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럼..'
이만하면 몰래 찾아온 손님을 위한 서비스도 충분히 해준 것 같으니 슬슬 나가보실까.
맘 같아서는 그대로 뛰쳐나가 엿보기 현장을 급습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솔직히 지금 나가서 바이올라와 마주쳐봐야 피차 어색하기만 할테니까.
그래서 샤워를 끝내기 전에 스트레칭을 하는 척 슬며시 몸을 비틀어주면서 '이제 곧 나갑니다.'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넋놓고 내 모습을 감상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바이올라의 실루엣이 황급히 몸을 돌려 탈의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욕실을 빠져나간 것은 그러면서 울려퍼지기 시작한 발소리가 완전히 잦아들고 나서였다.
'어이구야..'
욕실을 빠져나오니 가장 먼저 눈으로 들어온 건 내가 욕실로 들어가기 전보다 조금 더 엉망으로 변해버린 탈의실 바닥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바로 조금 전까지 그곳에 서 있었던 방문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발자국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아무래도 그 잠깐 사이에 욕실 문틈 사이로 새어나온 뜨뜻하고 축축한 공기를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흙들이 있는 힘껏 흡수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바닥에 바이올라의 발자국이 아주 또렷하게 찍혀있었다.
과연 이곳을 치우게 될 이가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생 좀 하겠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게 눈에 훤해서 잠시나마 그 누군지 모를 이를 향해 심심한 애도를 보내주었다.
그것도 잠시 곧 깨닫게 되었다.
팔자좋게 남 걱정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는 걸.
'이게 뭐여.'
설마 이걸 갈아입으라고 가져다 준 건 아니겠지.
놀랍게도 그런 모양이다. 주변에 다른 옷같은 게 보이질 않는 걸 보면.
급하게 조달해온다고 이것저것 따지고 앉아있을 상황이 아니었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제국 남자들에게는 이런 게 일상복인 걸까. 아까 여기올 때 마주쳤던 걸 떠올려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아니면 어떤 민족의 전통복장같은 거라도 되나?
제국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이 옷에는 대체 왜 소매가 달려있지 않은 걸까하는 고찰을 조금씩 발전시키던 것도 잠시, 일단은 그거라도 걸치기로 했다. 바이올라가 원래 내 옷을 낼름 집어가버린 바람에 다른 대안도 없었을 뿐더러 슬슬 좀 추웠으니까. 원래 몸이었다면 이 정도 추위쯤이야 신경조차 쓰지 않고 무시했겠지만 지금 몸으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몸이 어느 정도로 허약한지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지 오래니까.
그렇기에 이런 약하기 짝이 없는 몸을 가지고 차마 그런 만용을 부릴 수가 없었다. 이런 몸으로 감기라도 걸리는 날에는 끙끙 앓는 건 확정일테니 더더욱 그랬다.
잠깐 끙끙 앓고 깔끔하게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지 그 상태가 교류전까지 이어지게 되면 그로인해 난감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조심할 수 있을 때 조심하는 편이 좋겠지.
그래도 이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건 옷만 가져가고 따로 빼놓았던 것들은 손도 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샤워 후에 쓸 물건이라 생각해서 건드리지 않은 걸까.
아무튼 그렇게 갈아입을 옷이랍시고 가져다 준 걸 몸에 걸치고 나니 가장 먼저 찾아든 느낌은 허전함이었다.
짧든 길든 간에 늘상 팔을 덮어주었던 것의 존재가 느껴지질 않으니 거기서 오는 허전함이 어마어마했다. 거기다가 옷을 이루고 있는 천 자체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얇기도 했고.
살짝 미묘한 상의하고는 다르게 바지 쪽은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요즘같은 날씨에 입기에는 기장이 좀 짧아보인다는 점이 살짝 흠이긴 했지만, 상의처럼 집어든 순간 '이게 뭐여.'하는 느낌까진 들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입기 전까지의 느낌이고 실제로 입어보니 또 다르더라.
입은 순간 끼는 느낌이 확 들었으니까.
허벅지나 허리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사타구니 쪽이 꼈다.
그렇다고 바지가 일부러 그런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졌다는 뜻은 아니고, 그냥 이쪽의 사이즈가 평범함이라는 굴레를 훌쩍 벗어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일인듯 했다.
