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86)화 (185/366)



〈 18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벌써 왔다고?'

그만큼 초조했나?

라고 생각했는데 들어오라는 내 말을 듣고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디아나였다.

이제 교류전의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만큼 오후 내내 훈련을  거라고 하더니 병문안과 관련된 소식을 주워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것일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디아나의 옆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맺혀있던 것들이 방 안쪽을 향해 성큼하고 내딛어진 디아나의 걸음에 맞춰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온 디아나의 뒤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다름아닌 앨리스였다.


보아하니 둘이서 대련같은 거라도 하다가 그대로 달려온 모양.

뭐라도 찾는 것처럼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주변을 훑던 디아나가 이내 안도의 기색이 짙게 담긴 한숨을 포옥하고 내뱉었다.


혼자서 초조해 하다가 혼자서 안심하고, 여러모로 바빠보이는 디아나하고는 다르게 앨리스는 비교적 차분했다. 그럼에도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지우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안을 살피던 디아나가 이내 날 발견하고는 그대로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덕분에 알게 되었다.

반쯤은 일부러 초췌한 느낌이 물씬 풍기도록 꾸민 게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창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해야하는 상황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리도 안타까웠던 것일까.

 그래도 기본적으로 순한 편인 디아나의 눈매가 추욱하고 처지더니 보는 내가 다 슬퍼지는 선을 그려냈다.


"괜찮아?"

솔직히 말하자면 괜찮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땀을 쫙 뺀 탓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아직 약기운이  남은 것인지 머리도 살짝 멍했고.


진실은 그러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밝히는 대신 디아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상태를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내 팔뚝을 움켜쥔 손을 두어차례 두들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충 이제 괜찮아졌으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는데..


이미 걱정이라는 스위치를 켜버린 디아나의 눈에는 그런 내 모습이 안 괜찮은데 억지로 괜찮은 척을 하는 것처럼 비춰졌던 모양이다.


팔뚝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꾸욱하고 힘이 들어가더니 분홍빛 입술 아래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 송곳니가 아랫입술을 꾸욱하고 짓누르며 초조함이라는 감정을 있는 힘껏 드러냈다.


그 상태로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있던 것도 잠시, 그녀가 그곳에 조금씩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많이 힘들면은.."

병문안 건은 자신이 어떻게든 해줄테니 일단 몸부터 챙기라는 말이 디아나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해주겠다니.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물론 그걸 받을 생각은 없었기에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면서 상대는 병문안을 오는 것뿐이라면서 그녀를 다독이는 듯한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안절부절 못하는 디아나를 달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내 뒤쪽으로 돌아간 앨리스가 슬며시 손을 뻗어왔다. 그리고는 뒷덜미 쪽에 남아있던 식은땀의 흔적을 손으로 슥 훑는 그녀였다.


"괜찮겠어? 식은땀이 장난 아닌데."

적극적으로 만류하려는 디아나하고는 다르게 앨리스의 태도는 어딘가 모호했다.


내가 병문안을 오겠다고 밝힌 황녀를 맞이하는 걸 못마땅해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는 않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어차피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으니 적극적으로 나서기가 좀 그랬던 걸까.

태도가 모호한만큼 상대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적당한 말로 그녀의 말을 맞받아쳤다.

그런 식으로 소식을 전해듣고 쪼르르 달려온 이들을 역으로 어르고 달래고 있자니 디아나의 얼굴 위로 모종의 결의가 어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게 대체 무엇에 대한 결심인지까지는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디아나로서도 쉽지 않은 결심이라는 것이었다.

 증거로 디아나의 얼굴 위로 그러한 변화가 나타난 즉시 그녀는  상대로 이만 돌아게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표면적인 이유는 자신이 있어봐야 방해밖에 되지 않을테고, 그러면  그래도 부담일게 분명한 병문안 시간이  늘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지만..

내게는 다르게만 보였다.


그녀의 얼굴 위로 드러났던 모종의 변화를 목격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황급히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그녀의 행동이 기껏 어렵게 결심을 한 것이 흐물흐물해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서두르는 것으로밖에 보이질 않았으니까.

'대체 무슨 결심을 했길래..'


무엇이 디아나를 그렇게 만들었을지 심히 궁금했지만 확인해볼만한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다면서 디아나가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버렸으니까. 앨리스까지 잡아끌면서 말이다.

등장할 때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방을 빠져나가버리는 디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살짝이지만 황망한 심정을 느끼고 있자니 갑자기 들이닥친 이들 때문에 하던 것을 멈추고 멀뚱멀뚱 눈치만 보고 있던 카트린느가 바닥에 놓여져있던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럼, 나도.."


