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바이올라 시점****
정식으로 만나는 건 끽해봐야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그럼에도 신기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안과 함께 있으면 그동안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안을 만나기 전까지는 새로운 뭔가를 배우거나 익히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노력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태까지 쭉 그래왔으니까.
새로운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하다못해 뭔가 교훈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늘 그만한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그게 노력이든 희생이든 간에 그 사실만큼은 결코 변치 않았기에 언제까지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헌데 그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때로는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뭔가를 희생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뭔가를 배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도 그랬다.
딱히 몸을 크게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을 때보다 심장이 더 빠르고 격렬하게 뛸 수도 있다는 걸 이안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니까. 누군가 심장을 잘게 나눠서 그 조각들을 몸 구석구석에다가 박아놓은 것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말 그대로 온몸에서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빨갛게 물든 손가락 끝을 두근두근하고 맥박치게 만드는 그 떨림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긴장이 됐다.
하늘에 맹세컨데 이 정도로 감각이 예민하게 날이 선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딱히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음에도 뒤에 자리를 잡은 이안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꼭 마치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 이건 그보다 더 세밀했다.
시각이라고 만능은 아니니까. 한 번에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고려하면 지금 전해져오는 것들은 눈으로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세밀한 영역에 있었다.
그렇게 아주 또렷한 존재감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이안의 손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심장이 아까하고는 조금 다른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아까는 쿵쿵쿵쿵이었다면 지금은 콩닥콩닥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게 대체 무슨 차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았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꼬리가 달려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꼬리가 달려있지 않았다면?
이런 경험또한 할 수 없었을테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동안 자신에게 있어 꼬리라는 신체부위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그럼에도 따로 관리까지 해줘야하는 귀찮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떼어낼 수만 있다면 떼어내고 싶은 그런 것이라고 해야할까. 부작용없이 그걸 떼어낼 방법만 있다면 얼른 떼달라고 즉시 꼬리를 내밀 용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안을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꼬리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된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무술을 익힐 때가 그랬다. 지금이야 스스로가 사소한 실수따위는 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높은 경지에 오르기도 했고, 꼬리를 다루는데도 능숙해져서 딱히 상관없게 되었지만 처음 무술을 익힐 때만 하더라도 꼬리 때문에 고생했던 적이 많았다.
꼬리 때문에 발이 꼬여서 꼴사납게 넘어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특정 자세를 취하기 위해 몸의 중심을 잡을 때도 꼬리 때문에 남들보다 몇 배는 되는 노력을 쏟아야만 했다.
다른 이들은 쭉쭉 치고나가는데 자신은 균형을 잡는 부분에서 헤매느라 뒤쳐진다는 사실이 당시에는 그토록 분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꼬리=쓸모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그랬던 기억이 머릿속에 아주 또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던 꼬리에 대한 인식이 이안을 만나면서 뒤바뀌게 되었다. 그것도 단 한순간에 말이다.
신기하게 느껴지는 건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꼬리가 달려있다는 사실에 안도와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으니까.
꼬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단시간내에 이안과 이만한 친분을 쌓을 수 없었을테니 말이다.
그런 식으로 새삼스러운 심정을 만끽하면서 조심스레 다가오고 있는 이안의 손을 향해 촉각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꼬리에 와서 닿은 순간, 찾아온 것은 신비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었다.
온몸의 모든 감각이 죄다 꼬리 쪽으로 몰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무뎌질대로 무뎌진 다른 곳들하고는 다르게 유독 그곳의 감각만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이안의 손이 꼬리를 훑기 시작한 순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한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그런 느낌 때문이었다.
이 감각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확실한 건 저번에 느꼈던 것하고는 느낌이 또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안의 손이 꼬리를 스칠 때마다 그곳이 징징 울리는 듯 했다. 그렇게 꼬리에서부터 올라온 감각이 순식간에 몸 전체를 점령했다. 그건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기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만큼 강렬했다. 발가락을 꽉 오므리지 않고서는 배기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그것에 한창 시달리고 있던 와중에 할 수 있었던 최선은 스스로의 입을 있는 힘껏 틀어막는게 고작이었다.
혹시라도 아까처럼 이상한 소리라도 새어나올세랴 입을 꼭 틀어막고 있자니 그런 자신의 내심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꼬리를 훑는 이안의 손길이 조금씩 부드럽게 변했다. 덕분에 꼬리에서부터 올라오는 감각이 저릿저릿함에서 기분 좋은 노곤함으로 차츰 바뀌어가는 걸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한창 좋은 분위기에 시녀라는 년이 눈치도 없이 찬물을 끼얹었다.
기분이 거지같았다면 그 즉시 한따까리 했겠지만 지금 자신과 이안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 안락한 분위기를 스스로의 손으로 망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길 택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이안은 꼬리를 어루만지는데 푹 빠져서 자신을 흠칫 놀라게 만들었던 시녀의 반응을 보지 못한 듯 했으니까.
해서 그쪽을 한 번 노려봐주는 것으로 시녀를 쫓아보내니 감각이 날카로울 정도로 치솟아있던 꼬리 위로 서늘하기 그지없는 액체가 촤악하고 끼얹어졌다.
