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하필이면 또 인사를 건네려던 참이었기에 끼얹어진 흙먼지가 그대로 내 입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덕분에 알게된 것은 흙맛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점이었다.
아무튼 입 안이 텁텁한 것이 솔직히 기분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허억..!"
직접 일으켰던 흙먼지가 조금이나마 가라앉고 나서야 제가 만들어낸 참상을 확인한 것인지 이제 막 가라앉기 시작한 것 너머에서 크게 헛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뒤로 따라붙은 건 숫제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였다.
"바이올라아.."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소리에 그것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알게되었다. 피해자는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 피해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바이올렛이 입은 피해는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갈색의 자잘자잘한 흙알갱이들이 그녀의 머리서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아주 골고루 흩뿌려져 있었으니까. 심지어 여전히 탐스럽기 그지없는 자태를 자랑하고 있던 꼬리 쪽도 그랬다.
덕분에 누군가 작정하고 그녀의 몸 위에 초코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어떤 맛이 날지 혀를 가져다 대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흙맛은 방금 느낀 걸로 충분하다 못해 넘쳤으니까.
그렇게 제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낸 바이올렛은 동생을 향해 딱 한 마디를 보탰다.
"제정신입니까?"
그 짧디 짧은 한 마디 만으로도 충분히 섬찟하게 느껴졌던 것은 어느 순간부터 바이올렛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흉신악살을 연상시키는 기세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진심으로 빡치면 오히려 미소를 짓는다고 하더니만 지금 바이올렛의 모습이 딱 그랬다.
바이올라의 정신건강에 대한 우려가 담긴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생을 노려보기만 하는데 그 기세가 어찌나 살벌한지 그걸 받아내는 바이올라의 몸이 실시간으로 쪼그라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이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가 잘못을 저지른 부하를 혼내는 것처럼 느껴졌던 건 과연 기분 탓이었을까.
살짝 기묘한 느낌에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것도 잠시, 이쯤에서 나서기로 했다.
둘 사이로 끼어들어 바이올렛을 만류하고 나선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바, 바이올렛님 진정하시죠. 바이올라님도 일부러 그런 신 건 아닐 겁니다."
똑같이 흙을 뒤집어 썼는데 화 안내냐고?
솔직히 나도 사람인지라 화가 나긴 했다. 잘 걷고 있다가 갑자기 흙을 뒤집어 쓴 꼴인데 화가 안 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테지.
그럼에도 바이올렛을 만류하고 나선 것은 그녀가 으르렁대며 분노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순간적으로 울컥하고 솟아올랐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을 뿐더러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아까 전부터 실시간으로 쪼그라들고 있던 바이올라가 저기 심어져있는 식물들 옆에 그것들과 비슷한 느낌으로 자리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는 내가 오히려 바이올라를 감싸고 돌 줄은 몰랐는지 쉬지 않고 이어지던 으르렁 소리가 일순간이나마 뚝 멎었다. 그와 함께 얼굴로 날아와 꽂힌 건 구원자를 바라보는 듯한 바이올라의 시선이었다.
옆얼굴로 날아와 꽂히기 시작한 그것이 바이올렛의 살짝 기묘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과 교차하는 걸 느끼며 얼굴 위로 미소를 띄워올렸다. 물론, 나는 괜찮으니까 그렇게 화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말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려줄겸 흙을 뒤집어 써서 엉망으로 변해버렸을 게 분명한 몰골도 정돈할 겸 머리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흙이야 이렇게 털면.."
뒤집어 쓴 게 물이나 하다못해 진흙같은 거였다면 얄짤없이 그대로 샤워실 신세였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손으로 털어내봐야 아무 소용 없으니까.
허나 지금 몸 곳곳 덮고 있는 것들은 달랐다.
아까 입 안으로 밀고 들어왔던 것들의 감촉을 떠올려보면 살짝 습기를 머금고 있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바스라지는 질감에 가까웠으니까.
손으로 털어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털어낼 수 있었다.
해서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인데.. 왜 흙 떨어지는 게 멈추질 않는 걸까.
벌써 열 번은 가뿐하게 넘어선 것 같은데 말이다.
어째 털면 털수록 떨어지는 양이 늘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의도했던 모습하고는 한 백만광년쯤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상황에 순간적으로 오기가 치솟아서 머리 위로 올린 손을 더 빠르게 움직여봤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더 빠르게 털어낼수록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의 양또한 그에 맞춰 늘어났으니까.
'아니, 시발..'
대체 얼마나 뒤집어 썼길래 흙이 계속 떨어지는 거람.
적어도 옴팡지게 뒤집어 쓴 바이올렛보다는 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멈추기도 애매했기에 반쯤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고 있자니 애써 바이올라를 감싸려고 하는 내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라도 했나 보다. 바이올렛으로부터 날아와 꽂히던 시선 속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뒤섞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언니의 꾸중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으로 날 쳐다보고 있던 바이올라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미안하긴 했나 보다.
바이올렛의 꾸중을 들으며 안 그래도 쳐져있던 귀가 고개를 떨구고 나서부터는 아예 접혀버린 걸 보면.
"..씻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옷도.. 갈아입어야할 것 같고."
그리고 그게 바이올렛이 도달한 결론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난감한 제안이었다. 출발할 때 입고 있었던 것하고는 전혀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 날 보고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야 뻔하니까.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사실대로 말한다고 한들 믿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건 디아나나 앨리스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테지.
겉으로는 내 말을 믿어주는 척 해도 속으로는 남들보다 더 의심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둘에게 뭐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 실제로 일이 그렇게 된다면 내가 그 둘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의심부터 들테니까.