이만 돌아가볼테니 혹시라도 상태가 나빠지거나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연락을 넣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카트린느가 뽈뽈뽈 방을 빠져나갔다. 최근들어 부쩍 추워진 날씨 때문에 감기환자가 늘어나 바쁘다고 하더니만 저리 서두르는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


그렇게 모처럼  안에 홀로 남겨지나 했더니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문쪽에서 들려온 것은 그것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그에 침대 위에 뉘이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들어와도 좋다고 말하니 누군가 닫혀있던 문을 조심스레 밀어젖혔다.

끼이이익-


건물 외관만큼이나 상당한 연식을 자랑하는 문짝이 밀지  말라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아닌 바이올라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이올라는 마스크를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 얼굴의 태반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이 은근히 귀여웠다.


얼굴을 덮고 있는 게 불편해 죽겠다는 듯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면 자의로 쓴 건 아닌  같은데 말이다.

언니인 바이올렛이 시킨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불편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서도 그것을 끝끝내 고수할 이유가 없으니까.

바이올라가 얼굴 위로 뒤집어 쓰고 있던 것을 벗어던진 것은 그녀를 여기까지 안내해주었던 이가 문을 닫고 방밖으로 물러나고 난 후였다.

"푸하-!"


따지고 보면 고작 천 한 장일뿐인데 답답해서 죽을 뻔 했다는 것처럼 경쾌하게 그것을 벗어던진 바이올라가 이내 얼굴 위로 걱정이라는 감정을 띄워올렸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며 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같아서는 얼른 내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데 내가 끙끙 앓게된 원인이 자신인 것만 같아서 못내 눈치가 보였던 걸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다가오다 말고 자꾸만 멈칫멈칫거리는 바이올라의 모습은 어딘가 디아나를 생각나게 했다.


정확히는 내게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내 눈치를 보는 디아나라고 해야할까.

다만 차이가 있다면 디아나보다 이쪽이 조금 더 사나워 보인다는 정도?


그런 외모를 한채 자꾸만  눈치를 보는 게 솔직히 좀 귀엽게 느껴져서 다시  번 피식하고 웃으니 그제서야 좀 안심이 됐던 모양이다.


날 향해 다가오는 바이올라의 움직임에서 눈치를 보는 듯한 기색이 사라졌다.

"그.. 괜찮아?"

그리고 그게 그녀가 내 앞에 도달하자마자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 말하는 바이올라의 표정은 사정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그녀가 내게 감기를 옮긴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많이.. 아팠다면서."

그 상태로 이어지는 바이올라의 말을 듣고 있자니 다시  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누가 그녀에게 내 근황을 귓뜸해준 것일까.


우리 측에 따로 사람이라도 심어둔 걸까.

제일 가능성이 큰 건 바로 그것이었지만..


주인공 놈이 수작질을 부렸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한창 끙끙 앓고 있는 와중이라면 모를까 한창 시원하게 앓고 나서 몸을 추스리고 있는 중이니만큼 그 화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보였다.


해서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그 대상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황녀 체면에 빈손으로 오긴  그랬는지 바이올라가 챙겨온 게 많았으니까.


'대체 뭘..'


저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거람.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바이올라가 챙겨온 병문안 선물의 규모는 상당했다.

설마 마음만 급해서 감기에 좋다고 알려진 것들은 싹다 긁어모아온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밑천이 싹 털려서 울상을 짓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 눈앞으로 아른거리는  했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아마도..


"저게 다 뭐에요..?"

"아, 이거?"

내가 물어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를 여기까지 안내해주었던 이가 끙끙대며 날라다놓은 것들을 무슨 조약돌 집어들듯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든 바이올라가 다시금 내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챙겨온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이올라가 챙겨온 것들은 대부분이 먹을 것들이었다. 정확히는 감기에 걸렸을 때 먹으면 좋을  같은 것들이랄까.

인종의 다양한만큼이나 민간요법또한 다양한 모양인지 그녀의 손이 바구니 안을 드나들 때마다 정말 별의 별 음식들이 다 튀어나왔다.


개중에는 아무리 나라도 선뜻 입을 가져다 댈 수 없을  같은 기괴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도 있었다.


급한 마음에 챙겨오기는 했는데 자신이 봐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았던 모양이다.


내가 헛웃음과 함께 바이올라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런  기색을 알아차린 그녀가 그것을 다시금 바구니 안으로 쑤셔넣었다.


