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69)화 (169/366)



〈 16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니들이 교류인지 뭔지를 하겠다며 여기까지 부른  아니었느냐.


가만히 앉아서 눈치만 보고 있지 말고 뭐라도  해봐라.

대충 그런 뉘앙스로 내뱉었더니 돌아온 건 상당히 격렬한 반응이었다. 도대체 내 말 어디에 저 정도로 놀랄 구석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힘없는 느낌으로 늘어져있던 3황녀의 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쫑긋하고 치솟았다.


내 말이라면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귀를 쫑긋하고 세운  묘하게 안절부절 못 하는 느낌을 온몸으로 뿜어내던 3황녀가 이내 아차하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리며 황급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렇게 앞으로 뻗어진 그녀의 손이 가리킨 곳은 다름아닌 그녀의 맞은 편 자리였다. 물론, 그곳은 주인없이 비워져있는 상태였다.


"그.. 앉아..요."


누군가에게 존대를 한다는 행위 자체가 익숙치 않은 걸까. 어색하기 짝이 없는 존댓말이 그것만큼이나 어색한 미소를 그러내고 있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표정부터 시작해서 지적하고 싶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입 꾹 닫고 일단 자리에 앉았다. 안 그래도 여기까지 걸어온다고 제법 혹사당한 다리가 욱씬거림으로 열심히 항의를 해오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자, 그래서..'


바라는대로 자리에 앉아줬는데 말이다. 설마 이대로 앉아만 있다가 끝낼 생각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고 있던 3황녀가 다시 한  입을 열었다.

"차.. 좋아해..요?"


"네, 뭐.."

"그럼, 한 잔 할래..요?"


어색하다.

어색해서 죽을  같았다.


아니, 반말이든 존댓말이든 하나를  정할 것이지 대체 저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한 존댓말로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데 덕분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덜미를 따라 닭살이 오소소 돋아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는 낯짝을 유지하고 있었던 건  이상으로 어색해서 죽으려고 하면서도 내게 정중한 여자라는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3황녀의 모습이 은근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봐라.

처음 봤을 때만 하더라도 화끈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야성미를 있는 힘껏 뿜어내던 미녀가 이성한테 잘 보이기 위해 어울리지 않게 얌전한 척, 예의바른 척 하며 한편으로는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낯간지럽게 느껴져서 끙끙 앓는 모습을 말이다.

뭐,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3황녀가 충분히 미녀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갈  있는 외모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고 선발전 때 맞붙었던 놈처럼 고릴라를 연상시키는 야성미를 뿜어내는 타입이었다면 귀엽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왜 저러나 싶었겠지.


'이런 게 멍뭉미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듯한 단어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대방이 늑대의 형질을 지녀서 그런지 몰라도 그 단어가 참 잘 어울린다 싶었으니까.

어찌보면 디아나하고 비슷한 느낌이기도 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타고난 것과 꾸며낸 것의 차이라고 해야할까.

디아나가 보여주는 멍뭉미가 타고난 것이라면 이쪽은 안 어울리는 짓을 하다보니까 생성된 것이니만큼 그런 느낌이 더욱 강했다.


 마치 고양이 흉내라도 내보려는 것처럼 커다란 박스 안에 몸을 구겨넣고 있는 호랑이를 보고 있는 것만같은 느낌?

사람한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건 여러 생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그 느낌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자꾸만 몸을 타고 기어올라오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인상  번 쓰지 않고  웃는 낯을 유지한채 그녀를 상대해줄 수 있었다.

아마  덕분이었을 것이다.

처음 내게 말을 걸어올 때만 하더라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3황녀의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풀어질  있었던 건 말이다.


3황녀가 날 향해 스스로 밝히길 그녀의 이름은 바이올라였다.


2황녀와 똑같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둘이 쌍둥이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름대로 추측한 적이 있긴 했지만 설마 둘이 이름까지 비슷할 줄이야.


왠지 모르게 악기가 생각나게 하는 이름이라 솔직히 좀 웃겼다.


