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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이 되기 전에 (173)화 (173/366)



〈 17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이왕 뭔가를  거라면 제대로 해야하지 않겠는가.

카트린느를 찾아가 털을 부드럽게 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약품을 졸라 타낸 건 바로  때문이었다. 물론, 카트린느는 그런 내 요청을 듣고 의아해했다. 그렇겠지. 중화제같은 거라면 모를까 뜬금없이 뭔 이건 또  소린가 싶었을테니까.


위화감을 남겨두었다가 그게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어떤 식으로 변질될지 몰랐기에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피곤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서 머리가 좀 많이 뻗치더라구요. 푸석푸석한 느낌도 좀 들고."

"그래? 괜찮아보이는데.."

다행히도 적당히 지어낸 변명은 꽤나  먹혔다. 꼬치꼬치 캐묻는 일 없이 카트린느가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으니까.


"한  만져봐도 될까? 어느 정도인지 상태를 알아야할 것 같아서."


"네."


아니, 알고보니 변명이 잘 먹힌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신이 말짱할  나와 스킨십을 하고 싶다는 카트린느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였다.


까짓거 머리 좀 만지는 게  대수라고 저렇게까지 눈치를 보는지..

'최면놀이 할때는 정말 별의  짓을 다하면서 말이야.'

속으로 그리 되뇌이고 있자니 무슨 길고양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카트린느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왔다. 그렇게 뻗어온 것이 머리카락 사이를 노닐기 시작한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일부러 그런 느낌이 들도록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간지러웠으니까.

어쩌면 노리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내 반응에 당황한 듯 손을 떨어뜨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 미안.. 혹시 기분 나빴어..?"


혹시라도 그랬을까봐 걱정이 됐던 걸까. 여기서 '네.'라고 하면 열심히  눈치를 살피고 있는 눈동자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서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냥  간지러워서.. 아무튼 어때요?"

"확실히 좀 푸석푸석한  같기도 한데.. 잠깐만 기다려봐."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카트린느가 옆에 딸린 방으로 넘어갔다. 약같은  다 그곳에다가 보관하는 모양.


덕분에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이 느긋하게 그녀의 앞으로 배정된 방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또 개판으로 해놓고 지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카트린느치고는 굉장히 깔끔한 풍경이 눈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일단은 남의 집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니만큼 어지럽히지 않도록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는 걸까. 아니면 혹시 따로 치워주는 사람이라도 있나?


둘 중에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에도 이 정도로만 해놓고 살면  좋을텐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방 안을 둘러보다 보니 눈에 띈 것은 기차를 생각나게 하는 허연 김을 열심히 뿜어내고 있는 정체불명의 장치였다.


'증류장치인가?'

장치로부터 삐죽 튀어나와 있는 얇은 관에서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액체가 똑똑 떨어지는 모습도 그렇고, 장치 안에 정체모를 풀들이 가득 채워져있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런  같았다. 딱 보니 저 정체모를 풀들의 약효를 추출해내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저걸 어디서 봤더라..'

그보다는 한창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는 액체쪽이 더 신경쓰였다. 분명 어디서 본 것같은 색인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으니까.


아마 겪어본 사람은 알 거다. 그 생각이   같으면서도  나는 느낌이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


조금 더 가까이서 자세히 확인해보면 뭐라도 떠오를 것만같아서 곧장 그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앉았다.

그렇게 묘하게 일렁이는 액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외였던 점은  소리가 들려온 게 카트린느가 들어간 쪽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소리의 출처는 복도와 이어져있는 문이었다.

혹시 환자라도 찾아왔나?

가능성은 충분했다. 일행 내에서 카트린느의 역할은 약사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본의 아니게 그녀의 솜씨를 맛보게 된 이들이 그녀의 실력에 대해 널리 퍼뜨린 덕분에 조금만 아파도 그녀를 찾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탓에 카트린느가 날 상대로 앓는 소리를  적도 있었다. 아프다고 찾아오는 건 상관없지만 다른 이유로 찾아오는 이들도 많아서 혼자 있을 시간이 없다면서 말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불만이었지만, 내게는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방문객들 때문에 나하고 최면놀이를 할 짬이 나질 않아서 툴툴대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이곳의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누군지 모를 방문객에게  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기 위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을 것이다.

