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바이올라 시점****
반가웠을 뿐이다.
남들에게는 고작 며칠이었을테지만 자신에게는 그 고작 며칠이 마치 몇 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예의 그 달큰한 향기가 콧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 울컥하고 솟아오른 반가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반겨줄 생각으로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그렇게라도 알려주고 싶었으니까. 내가 너와 다시 만나는 이 순간을 이렇게나 애타게 기다려왔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달려갔던 것인데..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만 힘조절에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그 탓에 흙을 흠뻑 뒤집어쓰게된 네 모습을 확인한 순간 겁이 덜컥 났다.
마음만 앞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저질러버리고 말았으니까. 생각해보면 자신은 늘 이런 식이었다. 늘 의욕만 앞서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화를 내면 어떡하지.
사과하면 받아줄까.
화가 나서 돌아가겠다고 하면.. 그래서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으면 자신은..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알 수 없어서, 섣불리 입을 열면 지금은 꽉 다물어져있는 네 입이 열리며 분노가 쏟아져나올 것만 같아서 입을 열 수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들려온 것은 크게 분노한듯한 언니의 목소리였다.
귓가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그 목소리의 존재를 자각한 순간 깨달았다. 목소리에서 풍겨져나오는 느낌과는 다르게 언니는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으르렁대듯 말하는 건 그렇게라도 해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즉시 꾸중을 듣고 시무룩해하는 척을 했다. 아니, 완전히 연기는 아니었다. 실제로 반성하고 있는 상태긴 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귀까지 접어가며 언니의 행동에 맞장구를 쳤던 것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안의 분노가 조금이라도 누그러들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여성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부성애를 느끼는 타입의 남성도 꽤 있다고 들었으니까.
그렇게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불쌍한 모습까지 연기해봤지만 살며시 찡그려진 이안의 얼굴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목도한 순간 그나마 좀 잦아들었던 심장의 떨림이 다시금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났나 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여기 온다고 분명 아침부터 열심히 꾸미며 준비를 했을텐데 그렇게 들인 시간과 노력이 단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셈이니 말이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화가난 네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줄 수 있을까.
남자의 비위를 맞추는 행동따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할 생각도 없었고.
자신은 비위를 맞추는 쪽보다는 맞춰지는 쪽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이라면 평소에는 한심하게 생각했던 그런 행동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안의 얼굴 위로 다시금 미소가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평소에 해본 적 없는 일이다보니 무엇을 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분노로 싸늘해진 이안의 마음은 더 차가워지고 있을텐데..
초조함에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쭉 표정이 굳어있는 걸 보고 불쌍한 척 했던 게 아무 효과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쉬지않고 이어지는 질책에 시달리는 자신의 모습이 안쓰럽게 보이기라도 했는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로 된 구원의 손길이 조심스레 내밀어져 왔다.
덕분에 알게 되었다.
자신의 운명의 상대는 마음 씀씀이마저도 곱다는 것을 말이다.
보통 남자들 같았다면?
자신을 감싸주기는 커녕 화를 내며 그대로 돌아가버렸을 것이다. 혹은 토라졌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뭐라도 얻어내려보려고 했겠지.
하지만 지금 자신을 변호하는 이안의 모습에서 그런 기색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아까부터 계속 혼난 자신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할 뿐.
그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감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물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나선 이안과 마주하고 있는 건 다름아닌 언니였다. 그것도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화가 나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의 언니 말이다.
자신이야 저 모습이 꼬여버린 상황을 어떻게든 풀어내기 위한 연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안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언니의 앞으로 나서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분노한 언니를 상대로 나서는 건 훈련을 받은 기사들도 쉬이 하지 못하는 행동인데 말이다.
무섭지 않은 걸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연기를 하고 있는 만큼 그것을 연기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뿜은 기세만큼은 진짜였으니까.
물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언니도 전력으로 내뿜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견디기 힘든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변치 않았다. 하물며 그런 걸 처음 겪는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나선 이안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도 애써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자신을 변호하는 이안의 모습은 일견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돌아갈 분노를 조금이라도 더 줄여보겠다는 것처럼 쉬지 않고 손을 움직여대는 이안의 모습을 보고 있을수록 가슴어림에서 시작된 따끔거림이 점차 심해지는 느낌이었으니까.
언니를 향해 이쯤하자는 신호를 보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쪽의 뜻이 무사히 전달된 모양이다.
어찌되었건 목적은 달성한만큼 언니도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더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한숨소리와 함께 이쯤에서 끝내겠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에 안도하던 것도 잠시, 일단 엉망이 되어버린 몰골부터 어떻게 하자며 나선 언니에게 등 떠밀린 이안이 그대로 욕실 쪽으로 사라지고 온실에 홀로 남겨지게된 순간 찾아온 건 자책이었다.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이안과 조금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었을텐데.
그딴 실수를 해버린 바람에 이 귀중하기 그지없는 시간을 그대로 날려먹게 생겼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려서 미칠 것 같았다. 하늘에 맹세코 이 정도로 속이 쓰린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안을 끌고 갔던 언니가 온실로 다시 돌아온 것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 자책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 소리 들을 거라 생각했다. 아까 그건 말 그대로 보여주기 식의 꾸중에 불과했으니까.
헌데 의외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자책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아까 한 것으로 충분하다 여긴 걸까.
"많이 위험했던 거 알고 있지?"
"..응."