덕분에 졸지에 허리를 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평소처럼 허리를 쭉 펴자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툭 튀어나오는 것 하나가 있었으니까. 이대로는 제대로 걷기도 힘들 것 같아서 궁여지책이라도 쓰기 위해 바지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바지 위로 볼록하게 튀어나와 제 존재감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던 것을 손으로 잡아 허벅지 쪽에다가 딱 붙여놓았다.
그리고는 펑퍼짐한 편인 상의를 쭉 잡아당겨서 그 위를 덮어주고 나니 그나마 좀 나았다.
적어도 아까처럼 보기 흉하지는 않았으니까. 대신 걸음걸이가 굉장히 부자연스러워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 정도면 아까보다는 확실히 나아서 그대로 탈의실을 빠져나가니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복장의 여성이 날 다시 온실까지 안내해주었다.
그러다보니 알게된 건..
'확실히 가을이긴 하네.'
이런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기에는 날씨가 많이 쌀쌀하다는 것이었다.
뭐, 위에 걸칠만한 거라도 가져다주지 않으려나.. 눈치채주길 바라면서 그새 살짝 닭살이 올라온 팔뚝을 열심히 손으로 쓸어보았지만 매정하기 짝이 없는 시녀는 단 한 번도 내쪽을 돌아봐주질 않았다. 그저 안내라는 제게 맡겨진 역할에만 충실할 뿐.
'아니, 이건 매정하다기 보다는..'
겁에 질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길게 드리워진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옆얼굴 쪽에서 살짝이긴 하지만 창백하게 질린 듯한 느낌이 났다. 꼭 마치 절대로 내 모습을 봐선 안 된다고 엄청나게 높으신 분한테 단단히 주의라도 받은 것처럼 말이다.
혹시 아까 바이올라가 탈의실을 빠져나가면서 주의하라고 단단히 일러두기라도 한 걸까.
덕분에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쌀쌀한 가을 공기를 만끽하며 온실 앞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시녀가 내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두 눈은 꼬옥하고 감겨있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것은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눈을 꼭 감은 채 내쪽을 향해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보이는 시녀의 옆을 지나쳐 온실 안으로 들어가니 그제서야 좀 살 것 같았다. 안에 따로 온도조절장치같은 거라도 설치되어있는지 온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바깥에 흐르고 있는 것하고는 비교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훈훈한 공기가 자연스레 몸을 감싸왔으니까.
그 안락한 느낌을 만끽하고 있자니 바이올라가 저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열심히 눈동자를 굴려가며 내 표정과 눈치를 살피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아까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사과라도 할 생각인 것 같은데..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온실 안의 공기가 바깥보다 따뜻한 편이긴 해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으슬으슬한 느낌에 하도 시달린 탓에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거기에 달려있지도 않은 소매 쪽에서 느껴지는 허전함도 여전했고.
그런 내게 있어 바이올라의 상체를 타이트하게 감싸주고 있는 흰색의 제복은 참으로 따뜻해보였다.
해서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거나 뜯어내보자는 마음으로 아까 시녀를 상대로 선보였던 걸 바이올라를 상대로 다시금 펼쳐보이니 날 향해 조심스레 다가오던 그녀의 얼굴 위로 흠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아까 등장할 때처럼 날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만 아까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 어마어마한 흙먼지를 동반했었던 아까하고는 다르게 지금은 빠르긴 해도 사뿐사뿐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덕분에 흙먼지가 일어나긴 해도 아까만큼은 아니었다. 그마저도 기세가 형편없어서 일어나자마자 가라앉을 정도였고.
'진작에 좀 그렇게 뛸 것이지.'
그랬다면 귀찮게 몸을 헹굴 필요도, 이렇게 허전하면서도 불편한 느낌이 드는 옷으로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을텐데 말이다.
동시에 알 수 있었다. 바이올라의 수준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윗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녀가 날 향해 다가오기 위해 하고 있는 행동은 얼핏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몸을 제대로 써먹을 줄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저것은.
'이 정도면..'
디아나라면 몰라도 앨리스한테는 확실히 승산이 없겠는데.
