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교국 측의 높으신 분들하고 만나러 다닌다고 하루가 멀다하고 바쁘게 돌아다니시던 분이 여긴 또 어쩐 일로 방문하신 걸까.
솔직히 얼떨떨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만큼 생각치도 못했던 방문이었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선 게 그녀가 아니라 다른 이였다면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차 들렸구나라고 생각하고 넘겼을 거다. 이전까지는 나와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고 해도 이 기회에 얼굴도 틀겸 들릴 수도 있는 거니까.
그렇지만 지금 방 안으로 들어선 이는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넘길 수 없는 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측 책임자라는 자리에 앉아있는 이였으니까.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이가 단순히 병문안만을 위해서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이곳까지 몸소 왕림했을까?
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할 것이다.
내 위치는 나름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위치니 말이다.
일단 교류전에 참가하는 이들 중 한 명일 뿐만 아니라 전쟁영웅이라는 호칭을 버젓이 달고 있는 클레어의 제자니까. 외무대신 입장에서는 이 기회를 빌어 호감을 얻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계산이 섰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힘들 때 내밀어진 도움의 손길은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듯 아플 때 건네지는 따뜻한 한 마디는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법이다.
외무대신 입장에서는 잠깐 들려서 몇 마디 하는 것만으로 나라는 존재와 안면을 틀 수 있다면 굳이 그걸 사양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들여야하는 공에 비해 돌아오는게 몇 배는 클테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교류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기사 부문의 일각을 담당하는 내가 컨디션 난조를 보이는 것도 여러모로 마음에 걸렸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겸사겸사 들린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명색이 교류전인만큼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가 예정되어 있지만 개중에서도 핵심이자 가장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기사 부문이었다.
해당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다른 분야와는 달리 과정도 결과도 직관적인 기사 부문인만큼 그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구경하기 가장 좋은 종목이라고 해야할까.
뿐만 아니라 자존심의 논리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어느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그게 대부분이었다.
오죽하면 다른 분야에서는 다 이겨도 기사 부문에서 져버리면 이기더라도 이긴 게 아닐 것 같다는 말과 다른 분야에서는 다 지더라도 기사 부문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
단순히 인솔역으로 따라붙은 이들만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 참가자로서 이름을 올린 이들마저 그렇게 말하고 다닐 정도니 그것만으로도 기사 부문에 쏟아지는 관심의 정도를 알 수 있었다.
그런만큼 기사 부문은 어느덧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 되는 종목이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헌데 거기에 참가해서 한축을 담당하기로 한 놈이 건강하게 뛰어다니지는 못할 망정 침대에 드러누워 골골대고 있으니 이 무리의 책임자 역할을 맡은 외무대신으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방 안으로 들어온 외무대신의 손에는 건강에 매우 좋을 것 같은 음료가 담긴 병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자그마한 상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나와 찰싹 붙어있던 모습을 외무대신이 보지는 않았을지 신경이 쓰였던 걸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황급히 몸을 떨어뜨렸던 카트린느가 제 몸을 조금 더 뒤로 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연스럽게 방 안을 가로질러 침대 앞까지 도달한 외무대신이 들고 있던 것을 내 머리맡에다가 올려놓았다. 위치선정이 어찌나 절묘한지 자신이 가져온 걸 확인해보라고 압박이라도 넣는 듯 했다.
명색이 우리 쪽 책임자인만큼 드러누워서 맞이하기에는 좀 눈치가 보였기에 몸을 일으켜보려고 했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몸이 따라주질 않더라.
'하긴..'
뭐든 마음먹은대로 된다면 내가 이 세계까지 굴러들어오는 일도 없었겠지.
다행히도 외무대신은 그런 내 무례를 이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뿐만아니라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몸을 일으키려는 날 손까지 뻗어가며 만류했다.
거기까지만 봤다면 꼬장꼬장하고 신경질적일 것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은근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거다. 아니, '했을거다.'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다.
날 향해 내려꽂히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담겨있는 못마땅함이라는 감정을 캐치한 순간 언제 그런 생각을 했었냐는 듯 그대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지만.
그랬다.
외무대신은 날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듯 했다. 그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놀라운 건 그게 숨긴다고 숨긴 것 같다는 점이었다.
숨겼음에도 저 정도로 새어나올 정도라면 대체 나라는 존재를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까.
그것부터 시작해서 그토록 못마땅하게 여기는 날 찾아온 진짜 이유가 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단은 입을 꾹 다무는 쪽을 택했다. 원래 미운 놈이 나불거리면 더 미워보이는 법이니까.
그렇게 입을 꾹 닫고 있자니 누워있는 날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한 차례 쭉 훑어본 외무대신이 그것을 그대로 카트린느를 향해 돌렸다. 갑자기 자신 쪽으로 돌아온 외무대신의 시선 때문에 순간적으로 철렁했던 걸까. 외무대신이 등장하고 난 후부터 줄곧 엉거주춤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카트린느의 어깨가 움찔하고 튀었다.
그저 바라만 보았을 뿐인데 도둑이 제발이라도 저리는 것마냥 상당히 격한 반응을 보여주는 카트린느의 모습에서 의아한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다.
희한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카트린느를 향해 날아가 꽂혔다.
그런 식으로 의도치 않게 카트린느를 상대로 적잖은 압박감을 선물해주던 외무대신이 입을 연 것은 약 1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였다.
"카트린느 선생?"
다만 그렇게 열린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발언이 나로서는 말 그대로 생각치도 못했던 형태라 순간적으로 살짝 위험하긴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술 사이에서 푸훗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올 뻔 했으니까.
