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꼭 마치 엄청나게 차가운 얼음조각이 등골을 타고 쭉 미끄러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귓가로 울려퍼진 목소리가 너무나도 서늘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그만큼 생각치도 못했던 일격이기도 했다. 욕실 안에 샴푸같은게 따로 비치되어 있었긴 했지만 혹시 몰라 그걸 쓰지 않고 물로만 헹궜었는데 말이다.
그런만큼 당연히 특별한 냄새가 날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의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앨리스는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걸까.
놀란 마음을 추스리고 머릿속에 눌러앉은 의문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시간같은 건 없었다.
대답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앨리스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고, 솔직히 말해 지금도 충분히 늦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네?"
그녀의 가슴골 사이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떼어내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웅얼거리듯 반문했던 건 그래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최선이었다. 놀란 마음에 표정까지 바꿀 겨를은 없었으니까. 얼굴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으로 잠이 들락말락한 척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웅얼웅얼대듯 말하면서 그런 내 노력이 부디 빛을 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 내 기도가 아예 효과가 없지는 않았나 보다.
"머리에 물기가 남아있길래."
그래서 한 번 물어본 거라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가 곧장 내 귓가로 울려퍼졌으니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몸을 헹군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머리에 물기가 남아있단 말인가.
그게 내 솔직한 본심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부정한들 내게 좋을 게 딱히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요?"
해서 그러냐는 식으로 나름 태연하게 받아치니 앨리스가 다시금 내 머리에 대고 제 턱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대충 말려서 평소보다 부스스한 느낌이 강한 내 머리가 턱을 스치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던걸까. 그 뒤로도 그녀는 한참동안을 그러고 있었다. 전과는 다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이다.
덕분에 안심해도 괜찮은 상황이 되었지만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이러다가 갑자기 훅 찌르고 들어올 수도 있는 거니까.
내가 긴장하건 말건 앨리스는 태연했다. 너무 태연해서 사람 다리에 대고 제 몸을 비벼대는 고양이가 생각날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날 품에 안은 채 그러고 있던 앨리스가 이내 한 마디를 더 내놓았다.
"머리 말이야."
"..네?"
"말리고 자는 게 좋지 않을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굳이?'
말이다.
그런 내 기색이 날 껴안고 있던 앨리스한테까지 전해졌나 보다.
"감기걸릴 수도 있잖아."
그녀가 꿍얼꿍얼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이렇게 꼭 껴안은채 상대방의 온기를 만끽하고 있자니 그녀도 슬슬 잠기운이 몰려오기 시작한 모양.
굳이 그걸 깨뜨릴 필요성을 느끼질 못해서 그녀와 비슷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설마요."
"그렇다면야 뭐.."
더 이야기하기 귀찮았던 모양이다.
그 웅얼거림을 마지막으로 앨리스가 내 몸을 꼬옥하고 끌어안았다. 어제나 빈틈없이 끌어안는지 순간적으로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였다.
그렇게 앨리스의 품 안에 포옥하고 안긴 채 까무룩 잠이 들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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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마자 깨달았다.
'와, 시발 이게 걸리네..'
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얼굴에 누가 뭐라도 올려놓은 것마냥 얼굴 전체가 뜨끈뜨끈했다. 그보다 더 뜨거운 곳이 있다면 바로 목 안쪽이었다. 엄청나게 뜨거운 뭔가를 억지로 삼켜버린 바람에 온통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목 안쪽이 퉁퉁 부은 게 느껴졌다. 어찌나 세게 부었는지 입 안에 고여있던 침을 살짝 삼킨 것만으로도 따끔따끔한 감각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렇게 목도, 얼굴도 뜨끈뜨끈한데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건 추위였다.
한겨울에 맨몸으로 바깥으로 쫓겨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으슬으슬 떨렸다.
해서 주변을 더듬어 앨리스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잠들 때처럼 그녀의 몸을 꼭 껴안아 온기를 나눠받으면 그나마 좀 이 추위가 가실 것 같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열심히 주변을 더듬거려봤지만 안타깝게도 손에 걸리는 건 없었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건 나 혼자였다.
