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82)화 (181/366)



〈 18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분위기가 왜 이래?'


그런 생각이  들 수가 없을 정도로 집합 장소의 분위기는 어색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거기에 얼핏보면 하나로 뭉쳐있는 것 같아도 은근히 두 패, 정확히는  무리와 방관자들로 나뉘어 있었고 말이다.

그렇다보니 눈앞으로 펼쳐진 광경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싸웠나?'

그래 그것 말이다.

싸움이라.

싸웠다면 대체 왜 싸운 걸까.

설마 치정문제로 싸운 건 아니겠지.


순간적으로 확 끓어올랐던 관심의 유통기한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언제 뜨겁게 끓어올랐었냐는 듯 곧바로 식어버렸으니까. 저 두 무리 사이에 주인공 놈이 끼어있었다거나 그랬다면 이 정도로 빠르게 식지는 않았을테지만 주인공 놈이 속한 진영은 방관자 쪽이었다. 그렇다보니 관심이 오래갈래야 오래갈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지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기라도 했다면 싸움구경하는 재미로라도 더 관심을 기울였을테지만 그런 것도 없었으니까.


나와 바이올라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아주 죽일 듯 노려보더니만 나와 바이올라가 등장하니 언제 그러고 있었냐는 듯 뿔뿔이 흩어지더라.


아무리 그래도 타국의 황녀쯤 되는  앞에서까지 그러고 있기는 좀 그랬던 모양.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아쉽긴 했다.

원래 제일 재밌는 구경이 싸움구경이고,  중에서도 제일 재밌는게 찌끄레기들 싸움이니까.


아무튼 저들은 황급히 숨겨본다고 숨겨본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바이올라를 상대로는 먹히질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나와 비슷한 타이밍에 그 미묘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눈치챈 상태였으니 말이다. 이제와서 황급히 숨겨본들 의심에 확신만 더해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캐치해낸 바이올라의 선택은 방관하는 것이었다.

타국에 소속된 인간들끼리 싸운 것이니만큼 자신이 함부로 개입해서 좋을  없다고 판단한 걸까.

아니, 이건 그런 느낌보다는 차라리 신경쓰기 귀찮아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바이올렛과의 일때문에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해서 다른 데까지 신경쓰고 싶지 않았던 모양.


그런 바이올라의 소망과는 별개로 그녀는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렇기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서 집합장소에 모인 이들의 시선은 그녀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그 옆에 서 있는 내게까지 그것들이 튄 건 필연적이었다.


그렇게 바이올라를 거쳐 내게 날아들기 시작한 것들이 실시간으로 묘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노골적이어서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는 그 변화를 알아차린 순간 깨달았다. 바이올라의 손에 끌려오느라 잠시 깜빡했던 것을 말이다.

'아, 옷..'

여기 오기 전에 갈아입고 왔어야 했는데 말이다.

지금이라도 갈아입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을 뿐더러 이제와서 허둥지둥 갈아입어봐야 지금 날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 오해를 사게될 가능성이 컸으니까.

'들어오기 전에 미리 손을 놔서 망정이지..'


아까처럼 손을 꼭 잡고 있는 상태였다면 말 그대로 빼박이었을텐데 말이다.


아무튼 이왕 이렇게  김에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살짝 놀란 마음에 살짝 움츠렸던 어깨를 똑바로 펴며 바이올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 떠나기 전에 해야할 말이 있었으니까.

"그.. 제 옷은.."

"아."

바이올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탄성을 들은 순간 깨달았다. 옷에 대한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그녀또한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내 말을 듣고 나서야 그것의 존재를 떠올린 것인지 바이올라가 나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다는 것처럼.


그러더니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주겠다는 말을 잽싸게 덧붙였다.

순순히 돌려주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바이올라는 은근히 아쉬워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내 체향에 푹 빠져있는 그녀에게 있어 내가 입고 있었던 옷은 그 무엇하고도 바꿀  없는 보물이나 다름없을테니까. 내가 그것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꿀꺽하지 않았을까.


왠지 그랬을 것만 같아서 맘 같아서는 가지라고 선뜻 쥐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공식적인 자리인만큼 최대한 차려입는다고 한 벌밖에 없는 기사용 정복을 동원했었으니 말이다. 교류전과 거기에 딸려있는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할 때도 입어야하는 것이니만큼 이대로 바이올라에게 내어주긴 힘들었다.


