덕분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현실은 동화처럼 낭만적이고 녹록치 않다는 걸 말이다.


자신이 이안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안또한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동안은 분명 그럴 거라고, 지금은 아니더라도 결국에는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은 동화 속 세계가 아니라 현실인데도 말이다.


현실은 동화하고는 달라서 자신이 마음을 내어줬다고 상대방또한 자신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편리하기 짝이 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그걸 다른 이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그만한 공을 들여야했다.

그게 현실이니까.


그렇기에 오랜만에 노력이라는  해볼 생각이었다.

설령 이안이 언니를 상대로 호감을 품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한 번 졌다고 그대로 포기해버리곤 했던 전과는 다르게 자신은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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