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귓가로 울려퍼지는 디아나의 목소리에 목을 감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두들겼다.
걱정하는 건 이해가 되지만 이렇게 힘을 꽉 줘서야 대답을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가 없으니까.
다행히도 그런 내 뜻이 무사히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내 몸을 꼬옥하고 끌어안고 있던 디아나의 팔이 스르륵 풀어졌다.
동시에 그녀가 조심스레 몸을 떨어뜨렸다. 보아하니 내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
그렇게 디아나가 몸을 뒤로 물리는 타이밍에 맞춰서 얼굴 위로 미소를 띄워올렸다. 물론,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한 용도였다.
"너무 걱정 안하셔도 돼요. 정말 별일 없었으니까."
미소에다가 말까지 곁들였건만 효과가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저렇게 못 믿겠다는 듯이 반문하는 걸 보면.
"그럼요. 그냥 차 좀 마시면서 이야기 좀 한 게 전부인데요."
그러니 네가 걱정할만한 일같은 건 생길 건덕지 자체가 없었다는 느낌으로 말하니 디아나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그렇게 너무 앞서나갔다는 사실을 두고 민망해하던 것도 잠시,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디아나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서야 좀 안심이 된 걸까.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건 작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그 소리는 명백히 내게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맡는 소리였으니까.
'이것 참..'
전과가 있으니 뭐라 하기도 좀 그렇고..
의심인지 걱정인지 모를 것이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듯한 디아나를 보며 내심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내게서 별다른 이상징후를 발견하지 못한 건지 그녀가 내 어깨에 파묻고 있던 것을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그 타이밍에 맞춰서 얼굴 위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워올렸다.
그리고는 마침 잘 됐다는 식으로 그녀들을 방 안에 위치한 접객용 테이블 쪽으로 불러들였다.
"왜?"
"이래저래 알아낸 게 좀 되거든요."
열심히 수집해온 정보들을 공유해줄테니까 얼른 자리에 좀 앉아보라는 뜻으로 비어있는 옆자리를 팡팡 두들기니 디아나한테 선수를 빼앗긴게 그리도 분했는지 그 어느때보다 기민한 움직임을 선보인 앨리스가 그대로 내 옆자리를 꿰찼다.
'아니, 무슨 액션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소파 등받이 부분을 뜀틀 뛰어넘듯 뛰어넘을 필요까지야 있었나?
앨리스가 보여준 역동적인 움직임에 속으로 허허로이 웃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살짝 과하게 행동한 게 민망하지도 않은지 생글생글 웃고 있던 앨리스가 이내 날 향해 손을 뻗어왔다. 그런 그녀의 두 눈은 어느새 가늘게 변해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건 고양이였다. 먹잇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고양이가 생각난달까. 그런 모습을 한채 날 향해 손을 뻗어온 앨리스가 이내 내 옷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무슨 털이.."
그리 중얼거리는 앨리스의 손가락 사이에는 누가봐도 바이올라의 것임이 분명한 은빛의 털이 끼어있었다. 그것도 세 가닥이나 말이다.
열심히 꼬리를 만져줄 때 묻었던 걸까.
저건 또 어떻게 발견했담.
분명 숙소로 들어오기 전에 옷을 열심히 털고 들어왔는데 말이다.
아무튼 내 옷깃인지 어디인지 모를 곳에 달라붙어있던 은빛 털을 발견한 앨리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딱 보니까 저대로 방치해두면 내게도 그리 좋을 것 같지는 않아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얼굴 위에 띄워올린채 입을 열었다.
"아, 거기서 묻었나보네요. 그 분 은근히 털이 많이 빠지시더라구요."
그리 말하면서 혹시라도 다른 곳에도 같은 게 묻지는 않았을지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 곳곳을 손으로 털어내는 척을 하니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아, 그래?"
피식하고 웃은 앨리스가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던 것을 뒤로 휙 던져버렸으니까.
그렇게 잠깐의 위기가 있긴 했지만 무사히 넘기고 난 뒤, 오늘 하루동안 알아낸 것들에 적당히 살을 붙여서 늘여놓았다.