"씻고 돌아오면 제대로 사과하는 것도 잊지 말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자신을 감싸기 위해서 용기있게 나선 이안을 보고 감동에 빠져있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걸 깜빡해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렇게 아까 이안이 보여주었던 용기 있는 모습을 떠올리니 한 발 늦게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방정맞게 뛰기 시작했다. 남자한테 지켜지는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기에 굉장히 묘한 기분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썩 나쁘지 않았다.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선 이가 이안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안이 아니라 다른 놈이 그랬다면 되도 않는 짓 하지 말라며 헛웃음만 나왔을테니까.
뭣보다 이안이 자신을 위해 선뜻 나섰다는 상황 자체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위해 나섰다는 건 그만큼 자신에게 호의적이라는 뜻일테니까. 어쩌면 자신이 과대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동시에 굉장히 난감해졌다.
이 이상 좋아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안의 모습을 보고 나니 그가 더 좋아져버렸으니까. 누군가를 이 정도로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말이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력으로 움직인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지며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쿵쾅 뛰었다.
"언니.."
"응?"
"우리 이안 말이야. 너무 사랑스럽지 않아..?"
그 탓에 방정맞게 움직여대는 입을 차마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이안의 사랑스러움을 전파하지 않으면 이 떨림이 진정되질 않을 것 같았으니까.
덕분에 언니에게 그건 또 뭔 헛소리냐는 시선을 받게 되었지만 그건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많이 무서웠을텐데.."
"뭐, 확실히 배짱은.."
"그렇지? 그렇지?"
갈아입을 옷이 도착한 건 그런 식으로 이안의 사랑스러움을 설파하던 와중이었다.
언니의 것을 준비하는 김에 같이 준비한 모양이다.
제국의 특색이 듬뿍 묻어있는 옷 두 개가 나란히 배달되었다. 그 잠깐 사이에 어떻게 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안의 몸에 딱 맞을 것 같은 옷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자연스럽게 상상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차려입은 이안의 모습을 말이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떠오르게 된 광경은 너무나도 파괴적이었다.
'어떡하지.. 미칠 것 같아..'
간신히 진정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홧홧하게 달아오르며 심장이 미칠듯이 뛰어댈 정도로.
"이, 이건 내가 가져다 줄테니까 그동안 언니도 갈아입고 있어."
혹시라도 누가 훔쳐갈세랴 허겁지겁 그것을 집어든 건 바로 그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역할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응? 아, 그래."
언니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꼬치꼬치 캐물어왔다면 분명 급한 마음에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이 역할을 뺏겨버리고 말았을테니까.
"어딘지는 알지?"
"응."
실은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그 어떤 냄새보다 또렷한 존재감을 가진 달콤한 향기를 쫓다보면 자연스럽게 이안이 있는 곳에 닿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게 온실을 뒤로한채 그 맞은 편에 자리한 건물로 들어갔다.
예상했던대로 그의 흔적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건물 곳곳에 그의 체향이 남아있었으니까. 그것을 이정표 삼아 걷다보니 어느 순간 뭔가에 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향기가 더욱 진득해지고 또렷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커져가는 물소리와 진득해지는 달큰한 냄새가 제멋대로 뇌를 헤집어댔다.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아찔한 느낌이 들며 그에 맞춰 이성이 조금씩 흐릿해지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감각.
그것이 정점에 도달한 것은 마침내 탈의실 안에 입성했을 때였다.
따로 창문이 없기 때문일까. 탈의실 안은 달콤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에 홀려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깨달았다. 이 안으로 들어온 건 실수였다는 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만큼 주변이 온통 달콤한 냄새로 가득했으니까.
지금도 이렇게 몸 곳곳이 저릿저릿한데 주변을 채우고 있는 걸 한 번이라도 들이키게 되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당초 계획대로 가져온 옷만 놓고 그대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옷을 바구니 안에 넣으려던 순간 들려온 물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흘러나온 그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저 얇은 문 너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이안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뇌가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그렇게 떠오른 광경은 온통 살색투성이라서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탈의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잠깐조차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함락당해버린 이성이 그대로 본능이라는 이름의 군홧발 아래에 짓밟혔다. 이윽고 무너진 이성 위로 내걸린 깃발은 갈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갈증이 났다.
그래서 자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채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그럼에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직 회수하지 않고 있던 손을 움직여 그 어떤 것보다 그의 흔적을 진하게 품고 있는 것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코에 가져다댔다.
꼭 침샘이 고장난 것 같았다.
그만큼 미친듯이 군침이 흘러나왔다.
며칠동안 쫄쫄 굶고 나서 마주하게 된 음식도 이 정도로 먹음직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향기였고, 그렇기에 더더욱 자제하기가 힘들었다.
그저 숨을 쭉 들이켰다가 내쉬기만 할 뿐인 간단하기 그지없는 행위가 믿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쾌감을 선물해주었다. 숨을 한 번 들이킬 때마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팡팡 터지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마음같아서는 평생 이러고 있고 싶을 지경이었다.
동시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치켜든 것은 두려움이었다.
고작 옷에 남은 게 이 정도인데 그의 몸에 직접 코를 파묻게 되면 평생 그러고 있게될지도 모른다는 기분좋은 두려움이 꼬리뼈를 간지럽히며 제멋대로 살랑살랑 흔들리던 꼬리를 쭈뼛하고 서게 만들었다.
아까 전부터 줄기차게 들려오던 물소리가 뚝 멎은 건 바로 그때였다.
설마 다 씻은 것일까.
벌써?
이 모습을 들켰다간 아무리 착한 이안이라도 자신을 경멸하게 될 것이 분명했기에 황급히 그가 들어가있는 욕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하여 뿌옇게 김이 서려있는 문 위로 아른거리는 그의 실루엣을 확인하게된 순간 반사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꼬리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은 거대한 무언가의 실루엣이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한채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알게 되었다.
자신의 운명의 상대는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조건까지도 타고났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