눈으로 들어온  생각치도 못했던 얼굴이었다.

그래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쪽에  있었던 건 다름아닌 주인공 놈이었으니까.

날 보고 당혹스러움을 느낀 건 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살짝 당황한 듯한 기색이 놈의 몸 곳곳에서 묻어나오고 있었다.

표정만큼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피차 당황한 탓에 우리  사이로 내려앉게 된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었다. 그리고 그걸 먼저 깨뜨린 쪽은 나였다.


"뭐야? 카트린느 누나 보러 온 거야?"

여긴 어쩐 일로 찾아왔냐는 식으로 물으니 놈이 표정을 최대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꿔 끼우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혹시 어디 아파?"

"아, 응. 배가 좀.."

그리 말하면서  배 위에 손을 올려놓는 모양새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내가  여기 있는지 궁금했던  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넌 왜 여기있냐는 질문이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의 형태를 띈채 날 향해 날아들었다.


"나? 나야 누나한테  부탁할게 있어서."

"그래?"

"응. 아, 누나라면 내가 부탁한 것좀 찾는다고 옆방에 가있어."


그런 식으로 놈과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어느 순간 깨달을  있었다. 놈의 시선이 이따금씩 내 뒤쪽을 향한다는 걸 말이다. 거기 뭐라도 있는 걸까. 내 기억이 맞다면 놈이 바라본 방향에 있는 거라고는 증류장치 뿐인데 말이다.


'잠깐만.'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른 순간 마침내 기억해낼 수 있었다. 증류장치에서 쏟아지고 있는 액체를 내가 어디서 봤었는지를.


놈이 카트린느를 찾아온 목적은 덤이었다.

'아무래도 저게 목적인 것 같은데..'

덕분에 심히 궁금해졌다.


증류장치에서 걸러지고 있는  액체의 효능이 말이다.

혹시 뭐 놈만 아는 지고의 영약같은 거라도 되나?


당장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었다. 놈의 무력이 어느 순간 갑자기  늘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추측을 이어나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나가 본다고 이어가나 봤는데 놈의 입장에서는 나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당히 불편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돌아가려고?"


그냥 좀 기다리면 될텐데 굳이 저렇게 다음에 찾아오겠다며 몸을 돌리는 걸 보면.


"아, 응. 바쁜 것 같아서."

"좀만 기다리면 될텐데.."

"아냐, 이제 곧 집합시간이잖아."


딱 보니 혹시 내가  정체불명의 약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서 내 눈앞에서 사라지려는 모양인데.. 역효과였다.

덕분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주인공 놈이 자리를 피하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얇은 관 끝에서부터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액체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자니 다시 한 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카트린느가 들어갔던 방향 쪽이었다.

방 크기 자체는 얼마 되지 않아보이던데 대체  좁은 방안에 약들을 얼마나 쑤셔박아놨길래 이리 오래 걸린 걸까. 곧장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찐득찐득해보이는 액체로 가득 차 있는 병을 손에 든채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카트린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신기해?"

증류장치 앞에 앉아있으니 그렇게 보였던 모양인데.. 마침  됐다고 생각했다. 저 안에서 걸러지고 있는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지기에는 이만한 상황이 또 없을  같았으니까.


"그냥 이게 뭔가 싶어서요."


"오두막에도 있는 거잖아. 거기 있는 것보다는 크기가  많이 작긴 하지만."

원래 쓰던 것보다 작아서 성에 차질 않나 보다. 멀쩡히 잘만 돌아가고 있는 걸 저렇게 못마땅하다는 듯이 노려보는 걸 보면.