내 옆자리를 차지한 앨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노려보던 디아나와 그런 디아나를 향해 '꼬우시면 저보다 빨리 앉으셨어야죠.'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던 앨리스는 내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내 말에 집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제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하는 상대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만에 하나 져버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지금처럼 온건한 형태의 교류가 아니라 번식을 목적으로 하는 교류에 내가 끌려가게될 가능성이 매우 컸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 거고.
"3황녀가 몇 번째로 나설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비도는 통하지 않을 거에요."
앨리스와 시선을 맞춘 채 그리 말하니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특기라 할 수 있는 비도술을 폄하당한 것 같아 살짝 자존심이 상한 모양인데..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3황녀가 보여주었던 어마어마한 반사신경과 편린이나마 엿보았던 신체능력을 결부해서 생각해보면 그녀에게 있어 멀리서 날아오는 비도를 피하는 건 일도 아닐테니까.
그러니 혹시라도 바이올라를 상대하게 될 경우 앨리스의 장기라 할 수 있는 비도술은 견제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부분까지 생각한다면 그조차도 되지 못할 수도 있었고.
처음 몇 번이야 던질 기회가 있겠지만 간격이 좁혀지고 나서부터는 던질 틈을 주질 않을테니 말이다.
앨리스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 점을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럼 쭉 근접전으로 가게될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네.."
내가 들려준 것과 며칠 전에 봤던 3황녀의 모습을 합친 걸 머릿속으로 그리며 그녀와 근접전으로 맞붙는 광경을 나름대로 상상해보려는 것일까. 앨리스가 손으로 턱을 괸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일견 평온해보이는 표정.
허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상상 속의 그녀가 꽤나 고전하고 있는 모양이다. 눈썹이 한 번 꿈틀대고 나서부터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거칠게 꿈틀대는 걸 보면.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눈썹을 꿈틀꿈틀대던 앨리스가 한숨과 함께 내놓은 한 마디는..
"어렵겠는데.."
바로 그것이었다.
솔직히 조금 놀랬다.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그런 쪽으로 은근히 자존심이 쎈 것이 바로 내가 아는 앨리스니까.
한편으로는 그녀가 그런 결론을 내놓은 것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상성도 좋지 않을 뿐더러 정정당당하게 맞붙는 건 그녀가 배우고 사용해온 방식과는 정반대의 것일테니까. 상대의 수준이 자신보다 아래라면 딱히 문제될 게 없겠지만 비슷하거나 위라면 앨리스는 필연적으로 상당한 패널티를 떠안게 되는 셈이니..
그래도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보려는 것인지 뭐라고 꿍얼거리다가 다시금 생각을 잠겨버리는 앨리스에게서 시선을 떼어내 맞은 편으로 돌렸다.
어쩐지 아까 전부터 말이 뜸하더라니 생각에 잠겨있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황녀라는 위치를 고려하면 아마 그녀가 마지막 순서가 될텐데 그렇다는 건 그녀를 넘어서지 않는 한 제국 측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소리니까. 상황이 어찌될지 모르는만큼 디아나로서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을 터.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디아나가 어느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정보가 부족해."
"어쩔 수 없죠. 대련같은 걸 한 것도 아니니까요."
"아, 아니 뭐라 한 거는 아니고.."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던 디아나가 이내 '흠..'하고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얼굴 위로 내비췄다.
"왜 그러세요?"
"아, 다른 사람들도 뭔가 알아낸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거라면 나중에 취합해서 알려주지 않을까요? 보니까 한 명씩 불러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볼 생각인 것 같더라구요."
"그래?"
"네."
내가 그쪽으로 불려가지 않고 곧바로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내 차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내 앞에 있던 놈들의 차례가 다 끝나면 그때 날 부르지 않을까?
"그러면 스승님한테 미리 여쭤봐야겠네.."
그리 중얼거리며 다시금 고민 속으로 잠겨드는 디아나를 향해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를 쳤다.
