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84)화 (183/366)



〈 18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어디선가 후다닥 도망치는 소리가 들려오길래 그제서야 감고 있던 눈을 떠보니 눈으로 들어온 것은 그 잠깐 사이에 멀찌감치 도망쳐서 딴청을 피우고 있는 디아나와 그런 디아나를 굉장히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앨리스였다.

꼭 마치 아무도 모르게 야한 짓을 하려다가 딱 걸린 사람과 얼떨결에  현장을 덮치게  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묘한 분위기가 둘 사이에서 흐르고 있었다.

제게 쏟아지는 시선의 압박감을 견디기 힘들었던 걸까. 엉겁결에 집어간 물병을 꼬옥하고 움켜쥔채 애꿏은 눈동자만 데록데록 굴리고 있던 디아나가 마침내 입을 열어 내뱉은 것은..

"와, 왔어?"

차라리  내뱉으니만 못한 것이었다.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은 직후에 본인도  사실을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어..'하고 살짝 얼빠진 듯한 음성이 분홍빛 입술을 뚫고 흘러나오더니 간신히 갈피를 잡는데 성공했던 디아나의 눈동자가 다시금 사방을 헤메기 시작했다.


이제 막 도착한 탓에 중요한 장면들은 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디아나의 모습이 우습게 보이긴 했나 보다.

디아나를 향해 대체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을 던져대고 있던 앨리스의 입에서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오더니 그녀가 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손에 쥔 약병을 보란듯이 흔들어보이며 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물어본다고 해서 알려줄  같지도 않으니 당장 급한 쪽에 신경을 쓰기로 한 모양.

"자, 약 먹어야지~?"

어느새 내 앞까지 도달한 앨리스가 움켜쥐고 있던 병의 뚜껑을 땄다.


뽕-하고 경쾌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방 안으로 울려퍼졌다. 그리고  뒤로 따라붙은 것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강렬하기 그지없는 냄새였다. 덕분에 알게 되었다. 냄새가 진득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의원에서 흔히 날법한 냄새를 한데 모아다가 농축시킨 것 같은 강렬하기 그지없는 냄새가 코를 콕콕 찔러대는데 그걸 어떻게든 떨쳐내보려고 해도 생각대로 되질 않았다. 냄새가  콧속에 찰싹 들러붙은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덕분에 살짝이지만 두려워졌다.

냄새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저걸 실제로  안에 때려붓게 되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동자를 살짝 떨고 있었던 모양이다.

"특별히 효과 좋은 것들로만 엄선해서 넣은 탓에 많이 쓰긴 하겠지만 일단 먹어두기만 하면 순식간에 싹 나을 거래."

날 안심시키려는 듯 앨리스가 약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지만, 솔직히 전혀 안심이 되질 않았다.

많이 쓸 거라는 말만이 자꾸만 귀에서 맴돌았으니까.

카트린느가 쓰다고 따로 덧붙이기까지 할 정도라면 저건 대체..

나름대로 그 맛을 상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해보려고 했지만, 앨리스는 내게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아~'하고 입을 벌려보려는 음성과 함께 뚜껑이 제거된 병이  입가를 향해 들이밀어지기 시작했으니까.

저항을 해보자니 몸에 힘이 한톨도 없었다.


덕분에 팔이 무슨 쇳덩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약병은 시시각각 내 입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그걸 마시는  내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윽고 입술과 맞닿은 약병이 천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병 안을 채우고 있던 액체또한 천천히 기울어졌다.


그렇게 기울어지던 것이 병 입구를 타고 넘어와 마침내 내 혀끝에 닿은 순간..

정신이 그대로 날아가버렸다.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만큼 끔찍한 맛이었다.

이제는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개같았던 1회차 때는 바닥을 박박 구르면서 정말 별의 별 것들을 다 집어먹고 다녔던만큼 내심 혀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맛의 한계까지 경험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방금 혀끝에서 느껴진 건 1회차 때 느꼈던 것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어찌나 강렬한지 혀가 마비라도 된 것처럼 첫만남 이후로는 맛이 아예 안 느껴질 정도였다.