앨리스는 어디로 간 걸까.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눈까지 따끔따끔거리는 것 같아서 선뜻 눈을 뜨기가 좀 그랬다.
불편하다는 느낌을 한 번 자각하니 모든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옆으로 돌아누운 자세마저도 그랬다.
그래서 살짝 몸을 돌려 몸을 편하게 뉘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뒤로 이어진 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듯한 발자국 소리였다.
고요하던 방 안으로 나지막하게 울려퍼지는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방 안으로 들어온 이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해서 여전히 따끔따끔거리는 눈을 억지로 떠보려 하니 어느새 내 옆까지 다가온 이가 제 손으로 내 눈두덩 위를 덮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건물 밖을 돌아다니다가 오기라도 한 모양이다. 눈두덩 위를 덮은 손에 가을 공기 특유의 서늘함이 묻어있었다.
얼굴을 덮은 손을 통해 전해져오는 그 서늘함이 너무나도 기껍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얼굴이 홧홧거리던 참이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그 느낌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대체 누가 찾아온 걸까.
얼굴과 맞닿아있는 손으로부터 굳은살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으로 봐선 일단 카트린느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남은 셋 중에 누구일지 궁금해하고 있자니 그런 내 기색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지 모를 이가 입을 열어 스스로의 정체를 밝혔다.
"이안? 괜찮아?"
여전히 내 눈 위를 덮고 있는 손의 주인은 다름아닌 디아나였다.
그렇다면 앨리스는 어디로 간 걸까.
그건 곧 알 수 있었다.
"조금만 참아. 앨리스가 약을 가지러 갔으니까.."
앨리스가 가져오는 걸 먹고 나면 힘든 것도 한결 나아질 거라며 날 다독이는 디아나의 말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앨리스를 대신해 디아나가 내 옆을 지키게 된 경위를 말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약을 타오는 동안 아픈 날 혼자 두는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설마 다른 이도 아니고 디아나한테 조력을 요청할 줄이야.
그 사실이 살짝 놀랍긴 했지만, 놀랄 기력도 없어서 속으로만 허허로이 웃고 있자니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나 보다.
여전히 서늘함을 간직한채 내 눈 주위를 딱 좋은 온도로 식혀주고 있던 디아나의 손이 떨어져나가더니 그것이 그대로 내 얼굴을 쓰다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눈 주위가 다시금 뜨거워지기 시작했지만, 기분 자체는 썩 나쁘지 않았다. 조심스레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 덕분에 한결 안심이 됐으니까.
마음이 놓이니 바로 조금 전까지는 통증에 가려져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살아났다.
개중에서 가장 크게 도드라진 것은 갈증이었다.
목 안이 까끌까끌한 것이 물을 마시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물.."
팅팅 부어서 말하는 것조차 쉽지 않게 느껴지는 목을 쥐어짜내 그것을 부탁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 내 요청은 무사히 디아나에게 전달되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목이 대체 얼마나 부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짧은 한 마디를 내뱉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장난 아니어서 두 번은 못 할 것 같았으니까.
"물? 잠시만.."
그런 것쯤이야 바로 가져다 주겠다는 듯 그녀가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부스럭대는 소리를 사방으로 퍼뜨리며 방을 빠져나갔다.
그랬던 그녀가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온 것은 속으로 대충 스물까지 헤아리고 난 후였다.
순식간에 내 옆으로 돌아온 디아나가 침대 옆에 자리한 자그마한 서랍장 위에 뭔가를 올려놓기라도 한 것인지 그쪽에서부터 탁하고 뭔가를 내려놓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몸을 잡아당기는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내게 물을 먹이기 위해 날 일으켜 세우려는 모양인데 솔직히 일어서고 싶지가 않았다.
몸이 꼭 물먹은 솜으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축축 늘어진다고 해야할까. 내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등뒤로 손까지 밀어넣어 날 일으켜 세우려 하던 디아나가 내게서 손을 떼어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 걸까.
