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81)화 (180/366)



〈 18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 말한 이유는 간단하다.

바이올렛이 동생과 손을 잡고 날 속이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녀의 본의는 아니었을 거다. 이미 엎질러져버린 물을 수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그렇지만 그녀의 본의가 어찌되건 간에 상황은 이리 되어버렸고, 그렇기에 적어도 나와 바이올라, 그리고 바이올렛 사이에서만큼은 꼬리를 내어준다는 행위는 그리 친하지 않은 사이라 하더라도 흔히 할 수 있는 행동으로 규정된지 오래였다.


그런데 여기서 가져온 게 좀 남은 김에 겸사겸사 그쪽도 좀 관리해주겠다는 내 제안을 거절한다?


'뭐..'

거절이야 할 수 있겠지.

물론, 그리 하려면 그만한 이유를 대는 건 필수겠지만 말이다.

무턱대고 거절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그랬다가 혹시라도 내가 위화감이라도 느껴서 이것저것 알아보려 든다면  속이는데 일조한 바이올렛 입장에서는 그만한 참사도 또 없을테니 말이다.


그러니 아마 지금쯤 속으로는  제안을 거절하더라도 내게 위화감을 심어주지 않을만한 이유를 열심히 찾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나는  했다.

바이올렛의 반응이 소리없이 격렬하다면 그와는 정반대로 요란하게 격렬한 반응을 내보인 이도 있었다.

물론,  누군가란 다름아닌 바이올라였다.


내 뒤에 자리하고 있던 바이올라로부터 꽤나 격렬한 움찔거림이 전해져온건  제안을 들은 바이올렛이 몸을 흠칫거리며 동요를 내보인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라는  발언 후로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다할 움직임일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나서서 끼어들자니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테니까.

혹시라도 자기가 끼어들었다가 내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라도 하면 어쩌지, 그리고 그게 도화선이 되어 기껏 여기까지 쌓아올린 관계가 파토나버리면 어쩌지.

그런 걱정들이 그녀를 안절부절 못 하게 만들고 있나 보다.

초조함이 잔뜩 묻어있는 기척이 이렇게 실시간으로 전해져오는 걸 보면.

혹시라도 내게 들릴세랴 작게 끙끙대기까지 하는 게 퍽 안쓰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안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바이올라가 감당해야할 그녀의 업보였으니까. 그녀가 한 순간의 욕망에 취해서 그런 말도  되는 거짓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해서 뒤쪽에서 전해져오는 기척을 싸그리 무시한채 바이올렛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스스로 쌓은 업보를 감당해야 하는 건 바이올라 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감당해야하는 건 바이올렛또한 마찬가지였다.

동생을 생각하면 마땅히 거절해야만 하는 상황.


거기에 내게 위화감을 심어주어선 안 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듣자마자 내가 납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럴 듯한 핑계가 필요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간이 넉넉하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인데 바이올렛에게는 시간마저 없었다.

그렇기에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저 조막만한 입에서 어떤 핑계가 흘러나올까.

기대감으로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방정맞게 뛰어대는 걸 느끼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더는 답변을 지체해선 안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바이올렛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것은..


"괜찮겠어요? 힘들어보이는데.."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조금만 걸어도 헉헉댈 정도로 체력이 저질이라는  떠올리고서 그런 선택을  모양인데.. 내 감상을 말하자면 악수였다.

그것도 그냥 악수가 아니라 악수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그리 물음으로서 상황에 대한 주도권이 내게로 돌아와버렸으니까.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라도 급하면 실수도 하고 그런다는 것을.

물론,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아뇨? 그냥 가만히 앉아서 빗질만 했는데요. 뭘."

 몸상태를 걱정해주는  참 고맙지만 네가 걱정한 것과는 다르게 난 지극히도 멀쩡하다.