물을 떠오라 했더니 무슨 얼음물이라도 떠온 걸까.
서늘하기 그지없는 액체가 이안에게 어루만져지며 살짝 달아올라있던 꼬리를 적신 순간 말 그대로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그만큼 차가웠다. 살짝 뼈가 시리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그래서 늘 그랬던 것처럼 반사적으로 몸을 털었다. 그리고 나서는 속으로 아차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지금 자신의 뒤에는 이안이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분명 물이 엄청나게 튀었을텐데..
확인해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선뜻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만큼 겁이 났다. 혹시라도 이안 쪽을 돌아봤을 때 그의 얼굴 위로 짜증같은게 어려있을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으니까.
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있으니 이안은 이번에도 그 착하디 착한 마음씨를 유감없이 발휘해 자신을 용서해주었다.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것도 잠시, 한편으로는 살짝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안이 자신을 상대로 화를 내지 않는 게 자신을 어렵게 여겨서 그런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무사히 용서받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해야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간사해서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쉬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몸을 감싸고 있던 사람을 노곤노곤하게 만드는 안락함에게 있어 꼬리에 끼얹어진 물은 너무 차가웠던 모양인지 그러한 감각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니까.
그게 살짝 아쉬워서 내심 입맛을 다시고 있자니 항아리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것은 부들부들한 천으로 꼬리를 훑는 감각이었다.
고작 얇은 천 한 장만 추가되었을 뿐인데 손으로 직접 만져줄 때하고는 느낌이 또 달랐다.
좀 더 애달픈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조금 더 격하게 마구 만져줬으면 하는 욕망과 지금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하며 그 안을 제멋대로 헤집어놓았다.
시녀가 말려줄 때나 직접 말릴 때는 이런 느낌은 들지 않았던 건 같은데 말이다. 만져주는 이의 성별이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느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는 걸까.
'아니.'
단순히 성별이 달라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만져주는 사람이 이안이기에 이런 느낌까지 드는 거겠지. 이런 건 처음이다보니 확신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자, 그러면.."
물기를 닦아내는 작업이 얼추 끝났나 보다. 꼬리를 감싸고 있던 천이 떨어져나감과 동시에 흡족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걸 듣고 있자니 괜히 자신까지 흡족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 생각인가 보다.
부스럭하고 뭔가를 집어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이안의 솜씨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은 이들보다 뛰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자신에게 붙은 이들은 하나같이 그런 과정들을 거쳐온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름대로 경험까지 쌓은 이들이었고.
그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심장이 이렇게 두근두근대는 것은 자신을 신경써주는 듯한 이안의 행동이 그만큼 기꺼웠기 때문이었다.
그냥 이안이 자신을 위해 저런 것들을 챙겨왔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닐텐데 저런 것들을 따로 준비해올 정도라면 그또한 오늘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뜻일테니까.
물론,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이 시간을 기다린 건 아닐 것이다.
호감 정도는 있어보이긴 했지만, 아직 자신이 품고 있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 했으니까.
그럼에도 그 사실이 못내 기껍게 느껴졌다.
일단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게 어딘가 싶었으니까. 덕분에 뭐라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초조했던 마음또한 가라앉힐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코밑을 맴돌기 시작한 강렬하기 그지없는 약초의 냄새에 반사적으로 표정을 찌푸렸던 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냄새가 너무 강렬했다.
강렬해서 코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그렇지만 인상을 찌푸렸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좀 많이 강렬하긴 해도 불쾌한 냄새는 또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강렬하기 짝이 없는 향기가 주제도 모르고 귀하디 귀한 이안의 체향에 간섭질을 해댄 탓이었다.
이안의 체향은 워낙 존재감이 넘치는 타입이라 바로 옆에서 약초 냄새가 풍긴다고 한들 그것이 흐릿해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냄새끼리 뒤섞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안의 체향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도 좋아서 그 본연의 것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으니까.
헌데 이제와서 거기에 다른 게 섞여봐야 불쾌하다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닫고 있었던 것은 고작 그런 이유로 귀찮음까지 무릅써가며 자신을 위한 물건을 손수 챙겨온 이안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입을 꼭 닫고 있으니 특유의 강렬한 약초향을 물씬 풍기는 이안의 손이 조심스레 꼬리를 향해 접근하는 것을 냄새를 통해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울려퍼지기 시작한 질척질척하고 미끄러운 것이 생각나게 하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상황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소리가 너무나도 자극적으로 느껴졌으니까.
묘한 소리를 흩뿌리는 손이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이라는 것이 몸을 타고 올라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안의 손이 꼬리와 접촉한 순간, 내심 경악했다.
동시에 깨달았다.
이건 위험하다는 것을.
대체 뭐가 위험한 거냐고 묻는다면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았지만 본능이라는 놈이 자꾸만 그리 속삭였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꼬리를 움직였다. 이안의 손을 피해서.
헌데 이안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손에 묻은 것때문에 미끄러워서 죽겠는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꼬리의 행태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살짝 이를 악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아차하는 사이에 잡혀버리고 말았다.
그에 빠져나오기 위해서 꼬리를 움직이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꼬리를 쭈욱하고 잡아당기는 손길과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아찔하고도 강렬한 쾌감이 머리를 쿵하고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