허둥지둥 날 끌고 올 때는 언제고 막상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코앞까지 다가오니 많이 아쉬웠던 모양이다.

바이올라의 눈썹 끝이  늘어지더니 그대로 여덟 팔 자를 그렸다.

그 상태로 한참동안 입술을 오물대던 바이올라가 간신히 작별의 인사를 건네왔다. 쥐어짜낸 것같은 목소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누가봐도 황녀의 것임이 분명한 제복 상의를 그대로 걸치고 돌아가기는 좀 그랬기에 돌아서기 전에 바이올라가 손수 걸쳐주었던 것을 벗어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는 엉겁결에 내가 내미는 것을 받아든 바이올라를 뒤로한채 무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바이올라와 나란히 서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시선이 몰려드는  느껴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놈들이 자기들이 본 걸 가지고 뭐라고 떠들어대던 간에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으니까.


'돌아가서 뭐라고 할지가 문젠데..'

그보다는 숙소를 떠날 때하고는 다른 복장과 다른 냄새를 풍겨대는 날 보며 눈을 까뒤집을 이들을 상대로 내뱉을 변명을 준비하는  더 시급했다.

아무래도 내가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를 여기까지 안내했던 이가 앞으로 나서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들의 수를 헤아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앞장 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따라 숙소로 돌아오니 그런  맞이한 건 저번과 똑같은 풍경이었다.


아니,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방 안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의 명단에 클레어가 추가되어 있었으니까.


옆에 있는 앨리스의 시선이 꽤나 견디기 힘들었을텐데 여태까지 대체 어떻게 버틴 걸까. 의외라면 의외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덕분에 신기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자니 이번에도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켠 날 향해 달려오던 디아나가  몰골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멈칫했다.


그러더니 엉거주춤하게 멈춰선 자세에서 그대로 눈동자만 움직여  모습을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쭉 훑기 시작했다.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모습이었기에 솔직히 그렇게까지 놀랍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마련해둔 핑계거리까지 있는만큼 더더욱 그랬다.

해서 찔리는 것따위 하나도 없다는 것처럼 그런 그녀를 향해 역으로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자니 옷에 대해 물어온 것은 의외로 디아나가 아닌 앨리스였다.

"희한하게 생긴 옷이네?"


그리고 앨리스의 선택은 직접적인 추궁이 아닌 돌려서 묻기였다.

"아, 이거요? 그쪽에서 받은 거에요."

"그래? 그럼 선물받은 거네. 잘 보관해야겠다."

날 향해 싱긋하고 미소를 지어보이는 앨리스의 얼굴에는 참으로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개중에서도 제일 두드러지는 것은 '언제 선물까지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진거야?'라는 추궁에 가까운 의문이었고.

"아뇨, 선물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그런 그녀를 향해 보란듯이 볼을 긁적거리면서 슬쩍 말끝을 흐려주니 돌아온 건 선물이 아니면 대체 뭐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리 묻는 것 같은 시선이 앨리스 뿐만이 아니라 디아나와 클레어에게서도 날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면서 난감해하는 연기를 이어나갔다.


"그게 실은.. 입고 갔던 게 못 쓰게 되어버렸거든요."


"응? 왜?"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냐고 묻는 듯한 앨리스의 발언에 보란듯이 뭔가를 엎는 듯한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는 내 실수가 아니라 시녀의 실수였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실이 아닌 꾸며낸 말이었지만 확인할 방법은 어차피 없을테니 상관없겠지.


태연하게 변명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건 그러한 믿음 덕분이었다.

물론, 효과또한 나쁘지 않았다.


다들 미심쩍어 하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니까.


뿐만 아니라 클레어 쪽에서도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아무래도 장소가 건물 안이 아니라 온실이다보니 익숙치 않아서 실수를 했나봐요."

"온실?"

"네, 보니까 그쪽에는 자그마한 온실같은 것도 있던데요?"


"그래? 이쪽에서는 못봤던  같은데.."

타이밍 좋게 끼어든 그녀 덕분에 대화 주제는 어느새 온실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래요? 흠.. 훈련장소로 쓰기 좋아보이던데.."