뭐라고 맞장구를 치기가 애매해서 적당히 웃다가 화제를 은근슬쩍 장치 안에 들어있는 정체모를 약초 쪽으로 돌렸다. 약을 가리키며 무슨 약이냐고 물어봐야 제대로  답을 듣지 못할께 뻔했으니까. 그보다는 그 재료가 되는 약초에 대해 알아낸다면 대충 어떤 약인지 추측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약이 아닌 약초라면 저항감이 상대적으로 덜할 것 같기도 했고.

"그나저나 이게 무슨 풀이었죠?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요."

그래서 신경쓰인다는 듯 슬며니 눈살까지 찌푸려주니 무사히 대답을 들을  있었다.

"이거? 게스메리움이잖아."

"아, 그랬었죠."

게스메리움이라.

일단 기억에는 없는 풀이었다.


그렇다는 건 따로 알아봐야 한다는 뜻이었고.

뭐하는 풀일까.

느긋하게 추측하고 있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 참. 여기 부탁했던 거."


카트린느가 방에서 들고 나온 걸 내밀어왔으니까.


그런 그녀를 향해 솔직하게 감사를 표한 뒤 받아든 것을 주머니 안에 쑤셔넣고 그대로 건물 앞에 마련된 집합장소로 향했다.

그랬다.


오늘은 '교류'가 있는 날이었다.

어차피 딱히 할 일없이 지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같은 휴일에 누군가를 접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귀찮은가 보다. 주변에 있는 놈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죽상이 맺혀있는 걸 보면.

열심히 하라는 격려는 초회 한정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외무대신 입장에서도 귀찮겠지.

주마다 두 번씩 왔다갔다하는데 그때마다 나와서 연설 비스무리한  하자니 할 말도 딱히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남자들은 다들 하나같이 죽상을 하고 있는 반면에 여기저기 보이는 여성들의 얼굴 위에는 기대감이 듬뿍 묻어나오고 있었다. 제국 남성들이 그리도 마음에 들었던 걸까.


이쪽은 귀찮아 죽겠는데 저쪽은 행복에 겨워하고 있는 상황.


당연히 귀찮아서 눈이 뒤집히기 일보직전인 이들의 눈에 그 모습이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안 그래도  늘어져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시궁창처럼 변해버렸다.  와중에 살짝 웃겼던 건 한 명도 나서서 뭐라고 하는 놈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래가지고 제대로 겨뤄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뭐, 우리만 이런 건 아닐테니까.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며 주머니 안에 넣어둔 준비물들을 체크했다. 다행히 빼놓고   없는  같았다.


주머니를 채우고 있는 것중에서도 가장 또렷한 존재감을 지닌 건 다름아닌 카트린느한테서 타낸 모발용 영양제였다. 꼬리털에도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척봐도 적당히 끈적끈적해보이는 것이  내가 원하는 질감 그대로였으니까.


'든든하구만.'


덕분에 국밥이라도 한 그릇 때린 것 같은 든든함을 느끼고 있자니 저번에 제국 측 숙소까지 우릴 인도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를 따라 제국  숙소로 향하다보니 저번처럼 제국 측에서 우리 측으로 보내는 놈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들 사이에서 시달려야 한다는 사실에 귀찮음을 느낀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놈들의 분위기도 우리 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게 동병상련이라는 것일까.

저번과는 다르게 서로를 향해 짠한 시선을 던지는 사이 제국 측 숙소는 한층 더 가까워졌다.

지목이 이루어진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저번하고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가장 먼저 지목을 받은 이가 나라는 것 정도?

다들 상대가 정해진만큼 오늘은 끝까지 지켜보고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오늘도 특유의 절제된 카리스마를 흩뿌리며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던 2황녀의 부름에 응해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보니 그녀가 저번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게 관심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어보이더니 내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헉헉댔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걸까.


오늘의 교류 장소는 정원 외곽에 자리한 자그마한 온실이었다.

'이런 곳도 있었구나.'


나무에 가려서 몰랐었는데 말이다.


우리쪽에도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온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안!"


반가움이 듬뿍 담긴 목소리와 함께 흙먼지의 폭풍이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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