가뜩이나 날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인간을 상대로 그런 식으로 웃어보였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덕분에 순간적으로 철렁했던 것을 추스리고 있자니 자길 부르는 외무대신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카트린느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옙!"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말이다.
그 모습을 목도한 순간 이마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싶다는 욕망이 확 솟아올라서 그걸 참아내는 것이 꽤나 고역이었다.
이건 뭐, 나랑 엄한 짓을 하고 있었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저게 대체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나조차도 어색하다고 느낀 것을 일평생을 외교관이라는 능구렁이들을 상대하며 보낸 외무대신의 눈에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까 전부터 외무대신의 눈동자 속에 서려있던 의아해하는 기색이 카트린느의 대답을 전후로 확 증폭되었으니까.
허나 그녀는 그것의 해명대신 다른 쪽을 선택했다.
"이안 군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 나은 건가요?"
내 상태를 확인하는 것 말이다.
정중한 말투도 그렇고 나름대로 걱정이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는 목소리도 그렇고 그 두 개만 따로 떼놓고 보면 정말로 내 몸 상태를 걱정해서 그러는 거라고 착각하기에 충분했지만, 나로서는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날 그토록 못마땅하게 여기던 양반이 내 몸 상태는 왜 자꾸 확인하나 싶었으니까.
혹시 뭐, 이 건으로 인해 내가 교류전에 참가하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라도 됐던 걸까.
'아니면..'
미리 대타라도 준비해놓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겠냐만은 지금 당장 준비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긴 했다. 대신 그렇게 데려온 대타는 피로를 잔뜩 머금은채로 이곳에 도착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아파서 제 몸도 못 가누는 쪽보다야 그 편이 확실히 낫기는 하겠지만은..
'내가 못 미더운가 보네..'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외무대신 입장에서 보면 나는 얘가 대체 어떻게 선발전을 통과해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는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을테니까. 일단 남자인데다가 몸도 저래가지고 힘이나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가녀리다 못해 허약해보일테니 말이다. 어쩌면 내가 클레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운에 기대서 선발전을 통과헀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거라면야 그녀가 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이해가 갔다.
말했다시피 기사 부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져서는 안 되는 분야인데 거기에 참가하겠답시고 이름을 올린 놈이 1인분은 커녕 인분 역할만 할 것처럼 보이니 외무대신 입장에서는 속이 쓰리다 못해 욱씬거리겠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외무대신은 제게 던져진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카트린느를 상대로 똑같은 내용의 질문을 반복해서 내뱉었다.
얼른 대답하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네, 뭐.. 일단 열은 다 내리긴 했습니다만."
카트린느 입장에서는 열은 다 내렸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앞부분만 들은 외무대신이 끼어들어 지 혼자서 결론을 지어버리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그랬겠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는 괜찮다는 말이군요."
"예.."
"잘됐네요."
잘됐다니?
대체 뭐가 잘됐단 말인가.
카트린느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살짝 얼떨떨한 표정을 한채 외무대신의 말에 긍정을 표하던 그녀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외무대신은 이제 그쪽한테 볼 일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카트린느 쪽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가차없이 떼어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대로 내쪽을 향해 날려보냈다.
"힘들겠지만 지금부터 손님맞을 준비를 좀 해주겠나?"
"..네?"
손님이라니 이렇게 갑자기?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누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린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긴 했다. 그와 함께 따라붙은 것은 의아함이었다.
외무대신이 말한 손님과 방금 내 머릿속으로 떠오른 이가 동일인이라고 쳐도 그녀가 대체 어떠한 경위로 내 소식을 전해들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해서 의아함을 느끼고 있자니 이어진 외무대신의 말이 그런 내 의구심에 방점을 찍어주었다.
"자네가 아프다는 소식을 어떻게 전해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국 측에서 공식적인 요청이 들어왔네."
"..아, 예."
"쉽게 말해 자네 병문안을 오고 싶다더군."
사정을 설명하며 날 지그시 내려다보는 외무대신의 시선에는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개중에는 그 잠깐 사이에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황녀가 직접 병문안을 오게할 정도의 친분을 쌓았는지 의아해하는 감정도 있었고, 살짝이지만 혹시 모를 경우를 의심하는 듯한 기색도 포함되어 있었다.
'설마 날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도..'
내가 황녀들한테 찰싹 달라붙어서 이쪽의 정보를 유출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면 그냥 지조도 없는 제국 년들한테 알랑거리고 다닌 것 같아서 못마땅한 건가?
아무튼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그런 내 대답을 확인한 외무대신이 그럼 얼른 준비를 시작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방을 떠나갔다.
덕분에 팔자에도 없었던 손님맞을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생각치도 못했던 이득을 본 것은 다름아닌 카트린느였다.
힘이 쪽 빠져서 흐느적대는 몸을 나 혼자서는 가눌 수가 없는 탓에 도움을 받는 건 필연적이었으니까.
해서 준비하는 걸 도와달라고 말하니 카트린느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린느가 도와주기로 했다고 해서 본격적으로 뭔가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내 몸 상태가 시궁창이었으니까.
그리고 뭣보다 찾아오기로 한 이가 바이올라지 않은가.
완벽하게 준비를 끝마친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살짝 초췌해보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쪽이 효과는 더 좋을 거다.
해서 반쯤은 일부러 대충 준비를 끝마치니 거울 위로 비춰지기 시작한 것은 딱 내가 원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쉽게 말해 실컷 앓다가 막 일어난 모습이라고 해야할까.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보며 내심 흡족하게 웃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똑똑-
이제 자신은 돌아가보겠다는 듯 풀어놓은 짐들을 주섬주섬 챙겨드는 카트린느를 돕고 있으니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나와 카트린느 사이를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