날 향한 그녀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듯 싱긋 웃으며 그런 뉘앙스로 말을 하니 윗입술 아래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송곳니가 아랫입술을 꾸욱하고 짓씹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였다.


여기서 더 질질 끌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위험할 거라고  것인지 바이올렛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전에  뒤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네가 이해하라고 상대방을 어르고 달래는 것 같은 그런 시선이 내 뒤쪽을 향해 날아갔다.

다행히 바이올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나 보다.


이리 되어버린 이상 어쩔  없다는 걸 그녀도 납득했던 걸까.


덕분에 바로 조금 전까지 바이올라와 함께 앉아있었던 자리에 바이올렛과 함께 자리하게 되었다.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머리는 이해했지만 아직 그녀의 마음은 받아들이지 못했던 모양이다. 바이올렛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몸을 일으켜 벤치를 떠나는 바이올라의 꾹 깨물어진 입술 위에는 원통함이라는 감정이 지우다만 립스틱 자국처럼 남아있었다.


그렇게 원통하면 보지 않는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할텐데 바이올라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끝까지 지켜볼 생각인  같았다. 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벤치를 떠난 그녀가 팔짱을 낀채 나와 엉거주춤하게  있는 제 언니를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다.


그게 옆얼굴로 날아와 꽂히는 걸 느끼고 있자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나조차도 그렇게 느껴질 정도인데 그게 바이올렛에게는 어땠겠는가.

아마 엄청난 부담감으로 느껴짐과 동시에 자신을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동생이 양보해준 자리에 앉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바이올렛의 얼굴 위에는 모종의 결의같은게 서려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느끼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노라고 내심 결심이라도 한 걸까.


왠지 그런 것만 같아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오려고 했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벌써부터 김칫국을 들이키고 있는 꼴이었으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바이올렛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라면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렛이 거절할  없는 제안까지 해가면서 그녀를 내 앞까지 불러들였던 것은 어디까지나 확인할 게 있어서였다. 아까 머릿속으로 떠올랐던 자그마한 가정이 사실인지 아닌지 보다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바이올렛과 최대한 근접할 필요성을 느꼈고,  결과가 바로 아까 그녀를 상대로 건넸던 제안이었다.


'어디보자..'


그렇기에 바이올렛이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순간부터  모든 신경은 오롯이 귀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면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리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더라.

그래서 얼굴도 같이 확인해보려고 했더니 그런 내 기색을 알아차리기라도  것처럼 바이올렛이 고개를 요리조리 움직여가며 내 시선을 피했다.

내게 얼굴을 보이기라도 하면  무슨 엄청난 일이라도 벌어질  같았던 걸까.


무슨 일이 있어도 얼굴만큼은 절대로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바이올렛 때문에 결국 다시 귀쪽으로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시간을 들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뭐,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


꿩대신 닭이라고 아쉬운대로 청각으로라도 확인을 해봐야하지 않겠는가.


다만 이대로는 제대로된 확인이 불가능할게 뻔했기에 변수를 추가해야할 것 같았다. 옆에 놓아두었던 빗을 집어들었던 건 그래서였다.


내가 몸에 끼얹어진 것들을 씻어내기 위해 자리를 비운 동안 바이올렛도 비슷한 이유로 자리를 비웠었던 모양이다. 군데군데 먼지자국이 묻어있었던 바이올라하고는 다르게 그녀의 꼬리는 그 흔한 흙자국 하나 없이 말끔했다.


그렇다고 평소같지는 않았다.

헹구는데 집중한다고 그 후의 작업들을 소홀하게 하기라도 한 것인지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는 탐스럽고 풍성하던 모습하고는 다르게 지금은 부스스한 느낌이 굉장히 강했으니까. 꼭 마치 드라이기를 쓰기는 귀찮아서 수건으로 물기만 대충 털어낸 머리가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마른 걸 보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평소같지 않게 부스스하게 사방으로 뻗쳐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손이 근질거리는  같기도 했다.