병 안에  걸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입 안에다가 털어낼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었다. 아마 맛이 계속 느껴졌다면 다 마시기도 전에 기절하지 않았을까.


강렬한 맛 만큼이나 효과또한 강렬한지 약은 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배 안쪽에서부터 후끈후끈한 감각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것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으니까. 덕분에 아까 전부터 날 괴롭히던 오한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찜질방에 들어온 것만같은 감각이 날 꼬옥하고 감싸안는  느낄  있었다.

그 급격한 변화가 영 적응이 되질 않아서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더니 써서 그런 거라고 본 것인지 앨리스가 주머니 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그러더니 그걸 내 입 안에다가 쏘옥하고 넣어주었다.


약을 마신 후로 마비라도  것마냥 얼얼한 느낌만 올라오던 혀끝을 타고 달큰한 맛이 올라오기 시작했던 건 그때부터였다.

"자, 이제 한숨 푹 자면 괜찮아질거야."


그리 말한 앨리스가 내 몸을 슬쩍 떠밀어 다시 침대 위로 뉘였다.

식은땀으로 푹 절은 내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모양인지 날 침대 위에 뉘인 그녀가 어디선가 꺼내든 깨끗한 천을 이용해 내 얼굴과 목덜미에 살살살살 닦아냈다.


땀이 사라진 자리를 서늘한 공기가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아서 얼굴 위로 미소를 띄워보이니 쓸모를 다한 천을 다시금  주머니 안으로 밀어넣은 앨리스가 내 이마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디아나는 어느새 그런 앨리스의 뒷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제가 수행하던 역할을 보는 앞에서 홀라당 빼앗겨버린 것이 꽤나 원통했던 모양이다.


디아나의 주둥이는 오리 주둥이마냥 삐죽하고 튀어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은 환자 앞에서 부산을 떨기가 좀 그래서 그랬던 것이겠지.

그렇게 대충 하루를 꼬박 침대에만 누워있었던 것 같다.


정신없이 자다가 깨는 걸 몇 번이고 반복했다.  번은 땀에  절은 몸을 조심스레 닦아내는 손길을 느끼고 깨어난 적도 있었다.

확실히 앨리스, 아니 카트린느의 설명대로였다.

효과 하나만큼은 끝내줬으니까.

며칠에 걸쳐서 아플 것을 하루에 몰아서 앓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덕분에 몸에 힘이 돌아올 겨를이 없었다.


반건조 오징어를 물에다가 넣고 꼬박 하루를 불린 것을 언젠가 본적이 있는데 지금  몸이 그렇게 된  같았다.

내가 잠들어있는 사이에 누군가 몰래 온몸의 뼈를 발라내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흐느적거렸다.


그래서 굳이 일어나려 하지 않고 침대 위에 누워서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앞으로 처리해야할 것들을 정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니까.


'일단 가장 시급한 건..'

역시 주인공 놈과 관련된 것이겠지.


그 게스마려움인제 게스메리움인지 하는 풀떼기가 어디다가 쓰는 건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모처럼 발견한 단서일 확률이 높아보이는 것을 이대로 순순히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포인트는 역시 누굴 찾아가서 물어보느냐겠지.


아무나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혹시라도 내가 그것에 대해 알아보고 다녔다는 사실이 주인공 놈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놈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가 없으니까.

고로 물어보더라도 주인공 놈과 이렇다할 접점이 없는 이를 찾아갈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그 조건을 만족하면서도 약초같은 것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을만한 이가 과연 누구냐는 건데..


대충이나마 조건이 확정된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면면들이 몇 개 있었지만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그리고 지우는 김에 아예 왕국에 소속된 이들을 모조리 명단에서 지워버렸다.

그러자 남겨진 건  둘 뿐이었다.

바이올라와 바이올렛.

그 중에서도 내 선택을 받은 쪽은 다름아닌 바이올라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이올라가 약초에 대해 잘 알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앞에 가서 혹시 게스메리움이라는 풀에 대해 아는  있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건 그게 뭐냐는 반응일 가능성이 크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녀를 선택한 것은 딱히 몰라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내게 잘 보이기 위해 안달이  그녀라면 굳이 내가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알아본 다음에 내게 알려주려할테니 말이다.


