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바이올라 시점****
문득 겁이 났다. 벌써부터 이렇게 보고 싶은데 다음에 그가 찾아올 때까지 대체 어떻게 버티나 싶었으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만남횟수를 최대한 늘려달라고 할 것을.
그랬다면 그를 기다리는 시간또한 짧아졌을텐데 말이다.
그저 마음만 급해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서 덥썩 수락했던 게 화근이었다.
하다못해 일주일에 세 번만 됐더라도 평일 중에 한 번은 더 만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주말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이제 막 헤어진 참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목이 타는 걸 보면 내일은, 모레는 또 어떨지 감히 상상하기 조차 두려웠다.
자신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두 번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지금 보니 일주일에 세 번도 한참 모자라 보이는데 말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네 번은.. 아니, 그것도 모자라다. 최소 일주일에 다섯 번은 만나야 이 갈증을, 치솟는 욕망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은 이틀도 상당히 탐이 나긴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할테니까..'
그 정도야 눈 딱 감고 양보할 수 있었다.
'어떻게..'
지금이라도 바꿀 수 없냐고 물어볼까?
물론, 말만큼 쉽게 바꿀 수 없으리라는 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거창한 조약같은 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것또한 국가간의 합의 끝에 다다른 결론인 것은 매한가지니까. 이제와서 두 번으로는 부족할 것 같으니까 더 늘려달라고 한들 저쪽에서 순순히 '그럽시다.'라고 하며 고개를 끄덕일 일은 없을 것이다. 듣자하니 저쪽은 두 번도 많다고 보는 것 같다고 그랬으니까. 그런 상대에게 더 많은 양보를 끌어내려면 그보다 몇 배나 되는 것을 내어줘야할테지.
'진짜 쓸데없이 욕심만 많아서는..'
하여간에 이안만 빼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놈들이었다. 자존심만 이상할 정도로 높아가지고 자기들이 이쪽하고 맞먹는 존재인줄 아니까. 제국의 3분지 1밖에 되지 않는 땅떵어리만 겨우 건사하고 있는 주제에 말이다.
힘들다는 걸 머리로 이해하고 있음에도 자꾸만 '혹시..'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간절하게 부탁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한들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주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언니라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때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왕국에 소속된 남성과 만남을 가지고 싶다는 자신의 발언에 난색을 표하면서도 결국에는 그걸 성사시킨 장본인이 바로 언니였다. 그런만큼 이번에도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정 안되면 이안만 따로 불러낸다던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른 것들은 필요 없으니까.'
이안만 있으면 된다. 이안만 있으면.
'조금 더 흔적을 남겨주고 갔으면 좋았을텐데..'
괜히 아쉬운 마음에 하도 맡아댔더니 이제는 그의 흔적이 한결 옅어진 것같은 꼬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거기서부터 올라와 엉덩이와 꼬리뼈를 찌르르 울리게 만드는 감각을 느끼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안이 원래 앉아있던 자리 앞쪽에 놓여진 찻잔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다.
안에 든 걸 마셔주던 주인을 잃고 반쯤 비워진채 방치된 그것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온 순간 마음 속에서부터 탐욕이라는 감정이 미친듯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게 살짝 혼란스러웠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저런 것에 욕망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반사적으로 그것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것은 그의 흔적이 주는 달콤함을 몸이 기억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황녀로서 자라며 받아온 교육들과 얼마 전까지는 그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던 본능이 마구잡이로 충돌하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아무리 속으로 되뇌여봐도 그가 사용하던 찻잔을 거머쥔 손은 나아가길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꾸준히 전진하던 것이 마침내 입술에 살짝 닿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가 나간 뒤로 굳게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오랜만에 어렸을 적으로 돌아간 것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꼭 마치 시녀들 몰래 간식을 빼먹다가 딱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어휴."
어쩜 울려퍼지는 한숨소리에 담긴 것마저도 그리 똑같은지..
다만 그때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 자신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이가 시녀가 아니라 언니라는 점이었다.
한심하다는 감정과 어이가 없다는 감정이 적절하게 뒤섞여있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괜히 민망해져서 막 입술에 가져다 붙였던 것을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민망했으니까.
이 정도로 민망한 건 한창 성에 눈뜨던 시절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가 다음부터는 좀 조용조용하게 하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이안은 잘 갔어?"
화제전환을 시도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살결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민망함을 차마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
"조금.. 천천히 보내도 됐을텐데."
그래도 10분 정도는 더 있게 해도 괜찮았을텐데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 얼마 안 되는 시간마저도 아깝게 느껴져서 은근슬쩍 아쉬움을 어필해본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하고 제법 날카롭게 갈린 헛웃음 소리가 언니의 입술 사이를 뚫고 튀어나왔다.
"조금 더 있었으면?"
그 뒤로 이어진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저런 질문을 하는 걸까.
"왜? 무슨 문제라도.."
"문제? 당연히 있지. 그 남자가 여기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렀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어떻게 됐을 것 같냐니. 그야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가..
"전처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시간이 되서 돌아갔을까? 정말로?"
"..."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그럼 또 뭐가 있단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이유모를 꾸중까지 듣고 있자니 괜시리 마음이 불퉁해지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혼나는 이유조차 모르고 혼나는데 거기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일만한 이는 항의할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 뿐일테니까.
그래서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그 남자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여기 머물렀으면 너한테 덮쳐지고도 남았을 걸."
뒤이어 들려온 말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렸으니까. 어이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 말을 선뜻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안을 옆에 앉혀두고 있었을 때의 자신은 솔직히 좀 많이 아슬아슬한 상태였으니까. 그동안 쌓아온 수양이 적지 않아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그를 깔아뭉개며 그의 위에 올라타고도 남았을 것이다.