그리고는 정말로  봤냐고 물으니 클레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도착한 첫날 클레어가 훈련할 때 사용할만한 장소를 찾아보겠다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가 보지 못했다는 건 애초에 이쪽에는 그런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온실에 대한 주제를 자연스럽게 '차별'이라는 주제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건 따져봐야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지금 훈련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정원  가운데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처지인데.."

"흐음.."

그렇게까지 말을 했건만 클레어는 썩 내켜하지 않는 눈치였다.


솔직히 좀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하나라고 생각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몸소 설명해주었다. 내가 봤던 온실이라는 장소가 훈련장으로 쓰기에 얼마나 괜찮은 곳이었는지를 말이다.

바깥하고 비교하면 가볍게 입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따뜻할 뿐만 아니라 바닥에는 푹신한 흙까지 깔려있고 주변은 나무들로 적당히 가려져있어서 지금처럼 주변의 시선과 정원이 훼손되는 걸 신경 쓸 필요 없이 마음껏 움직여도 상관없다고 열심히 어필을 하니 클레어 안에 내재되어있는 수련바보로서의 세포가 반응하기 시작한건지 그녀가 귀를 쫑긋쫑긋거리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내 설명을 듣고 혹한 것은 클레어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언급했던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던 것은 디아나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그녀또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중에 둘의 반응이 그러한 가운데 앨리스의 반응은 살짝 미묘했다.


내 말만 들으면 분명 차별이 맞긴 한데 그걸 인정하자니 스스로가 일단은 교국 소속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려서 동조하지도 그렇다고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못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렇게 앨리스가 미묘한 반응을 내보이고 있는 사이에 수련이라는 행위를 사랑해마지 않는 스승과 제자는 어느새 의기투합한 상태였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하냐고 귀찮아하는 반응을 내보일 때는 언제고 클레어는 이건 왕국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결코 참고 넘겨선 안 되는 차별행위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디아나를 상대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가며 맞장구를 쳐대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 건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지고 우리 측 책임자인 외무대신과 따로 이야기를 나눠보겠다면서 살짝 흥분한 디아나를 진정시키는 클레어였다.


클레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건 그 다음이었다.


디아나를 진정시키고는 그대로 끝내버릴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는 말을 실천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클레어가 곧장 외무대신을 찾아가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디아나는 그런 클레어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클레어가 대표로 나서기로 한만큼 그녀를 따라가더라도 딱히  수 있는 건 없을테지만 그래도 클레어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따라가는 편이 나을 거라고 본 모양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클레어의 옆에 달라붙은 디아나가 나와 앨리스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너희들도 참가하는게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물론 받아들이지는 않고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서 거절했다.

나를 데려가지 못한다면 앨리스라도 데려가겠다는 듯 디아나가 즉시 앨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앨리스도 나와 비슷한 핑계를 대며 참가를 거절했다.

설마 여기서 혼자 발을 쏙 빼버릴 거라고는 생각못했던 걸까.

디아나가 참가를 거절한 앨리스를 교활하기 그지없는 생물체를 노려보듯 노려보긴 했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다. 갈 거면 얼른 가자는 클레어의 말에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가버리고 말았으니까.

졸지에 앨리스와 방 안에 단둘이 남겨지게된 상황.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당장 떠오르질 않아서 가만히 침묵하고 있었더니 생각외로 그녀 쪽에서 먼저 손을 뻗어왔다.

"자."


그리 말하며 내 겨드랑이 사이로 제 팔을 끼워넣은 앨리스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뭘 할 생각인 걸까.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지자 돌아온  빙그레 웃는 미소였다.

"피곤하다면서?"

그러고보니 그랬지.

그럼 이건 쉬러가자는 뜻인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해서 순순히 앨리스가 인도하는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앨리스의 품 안에 안긴 채 침대 위로 드러누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무슨 인형이라도 껴안듯 날 제 품안에 가둔 채 내 머리 위에 턱을 올려놓고 있던 앨리스가 제법 뾰족한 그것을 요리조리 움직여대며 내 머리에 대고 비벼대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애교를 부리고 있는 걸까.

덕분에 머리쪽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근질근질한 느낌이 퍽 기꺼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고 있자니..


"샤워도 했나봐?"

섬찟하기 짝이 없는 한 마디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옷만 갈아입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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