눕힌 상태로 먹이긴 힘들텐데 말이다.
디아나의 대응을 궁금해하고 있자니 어디선가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액체로 촉촉하게 젖은 말캉한 것이 입술을 꾸욱하고 짓누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게는 그게 꼭 노크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른 닫아놓은 걸 열어달라고 말이다.
해서 조심스레 입술을 벌리니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디아나가 내게 입을 맞춰왔다. 그와 함께 그녀의 입 안에 머금어져 있던 것들이 내 입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디아나의 입을 한 번 거쳤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살짝 미지근하게 느껴지는 액체가 바짝 말라있던 입 안을 적셨다.
그것이 입 안을 완전히 채우기 전에 조심스레 목구멍 안으로 흘려보냈다.
쉽지만은 않았다.
물을 삼킬 때마다 팅팅 부은 목에서 따끔따끔한 감각이 올라왔으니까.
그럼에도 디아나가 건네주는 것을 받아마시는 걸 멈추지 않고 있으니 입 안에 머금었던 것이 다 떨어졌는지 그녀가 붙이고 있던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렇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다시 입을 맞춰왔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그러고 있자니 날 괴롭히던 갈증이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해서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뜻으로 내게 찰싹 달라붙어있던 디아나의 어깨를 찰싹찰싹 두들겼다.
갈증을 해결해준 건 고맙지만 슬슬 숨이 막히기 시작했으니까.
아무래도 상당히 독한 놈한테 걸려버린 것 같았다. 보통은 코가 막히더라도 한쪽만 막히기 마련인데 지금 내 몸에 깃든 놈은 어느 한쪽을 가리지 않고 양쪽 모두를 틀어막아 버렸으니까.
'죽겠네 진짜..'
코로 숨을 들이키려고 해봐도 뭔가 턱턱 막히는 느낌만 드는 것이 그렇게 답답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내 몸짓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디아나가 순순히 떨어져 준 덕분에 다시 입으로 숨을 쉴 수가 있게 되긴 했지만 입만으로 숨을 쉬자니 숨을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많이 답답해?"
숨을 잘 못 쉬는 내 모습이 많이 안쓰러웠던 모양인지 그리 물어오는 디아나를 향해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자 조심스레 손을 뻗어온 디아나가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던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서 넘겨주었다.
"괜찮아?"
당장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그런 것하고 괜찮냐고 묻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리도 안타까웠던 걸까. 땅을 꺼뜨릴 기세로 내뱉어진 한숨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걸 듣고 있자니 나까지 다 안타깝게 느껴져서 한숨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디아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이제 좀 괜찮아졌다는 의미기도 했다.
효과가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디아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인 순간부터 귓가로 울려퍼지던 한숨소리가 뚝 멎었으니까.
덕분에 나와 그녀 사이로 내려앉게된 침묵을 깨뜨린 것은 다름아닌 디아나였다.
"그.."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
귓가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그 소리에 속으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조심스럽게 각을 재나 싶었으니까.
궁금해하고 있자니 뒤이어 들려온 것은 상당히 생뚱맞게 느껴지는 제안이었다.
"..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한 건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반문하니 돌아온 건 당황한 듯 허둥지둥대는 기색이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보통 감기는 남한테 옮기면 낫는다고들 하니까.."
차라리 자신한테 옮겨서 비교적 건강한 자신이 대신 앓는 게 여러모로 낫지 않겠느냐-
그것이 디아나가 내게 하려던 말인 것 같았다.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해 버린 바람에 목표한대로 나오지 않은 듯 했고.
순식간에 디아나의 몸을 점령한 당황이라는 감정은 이내 그녀를 폭주하게 만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가 곧장 내게 입을 맞춰왔으니까.
그렇게 내게 착 달라붙어있던 디아나를 내게서 떨어뜨린 것은..
"미안, 많이 힘들었지? 이것만 마시면 이제 괜찮아질.."
약을 들고 돌아온 앨리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