덕분에 자꾸만 새어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다시 목구멍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넣고 있자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바이올라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왔다.


"그 혹시 이름, 아니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쯤되면 되지도 않는 존댓말을 놓아줄법도 한데 말이다. 자기도 혼란스러운지 버벅버벅대면서도 끝끝내 존댓말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내심 쓴웃음을 짓던 것도 잠시 이왕 질문을 받은 김에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힘들게하는 저 놈의 존댓말을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이안입니다."


"그렇군..요."


"예, 그리고 굳이 무리해서 존대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이 반가웠나 보다.

그녀의 등뒤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던 은빛의 꼬리가 일순간 꼿꼿하게 펴졌다. 그러더니 전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는 광경이라 그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니 사람들이 이래서 최면에 걸리나 싶더라.

아무튼 누가봐도 내 제안을 듣고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꼬리하고는 다르게 바이올라는 은근히 내 눈치를 봤다. 내 입으로 직접 말을 놔도 좋다고 말하긴 했지만 막상 그것대로 하자니 덥썩 받아들이긴 좀 그랬던 모양.

덕분에 우리 둘 사이로 내려앉게된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을 깨뜨린 건 타이밍 좋게 배달된 티타임용 세트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시녀의 허리쯤 오는 3단 트레이를 가득 채우고 있던 것들이 시녀의 손에 이끌려 테이블 위로 소속을 옮기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유일한 제국의 황녀쯤되면 간단한 티타임도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내가 드러누워서 뒹굴거려도 넉넉할 것 같던 접객용 테이블이 순식간에 가득 차버렸다.

그것들 중에서 유독  시선을 잡아끈 것은 내몫으로 나온 컵 안을 반쯤 채우고 있는 갈색의 액체였다.

'초콜릿인가?'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으면서도 다시 한 번 맡아보면 아닌  같기도 했다. 그 긴가민가한 느낌 때문에 그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더니 바이올라의 눈에는 그런 내 모습이 조금 다르게 비춰졌던 모양이다.

"아, 혹시 처음 보려나..? 제국에서만 나는 걸로 만든 차인데.."

그냥 먹어도 되지만 그러면 조금 쓰게 느껴질 수도 있다면서 그녀가 곁가지로 딸려나온 우유를 제 몫의 찻잔 안으로 쏟아부었다.


쪼르르륵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짙은 갈색을 띄고 있던 액체 사이로 흰색의 액체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색이 연갈색으로 변할 때까지 우유를 섞어준 바이올라가 그것을 그대로 입쪽으로 가져갔다.

이렇게 마시면 된다고 시범이라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은 딱 하나 뿐이었다.


'보니까 초콜릿같은데 먹어도 되나?'

늑대도 따지고 보면 갠데 말이다.


뭐, 익숙하다는  들이키는 걸 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제게 집중된  시선이 살짝 민망했던 모양이다. 찻잔으로 반쯤 가려져있던 바이올라의 얼굴 위로 빨간색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콜록-"

결국 기침소리가 터져나오고 말았다.

바이올라에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사고가 대참사로까지는 번지지 않았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빠르네.'

덕분에 그녀가 가진 운동능력을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렇게 엿보게 된 것은 내게 감탄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기침이 터져나오는 즉시 입가에 가져다 붙이고 있던 컵을 잽싸게 테이블 위로 돌려놓고 대신 옆에 놓여져있던 냅킨을 낚아채 그것을 이용해  입을 틀어막는데 반사신경이 말이 되질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딱 보니까 냅킨 한 장만으로는 부족해보이는데..


그래서  옆에 놓여져있던 것을 집어들어 그녀를 향해 건넸다.


내게 잘 보이고 싶어서 어울리지도 않는 짓까지 해가면서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었는데 대차게 실수한 건 물론 내게 역으로 '배려'까지 받은 상황.

그게 많이 속상하고 민망했던 모양이다.