그 다음부터는 뭔가를 꺼내더라도 가려서 꺼내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물량이 내 주변을 둘러쌌다.


"어, 음.."

설마 이걸 다 먹으라는 건 아니겠지.


이걸 다 먹게 되면 없던 병도 생길  같은데..


스스로가 보기에도 양이 좀 많아보이긴 했는지 바이올라의 얼굴 위에는 어느새 멋쩍어하는 기색이 맺혀있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던 것도 잠시, 이것만큼은 꼭 먹여야겠다고 생각한 걸까.

자기 손으로 늘어놓은 것들을 눈으로 쭈르르 훑던 바이올라가 이내 그 사이에 놓여져있던 그릇 하나를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대체 안에 뭐가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입구 부분이 아주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릇과 뚜껑의 틈 사이로 손톱을 쑤셔넣어 아무렇지도 않게 뚜껑을 딴 바이올라가 그것을 대충 바구니 안에 쑤셔넣고는 대신 자그마한 숟가락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그대로 내 손에다가 쥐어주었다.


얼떨결에 그녀가 건네주는 것을 움켜쥐게  손바닥에서 서늘한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그에 슬쩍 시선을 밑으로 내려보니 눈으로 들어온 것은 움푹 파인 그릇 안에 덩그러니 놓여져있는 흰색의 덩어리였다.

정확히는 얼음 덩어리라고 해야할까.


곱게  얼음을 뭉쳐놓은 것 같이 생긴 것이 그릇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샤베트같은 건가 보다.


"목 아프지? 먹으면  괜찮아질거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권유를 해온 바이올라가 이내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또  그러는 걸까.


그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왜 그러는지 대충 알 것도 같았으니까.

혹시라도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해야하나 싶었던 거겠지.


명분이야 있었다.

개인적인 친분과는 별개로 나와 바이올라는 이제 얼마 뒤면 교류전에서 맞붙게될지도 모르는 사이니까.

그런 상황에서 음식을 권유받은 셈이니 그걸 넙죽 받아먹는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지.


그 점을 고려하면 거절하는 게 맞긴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건네준 숟가락을 집어들어 그릇 안에 담겨있던 것을 푹 떴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리고는 바이올라를 상대로 신경써줘서 고맙다는 뉘앙스의 감사를 건넨 뒤 떠낸 것이 소복하게 담겨있는 숟가락을 그대로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렇게 입 안으로 안착한 것에서는 요거트를 생각나게 하는 맛이 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나는 요거트 아이스크림보다는 우유 맛을 선호하는 편이니까.


그렇지만 아직 붓기가 채 다 가시지 않은 목에는  마저도 기껍게 느껴져서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렸다.

내심 걱정했던 것하고는 다르게 내가 건네주는대로 넙죽넙죽 잘 먹으니 더 먹여주고 싶었나 보다.


바이올라가 건네준 그릇을 깔끔하게 비워서 그녀에게 돌려주니 그녀가 다음으로 건네온 것은 입에 대고 빨아먹기 좋게 만든 구조의 주머니였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순간 손끝으로 와서 닿은 것은 젤리의 감촉과 흡사한 물컹거림이었다.


이번에는 또 뭘까.


궁금한 마음에 주머니를 움켜쥐고 있던 손에 슬쩍 힘을 주니 미리 뚜껑을 제거해 두었던 입구 쪽에서 파란색의 젤리같은 것이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왠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색이었고, 그렇기에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왜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는지를.

'잠깐만 이거 설마..'


아니겠지?


그런 내 속내를 아는 지 모르는지 바이올라는 그게 감기에는 직빵이라면서 내게 그걸 권하기 바빴다.


그녀의 성의를 봐서라도 먹어주고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그래서 스리슬쩍 화제전환을 시도했다.


"아, 혹시.."

"응? 뭐 물어볼 거라도 있어?"

있긴 있다.


게스메리움인지 뭔지 하는 풀에 대해 물어보기로 결정한지 오래니까.

다만 다짜고짜 묻기는  그래서.. 한 번 돌아서 가기로 했다.

카트린느를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고 은근슬쩍 권유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실력 좋은 약사인만큼 어쩌면 바이올렛의 코와 관련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한 번 만나보는게 좋지 않겠냐고 물어봤는데..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건 내심 예상하고 있던 것하고는 많이 달랐다.

살짝 찡그려지는 얼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흠칫한 순간 귓가로 울려퍼진 건..

"너도 역시.. 언니가 좋은 거야?"


나로서는 생각치도 못했던 한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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