물론, 자신에게도 변명할 거리는 있었다.
상대방이 그토록 맛있는 냄새를 풀풀 풍겨대는데 그걸 맡고 이성이 흐릿해지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좋은데 어떡하라고."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안을 만나게된 자신과는 다르게 언니는 아직 운명의 상대를 만난 적이 없는 만큼 그 대상에게서 풍겨져나오는 냄새가 얼마나 여자를 미치게 만드는지 꿈에도 모를테니까.
"하.."
그러니 저렇게 이해를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 맘 같아서는 자신이 맡은 냄새를 어디 주머니같은 곳에라도 모아다가 맡게 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마 그걸 맡는다면 언니도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언니가 몰라서 그래.. 언니도 한 번 맡으면 절대로 못참을 걸."
해서 소심하게 항변해봤더니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덕분에 언제까지고 꾸중을 쏟아낼 것만 같던 입이 한순간이나마 꾹 다물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에 불과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자. 그렇다 쳐.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외에도 꾸중할 거리가 남은 걸까.
이런 상황에서 만남 횟수를 늘려줄 수 없겠냐고 물어봐야 상대방의 화만 돋굴 게 뻔했기에 입 꾹 닫고 침묵을 지키고 있자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꼬리를 내어줬냐는 꾸중이 귓가로 울려퍼졌다. 이번에도 할 말이 없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그건 자신이 생각해도 욕망에 휩쓸려 무턱대고 저지른 감이 있었으니까.
"그 남자가 수인에 대해 몰랐기에 망정이지 그 제안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면.. 하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는 언니를 보고 있자니 할 말은 더욱 궁색해졌다. 저렇게 진저리를 쳐대는 것도 이해가 됐으니까.
만약 이안이 자신의 제안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면?
이제 막 쌓아올리기 시작한 그와의 관계가 파탄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국가 간의 문제로까지 번지게 되었을테니 말이다.
상대가 남자라고 해서 방심할 수가 없는 것이 듣자하니 이안은 교류전에 참가하는 입장으로 이곳까지 온듯 했으니까. 그 근육이라고는 한점도 찾아볼 수 없었던 호리호리한 몸으로 어떻게 선발전인지 뭔지를 통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왕국 측에서도 저렇게 선뜻 남자를 자신들의 대표랍시고 내세운 걸 보면 분명 다들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이라는 소리다. 거기에 남자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아마 다들 그의 씨앗을 받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지 않을까.
생각이 원래 궤도를 탈선해서 거기까지 다다른 순간 괜히 상상했다 싶었다. 드디어 그를 만났다는 생각에 마구잡이로 들떴던 기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착 가라앉아 버렸으니까.
"어, 언니.. 이안 말이야. 혹시 약혼자가 있다거나 그렇지는 않겠지?"
부디 그렇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서 내뱉은 말이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매력적인 남자를 주변에서 가만히 내버려뒀을리 없으니까. 주먹만한 보석이 바닥을 굴러다니는데 그걸 보고 손을 뻗지 않는 이는 보석의 모습을 볼 수 없기에 그것의 존재또한 알지 못하는 장님뿐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건 딱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솔직히 없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말이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가슴 안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뭔가가 쿵하고 내려앉았다.
동시에 고개를 치켜든 것은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만약에 이안에게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면..
그래서 자신을 받아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자신은.. 자신은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포기였지만, 그건 떠오른 즉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으니까. 그토록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상대를 대체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
설령 어찌어찌 포기한다고 한들 자신에게 남는 건 그를 갈망하며 비참하게 말라죽는 미래뿐일 것이다.
그의 존재를 처음으로 자각하고 나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러했듯 시름시름 앓으면서 그 무엇하나 제대로 못하게 되겠지.
기약조차 없는 기다림이 기다리는 입장에서 얼마나 비참하고 힘든 일인지는 지난 며칠동안 충분히 맛보았다. 헌데 평생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럴 바엔 차라리..'
속으로 그리 되뇌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꼬리를 움켜쥐는, 자비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손길과 함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감각이 몸을 타고 올라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것들과 거칠게 충돌했다.
"무, 뭐하는 거야! 꼬리는 왜 만지는데!"
"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말라고 그랬다. 왜? 불만있어?"
불만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차마 그걸 입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저렇게 '꼬우면 한 판 하던가?'라는 느낌으로 눈알을 희번덕거리고 있는 언니한테 덤벼봐야 좋은 꼴 보지 못할 거라는 것쯤이야 그동안 얻어맞은 경험을 통해 충분히 학습한지 오래니까.
"진정 좀 해. 송곳니도 다시 집어넣고."
"..."
"응? 언니가 어떻게든 해볼테니까."
"저,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하니 귓가로 울려퍼진 건 피식하고 가볍게 웃는 소리였다. 그와 함께 머리 위로 올라와 그것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고 있자니 괜히 얼굴이 홧홧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몸 관리만 생각해. 알고 있지? 몸 상태 엉망이란거?"
그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안의 존재를 자각하고 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며칠동안 잠을 설친 상태니까. 자고 싶어도 눈을 감으면 광장에서 보았던 이안의 얼굴과 옅게 풍겨오던 그의 체취가 아른거리는 느낌이라 차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뭐라도 해보려면 일단 교류전에서 저쪽을 완전히 찍어눌러야 해."
그렇게 되면 없던 가능성도 생길지 모른다는 말에 비로소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걱정하지마."
자신을 상대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안한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
"언니가 나설 일조차 없게 할테니까."
아무래도 교류전에서 최선을 다해야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