냅킨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있던 바이올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런 식으로 민망해서 죽으려고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내 호의 자체는 거절하지 않았다.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좀 얼떨떨했다.

대체 내 뭘 보고 저렇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나 싶었으니까.

여자가 남자랑 한 번 자보려고 온갖 짓을 다하는 세계라 해도 생각해보면 앨리스도 그렇고 디아나도 그렇고, 레이시아도 그렇고 늘 먼저 들이댔던 쪽은 나였다. 심지어 카트린느마저도 그랬다.


그들이 주인공 놈한테 관심을 쏟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돌이키기 힘드니 그걸 원천봉쇄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해도 결국에는 그랬다.


헌데 이렇게 내게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것마냥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상대와 마주하게 되니 뭐랄까..

'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레 건은 바이올라 개인에게는 당장이라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쪽팔린 일이었을테지만 우리 둘에게 있어서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그걸 기점으로 어색하기 그지없었던 분위기가 확 풀어졌으니까.

물론, 내 노력도 한몫하긴 했다.


하는 짓이 귀여워서 어울려줬더니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할 때는 언제고 금방 회복해서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더라.

내 눈치를 살피기 바쁠 때부터 알아차린 사실이긴 하지만 바이올라는 내게 관심이 아주, 매우 많았다.

덕분에 웃지 못할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왕국의 체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어느  소속이라고 물어오길래 기사부에 소속되어 있다고 답을 하니 돌아온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미소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이 몸에 얽힌 사정을 일일히 설명하자니 그녀와 선발전에서 맞붙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으니까.

다른 참가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야 지든 이기든 딱히 상관없다는 입장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이이고 돌아가는   폼나지 않겠는가.


'그 질문'이 날아든  그런 식으로 비교적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고 가던 와중이었다.

"..네?"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고, 그렇기에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았나 보다.


"꼬리 만져보고 싶은  아니었어..? 자꾸 쳐다보길래.."

방금 들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걸 보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계속 그쪽에 시선을 줬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게도 할 말은 있었다.


'아니..'

저렇게 탐스럽고 풍성한 것이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시선이 안 가고 배기겠냐고.

그나저나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만져보겠냐고 제안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 세계의 수인들은 내가 만나본 이들과는 생태가 좀 다른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서 넘어가려는 찰나 걸려든 것은 누군가 움찔대는 듯한 기척이었다.


 기척은 창가 쪽에서부터 전해져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둘을 내버려두고 제 할 일을 하러간 바이올렛으로부터 말이다.

꼭 마치 나서려다가 말고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다시 자리에 눌러앉은 사람마냥 몸을 움찔대는 그녀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온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방금 바이올라가 내게 한 제안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던질만한 제안은 아니라는 것.

'설마..'

내가 다른 인종에 대해 무지하다는 걸 지금까지의 대화를 통해서 파악하고는 날 속여먹으려고 드는 건가? 지금?

그리 되뇌인 순간 내 대답을 기다리듯 날 향해 물끄러미 날아와 꽂히는 바이올라의 시선이 내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느껴졌던 건 분명 기분탓만은 아니었을 거다.

'허..'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하더니만..


잘 보이려고 낑낑대는 꼴이 귀여워서  어울려줬더니 사람을 속여먹으려고 들어?

이 괘씸한 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걸 놓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던 건 그걸 이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될까요?"


해서 조심스레 물은 순간 돌아온 건 당연하다고 외치는 것 같은 격렬한 주억거림이었다.


그런 그녀의 답변을 확인한 순간,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왕 이렇게 상호간의 합의도 끝난 김에 바로 시작하자는 것처럼.

내 행동이 바이올라 입장에서는 상당히 저돌적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살짝 당황한 듯 몸을 움찔대던 것도 잠시, 살짝 몸을 틀어서  반대쪽으로 돌아앉은 그녀가  향해 제 꼬리를 들이밀었다.


그렇게 눈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한 은빛의 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끼앙..?!"


건방지기 짝이 없는 그것을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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