해서 집어든 빗에 대고 남아있는 영양제를 쭈욱하고 짜냈다.

작은 빗은 아니었고, 큰 빗이었다.


딱 보니까 대충 말린 탓에 여기저기가 엉켜있는  같은데 거기다가 빗살이 굉장히 촘촘한 편인 작은 빗을 억지로 쑤셔넣어봐야 벌어질 일이야 뻔했으니까.

그렇게 미끌미끌한 영양제로 질척하게 젖은 빗을 바이올렛의 꼬리를 향해 가져가며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오늘은 대충 말리셨나 보네요."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말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꽉 다물어져있던 그녀의 입이 벌어지며 그 안에서  말에 대한 대답이 흘러나온 순간, 느릿하게 내리고 있던 빗을 그대로 그녀의 꼬리에 대고 꽂아넣었다.


푹-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그런 소리가 난 것 같았다.

그렇게 찔러넣은 것을 그대로 내 몸쪽을 향해 쭈욱하고 잡아당겼다. 그리하여 엉켜있던 부분이 곱게  펴진 순간, 그와 함께 바이올렛의 숨소리가 흐트러진 순간.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내 가정이 맞았다는 걸.


바이올렛을 내 앞으로 불러들였던 목표는 이미 달성한 상황.


더는 팔 아프게 빗질을 해댈 이유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대충 마무리하지는 않았다. 엉켜있던 부분을 단  곳도 빼놓지 않고 빗을 이용해 꼼꼼하게 정리해주고 난 후에야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렛에게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이 상당히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나 보다.


꼬리털 사이로 박아넣고 있던 빗을 진작에 떼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뻣뻣하게 경직된 바이올렛의 몸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몸을 어찌나 뻣뻣하게 하고 있는지 저러다가 쥐가 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니, 다시보니 그 직전단계인  같았다.


뻣뻣하게 경직된 바이올렛의 몸이 가느다란 떨림을 뱉어대기 시작한 걸로 보아 슬슬 저러고 있는 것도 한계인 듯 했으니까.

그렇기에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몸의 경직이 풀렸을 때 바이올렛이 보여줄 모습이 말이다.

허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걸 확인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인지 어느새  옆까지 다가온 바이올라가 내 손을 잡고 끌어당기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으니 슬슬 모이기로 한 장소를 향해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핑계아닌 핑계는 덤이었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바이올라의 눈에 내가 바이올렛의 꼬리를 만지작대는 모습이 대충 어떤 식으로 비춰졌는지를 말이다.


꽈아아악-


얼른 가자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움켜쥔채 제쪽을 향해 잡아당기는 바이올라의 손길에서 적지않은 힘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찡그려질 정도로 강력한 힘이  손을 꾸욱하고 압박했다.

평소였다면 내가 표정을 찡그린 즉시 손을 풀어주든 했을 것이다.


헌데 지금의 바이올라는 내 표정따위는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그저  장소를 떠나고 싶어할 뿐.

대체 무엇이 바이올라를 그토록 초조하게 만든 걸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바이올라의 손에 이끌려 집합 장소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떠나온 곳에서부터 늑대를 생각나게 하는 하울링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의 귀를 의식하기라도  것인지 우렁차기 보다는 작은 소리였지만 그럼에도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내가 들은 걸 바이올라가 듣지 못했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바이올라가 일순간 우뚝하고 멈춰섰다.

그래서 물었다.

"왜 그러세요?"


갑자기 왜 멈춘 거냐고.

그러자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건..


"어.. 이쪽이 아닌 것 같아서."


순진하기 짝이 없는 꼬마도 믿지 않을  같은, 그렇기에 더욱 궁색하게 느껴지는 변명이었다.

그렇게 둘러댄 바이올라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의 손에 이끌려 집합장소로 돌아가니 그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뭐야, 이거.'


대충 두 패로 나뉘어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는 '놈'들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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