'빗 챙겨가서 그걸로 빗어주면 좋아할 것 같은데..'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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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라 시점****
-언젠가 때가 된다면 운명의 상대가 네 앞에 나타날 거란다.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뻔질나게 들었던 그 말을 그녀는 솔직히 믿지 않았다.
너무 형편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때가 된다면 나타난다니.
대체 그놈의 '때'는 언제고 설령 그 말대로 운명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난다고 한들 그 운명의 상대란 작자를 무슨 수로 알아본단 말인가?
한 번은 정말로 이해가 되질 않아서 그것에 대해 물은 적도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운명의 상대라는 작자는 어떻게 알아보면 되는 거냐고.
그런 자신의 물음에 아버지는..
-운명의 상대가 네 눈앞에 나타난 순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란다.
라고 말하며 얼버무리셨다.
그래서 그 말을 어린아이에게 동심을 심어주기 위해 적당히 지어낸 것이라 치부했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는 말이다.
'이안.. 이안..'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던 그의 이름을 끊임없이 되뇌이며 바로 조금 전까지 그가 앉아있었던 자리를 향해 코를 가져갔다.
그 순간 눈으로 들어온 것은 그가 깔고 앉고 있었던 쿠션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의 체취가 묻어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것의 모습이 시야 속으로 파고들어온 순간 그대로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었다.
부욱-
쿠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떨어져나왔다.
못 사는 곳이라 그런지 몰라도 가구도 어쩜 이리 허약한지..
아무튼 그렇게 뜯어낸 것에 그대로 코를 파묻었다.
동시에 코쪽으로 최대한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콧속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아찔할 정도로 달큰한 향기였다. 어찌나 달큰한지 입에 침이 가득 고이면서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대체 평소에 뭘 먹고 살면 이토록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걸까.
궁금했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동시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운명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는 아버지의 발언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그야 당연히 알아볼 수밖에 없겠지.
이토록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상대를 어떻게 못 알아본단 말인가.
열심히 숨을 들이켜가며 쿠션에 남아있는 그의 체취를 만끽하고 있음에도 만족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는 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갈증만 더해가는 느낌이었다.
해서 쓸모를 다해버린 쿠션을 대충 뒤로 내던지고는 바로 조금 전까지 그가 열심히 어루만지던 꼬리를 입쪽으로 가져왔다.
아까 그렇게 열심히 만져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꼬리에서 그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조심스레 혀를 내밀어 그것을 핥았던 건 바로 그때문이었다.
냄새에서 맛이 날리 없건만 꼬리와 맞닿은 혀끝에서 짜릿짜릿한 맛이 났다.
끽해봐야 흔적에 불과한 것을 더듬거리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실제로 그를 취하게 된다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두려워서 배 안쪽이 꽈악하고 죄어들면서 그 안쪽에 자리한 것이 심장이라도 된 것마낭 쿵쿵 뛰어대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은 채 힘껏 숨을 들이키며 그 어느 곳보다 짙은 냄새를 풍기는 그의 물건을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여 격렬하게 엉덩이를 흔들고 싶었다. 그렇게해서 분명 찐득찐득하고 물컹거릴게 분명한 그의 것을 자신의 안에 듬뿍 받아내고 싶었다.
그리하여 태어난 아이는 분명 엄청나게 귀여울테지.
지금 제가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지 못한채 순진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자신의 꼬리를 어루만지던 그처럼 말이다.
그랬다.
제국과 다른 인종의 생태에 무지한 그는 꿈에도 몰랐겠지만 동물의 귀와 꼬리를 달고 살아가는 수인족에게 있어 꼬리나 귀를 만지는 것은 연인 사이에서도 쉬이 하지 않는 농밀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제국에서는 수인족의 꼬리나 귀 부분을 함부로 쳐다보지 않았다.
하물며 남성이 여성 수인을 상대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마음껏 따먹어달라고 교태를 부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는 아무 것도 모른채 한 행동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순진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그런 행동을 하다니..
'아.'
너무 자극적이었다.
자신의 꼬리를 어루만지는데 푹 빠져있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꼬리의 털이 쭈뼛하고 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