순식간에 거기까지 다다른 생각은 거기서 더 나아가질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잠깐 사이에 바이올라가 내 앞에 도착해있었으니까.
"추, 추워?"
혹시 자신이 한 짓으로 인해 내가 감기라도 앓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날 내려다보는 바이올라의 얼굴에는 날 향한 걱정이 그득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솔직히 그대로 고개를 끄덕여도 상관없긴 했지만, 왠지 한 번 튕겨주는 쪽이 효과는 더 좋을 것 같아서 한 번 튕겨봤다.
"아뇨, 괜찮아요."
거기에 애써 웃은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까지 덧붙여주니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아니기는! 이렇게 떨면서.."
내 대답을 들은 바이올라가 얼굴을 와락하고 구기더니 몸에 걸치고 있던 제복의 상의를 뜯어내듯이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그렇게 끌러낸 것을 그대로 내 몸에다가 둘러주었다.
"미안, 조금 더 따뜻한 걸로 가져다 줬어야 했는데.. 급하게 구하다보니까.."
기본적으로 타이트한 스타일이라서 나한테도 딱 맞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좀 컸다.
특히나 가슴 쪽이 많이 남아서 기껏 걸쳐준 게 무색하게 옷이 자꾸만 흘러내리려고 했다. 해서 그것이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옷깃 부분을 손으로 꼬옥하고 움켜쥐어 고정시킨 뒤 그 상태로 바이올라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행동에 놀란 척 얼굴 위로 얼떨떨한 표정을 띄워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바이올라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녀를 향해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보였다.
"가, 감사합니다."
그런 내 모습이 대충 어떤 느낌이었을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주변에 뭐 거울같은 게 있어서 거기에다가 비춰볼 수도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딱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성능 확실하구만.'
적어도 바이올라에게만큼은 효과가 상당해보인다는 점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제가 걸치고 있던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내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상당히 자극적으로 비춰졌던 모양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볼쪽에만 머물러있던 것이 어느새 얼굴 전체는 물론이거니와 목덜미와 귀까지 번져있었다.
그렇게 금방이라도 펑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한채 먹이를 갈구하는 붕어마냥 도톰한 입술을 벙긋벙긋 거리고 있던 바이올라가 이내 손을 들어올려 제 얼굴을 덮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시야를 차단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것 같았던 걸까.
빨갛게 변한 얼굴을 덮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그녀의 호박빛 눈동자가 어느 한 곳에 머물러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배회하다가 내쪽을 힐끔거리길 반복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랬나 보다.
그 상태로 바이올라가 날 향해 물었다.
이제 추운 건 좀 괜찮아졌냐고.
그녀의 눈에는 고작 상의 한 장만으로는 부족해보였던 걸까.
"아, 아니다. 잠깐만.."
저리 말하면서 조심스레 내 옆으로 다가와 제 꼬리를 이용해 내 몸을 감싸는 걸 보면 말이다.
"따, 따, 따듯하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할 거면 목소리라도 좀 정돈하고서 하던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저래버리니 듣는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내가 그럴진데 그걸 직접 입밖으로 내뱉은 장본인은 어땠겠는가.
슬쩍 시선을 들어올려 옆에 선 바이올라의 얼굴을 향해 던져보니 간신히 진정되어가던 그녀의 목덜미가 다시금 빨갛게 물들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살짝 들어올리고 있던 고개를 숙여 그대로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은빛의 꼬리에다가 파묻었다.
"..네, 그러네요."
그리고는 그것이 주는 안락함에 살짝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며 거기에 대고 슬며시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돌아온 반응은 격렬하다 못해 극적이었다.
바이올라의 꼬리에 대고 얼굴을 비벼댄 순간, 내 몸을 감싸고 있던 그녀의 꼬리가 움찔하고 떨리며 포근하고 안락한 느낌을 선물해주던 은빛의 털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이, 일단 저쪽으로 갈까..?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기도 좀 그러니까.."
그리고 아마 딱 거기까지가 바이올라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간신히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순간 굳이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바이올라의 꼬리에 포옥 안긴 채 온실 한 가운데에 준비되어있는 테이블을 향해 나아가니..
'저건 또 뭔 지랄이람.'
꼭 그리 말하는 듯한 시선이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그곳을 차지하고 있던 선객으로부터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