그렇기에 '씻고 갈아입자!'라는 바이올렛의 제안은 내게 있어서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운 난감한 제안이었지만 그렇다고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필요없다고 이 모습을 고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지금 내 앞에 둘에게 그런 내 모습이 어떤 식으로 비춰질지야 뻔하니까.
금방 갈아입을 옷을 구해다 줄테니 일단 몸부터 씻고 있으라고 등을 떠미는 손길에 차마 저항하지 못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음..'
말 그대로 어어하는 사이에 욕실에 딸려있는 탈의실에 홀로 남겨져 살짝 벙찌고 있던 것도 잠시,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 씻기로 했다. 말은 안 했지만 찝찝하긴 했을 뿐더러 여기까지 들어와놓고 다시 나가기도 좀 그랬으니까.
해서 몸에 걸치고 있던 것들을 훌러덩 벗어던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바이올렛이 왜 그토록 날 욕실 안으로 밀어넣으려고 했는지 말이다.
'이야..'
몸을 덮고 있던 것들을 한꺼풀 벗어던질 때마다 흙들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 탈의실 바닥은 어느새 여기가 탈의실인지 아니면 온실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변해버렸다. 여기에 물까지 끼얹으면 아주 볼만해지지 않을까. 그대로 뻘처럼 변해버릴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씻고 나올 때 주의해야할 것 같았다.
딱 보니 생각없이 발을 뻗게 되면 그대로 다시 씻으러 들어가게될 가능성이 커보였으니까.
혹시라도 까먹지 않도록 그 사실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기며 옷 놓는 바구니 옆에 준비되어 있던 수건 두 개를 집어들고 그대로 욕실 쪽으로 향했다. 물론, 탈의실을 떠나기 전에 바지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것들을 따로 빼서 바구니 옆에다가 놓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쩌다보니 몸을 씻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거창하게 씻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물로 몸을 적당히 헹궈주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자박-
탈의실과 연결되어 있는 문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군진 몰라도 내가 바닥에다가 뿌려놓은 흙을 밟아버린 모양.
최대한 빠르게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 주겠다고 하더니만 벌써 내 몸에 맞을만한 옷을 구해온 걸까.
'쉽지 않았을텐데..'
그리 중얼거리면서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던 것은 말 그대로 본능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다만 눈으로 들어온 광경은 예상했던 것하고는 좀 달랐다. 말이 욕실이지 꽤나 좁은 공간인 탓에 아까 몸을 헹구기 위해 몸에 끼얹었던 온수들이 뿜어낸 열기가 문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어 그곳이 뿌옇게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갈아입을 옷을 가져온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힘들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김으로 뿌옇게 변한 문 위로 일렁거리는 실루엣이 전부였으니까.
'누구지..'
궁금한 마음에 눈까지 가늘게 좁혀봤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다. 그런다고 문에 서려있는 김이 사라지진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을 가져온 이가 바이올라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실루엣이 보인 묘한 행동들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혹시 누가 지켜보고 있지는 않은지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주변의 동정을 살피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더니 이내 안심해도 되겠다고 판단한 건지 실루엣이 몸을 돌려 아까 옷을 넣어둔 바구니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실루엣의 주인이 바이올라라는 걸 눈치챈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옆으로 몸을 돌린 순간 문 위로 꼬리의 실루엣이 추가되었으니까.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육감적인 몸매와 탐스럽기 그지없는 꼬리까지.
또렷하게 드러난 특징들 모두가 실루엣의 주인이 그녀임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때부터 그것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탈의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살피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걸 보면 단순히 옷만 가져다주려고 온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아니, 어쩌면 원래는 그럴 계획이었을지도 모르지.
지금은 어떨 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갈아입을 옷으로 추정되는 것을 거머쥔 채 내 옷이 담겨있는 바구니를 향해 뻗어져나간 바이올라의 손이 이내 들고 있던 것을 바구니 안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대신 원래부터 그 안에 자리하고 있던 것을 집어들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다.
태도가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흡사 귀중한 유물이라도 대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뭐하는 거람.'
그 모습이 살짝이지만 귀엽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고 있자니 바이올라가 내 옷을 제 얼굴 쪽으로 가져다댔다. 딱 그 타이밍에 맞춰서 몸에 물 끼얹는 행위를 멈춰보았다. 그러자 좁은 욕실 안으로 메아리치던 물소리가 서서히 잦아듬과 동시에 문쪽에서 있는 힘껏 숨을 들이키는 듯한 소리가 작게나마 들려왔다.
그것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숨소리가 탐욕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벗어둔 옷에 남아있는 내 체취 한줌마저도 다른 것들에게 내어주기 싫다는 것처럼 그녀는 내뱉는 건 최소로 하고 계속해서 숨을 들이켜댔다.
한 번 그 존재를 자각하고 나니 자그마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한 그 소리가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살짝 두근댄다고 해야할까.
편하게 몸을 씻기 위해 깔고 앉고 있었던 의자에서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켰던 건 그 묘한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차피 뿌옇게 서려있는 김 때문에 이쪽이 제대로 안 보이는 건 저쪽또한 매한가지일 터.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실루엣으로나마 좋은 구경이나 시켜줄 생각으로 문쪽을 향해 비스듬하게 돌아섰다.
내게 꼬리같은 건 없지만, 꼬리 비슷한 건 있으니까.
그것의 실루엣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 바이올라가 보여줄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이었는데..
'보이긴 하려나..'
탐스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꼬리에 비하면 내 건 상대적으로 작은만큼 제대로 보이긴 할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몸 곳곳을 꼼꼼히 씻는 척을 하며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최대한 잘 보일만한 각도를 찾아헤매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꿀꺽-
잠시 물소리가 멎은 틈을 타 또다른 물소리가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