'그건 그렇게 해결한다 치고..'

당장 할 수 있는 건 뭘까.

바로 생각나는 건 하나였다. 냄새를 맡지 못하는 바이올렛의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을만한 수단을 마련하는 것 말이다.


마침 타이밍도 괜찮았다.


아까 들렸던 앨리스가 말하기를 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카트린느가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으니까.


이왕 감기에 걸린 김에 그 핑계를 대며 비염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틀어막힌 것 같았던 바이올렛의 코를  뚫어줄만한 물건을 마련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슬슬 올 때가 된 것도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이안~? 자~?"

그리 묻는 목소리의 주인은 말할 것도 없이 카트린느였다.


이불에 감싸여 땀을 쭉 빼는 사이에 목의 붓기도 가라앉은 것인지 약을 먹기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목의 상태를 느끼며 카트린느의 물음에 답했다.

마침 일어나 있었다는 내 대답에 카트린느가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제법 묵직해보이는 가방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내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해 효과가 있을만한 것들을  다 챙겨오기라도 한 모양이다. 저렇게 두 손으로 들고도 낑낑대는 걸 보면.

힘겹게 걸음을 옮겨 몇 시간 전에 디아나가 가져다놓은 간병용 의자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한 카트린느가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때? 좀 괜찮아졌어?"

그와 함께 날아든 것은 걱정이 그득하게 담겨있는 목소리였다.


슬슬 환절기라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갑자기 환자가 확 늘어난 바람에 더 일찍 찾아오지 못했다며 내게 사과의 말을 건넨 카트린느가 곧장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기본적으로 차가운 편인 그녀의 손에 가을 특유의 서늘한 공기까지 듬뿍 묻어있어서 느낌이 꽤 좋았다.


"흠, 열은 확실히 내린  같은데.."

그래도 손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던 걸까.

내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떼어내어 제 이마에도 대보고 하던 그녀가 이내 들고 온 가방을 향해 눈을 돌렸다. 보아하니 체온계같은 거라도 따로 챙겨온 모양인데..


그걸 꺼내들기 위함인지 그쪽을 향해 조심스레 몸을 기울이던 카트린느가 그대로 멈칫했다.

그러더니 누가봐도 즉석에서 지어낸 거짓말이라는 걸 알  있을 정도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한채 체온계를 깜빡 놓고 왔다는 말을 입에 담는 게 아닌가.

그걸 지적할 기력도, 이유도 없어서 잠자코 있었더니 내게 양해를 구하듯 '잠깐만..'이라고 내뱉은 카트린느가 이내  향해 몸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설마..'


드디어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린 걸까.


그래서 이참에 저질러 버리려는 것이고?

'아, 그러고 보니까..'

약 먹고 쳐 잔다고 매일 챙겨먹던 그걸 빼먹었구나.

그런 거라면 카트린느가 답지 않게 과감해진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자는 동안 땀을 쭉 뺀 탓에 지금의 나는 누워있는 페로몬 덩어리나 다름없을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카트린느의 얼굴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에 충돌을 대비하여 눈을 질끈하고 감은 순간, 느껴진 감촉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것하고는 살짝 달랐다.


그것이 느껴진 위치또한 예상했던 곳하고는 달랐고 말이다.


 입술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뭔가가 와서 닿은 곳은 입술이 아닌 이마 쪽이었다.

그에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떠보니 눈으로 들어온 건 눈을 꼬옥하고 감은 채 내 이마에  이마를 가져다대고 있는 카트린느의 모습이었다.

따지고 보면 정말  것도 아닌 행동인데 둘다 맨정신인 상태에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게 카트린느한테는 엄청나게 민망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눈으로 들어온 카트린느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봤다면 아픈  내가 아니라 카트린느라고 착각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내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카트린느를 내게서 떨어뜨린 건..

"어떻습니까? 좀 괜찮아졌습니까?"


생각치도 못했던 방문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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