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대체 어디로 향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딘가를 향해 바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바이올렛의 뒤를 따르고 있자니 비로소 알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꼬리를 친다.'라는 말이 어째서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분명 그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람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과 비슷하거나 똑같은 경치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살랑-
저번에 광장 비슷한 곳에서 봤을 때처럼 몸에 쫙 달라붙는 단정한 제복으로 몸을 감싼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엉덩이 쪽에서 튀어나와 있는 은빛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탐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그러니까..
'만져보고 싶네.'
보고 있으면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해야할까. 혹시 내가 약을 복용하지 않았을 때처럼 저 꼬리에서도 보는 이를 유혹하는 성분같은 게 나오기라도 하는 걸까.
꼭 고양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그 놈들이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장난감에 왜 그리 사족을 못 썼던 건지 알 것 같았다.
그야 저런 게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면 당연히 잡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겠지.
그만큼 탐스럽기 짝이 없는 꼬리였다. 만지면 어떤 감촉이 손바닥 안으로 감겨들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목도리 두르듯 목에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도 은근히 들었다. 딱봐도 굉장히 따뜻할 것 같은 게 저것 하나만 있으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거뜬하게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나 피부를 관리받듯 저것도 따로 관리를 받든 걸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커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잔털 하나 삐져나오지 않은 모습은 말이 되질 않으니까.
아니면 다른 건 몰라도 꼬리만큼은 본인이 직접 관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양이 년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다른 건 몰라도 꼬리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본인이 직접 관리하곤 했었으니까.
'그나저나..'
이상하단 말이지.
아까 옹기종기 모여있던 장소를 떠날 때부터 한 번 흔들리는 일 없이 쭉 곧은 선을 유지하고 있는 바이올렛의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한 추측이 사실이었다면 지금쯤 뭐라도 반응이 왔어야 정상이니까.
헌데 아무리 눈을 굴려봐도 그녀에게서 내가 원하는 징조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내 추측이 틀렸다는 뜻일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치부하고 넘어가자니 일전에 3황녀가 보여주었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늑대의 형질을 물려받은 덕분에 남들보다 최소 몇십 배는 민감할 코를 통해 당시 내게서 흘러나오고 있던 어떠한 냄새를 맡았던 게 아니라면 그녀가 생판 처음보는 날 두고 그런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으니까.
첫눈에 반한다는 가능성도 있기야 하지만, 솔직히 그건 말이 되질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게 아니라면 3황녀가 정확히 내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볼 이유가 없으니까.
'아니면 혹시..'
내게서 흘러나오고 있던 페로몬이 아니라 그냥 내 냄새에 반응한 건가?
그래서 별개의 개체인 바이올렛은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고?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속단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의 생태에 대해 딱히 아는 게 없었으니까.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언제까지 걸을 생각인 걸까. 아까 그곳을 출발해 걷기 시작한지 벌써 10분도 더 된 것 같은데 말이다.
처음에야 가려는 곳이 좀 먼가보다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슬슬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앞서 걸어가는 2황녀는 걸음을 멈출 기색이 개미 코딱지만큼도 없어보였다.
여태까지 지나쳐온 길이 산책로마냥 평탄하기 그지없는 길이었다면 이 정도로 지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형편없는 몸이긴 하지만, 디아나의 도움을 받아 나름대로 체력을 길러둔 상태였으니까. 언제까지고 고작 몇 분 걸은 것만으로 헉헉 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헉헉대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살짝 힘이 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게 계단 뿐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숨이 차는데 거기서 계단까지 오른다고 생각해봐라. 헐떡이지 않고 배기나.
그래도 그걸 티내자니 솔직히 좀 그래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훅훅 치고 올라오는 숨을 억지로 꾹꾹 눌러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힘들면 잡으세요."
사심이라고는 요만큼도 담겨있지 않아서 얼핏 무뚝뚝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곧게 뻗어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에 띄는 손 하나가 눈앞으로 불쑥 들이밀어졌다.
그 손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무언가를 꾸준히 단련한 것 같은 흔적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대뜸 내밀어진 것을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봤던 모양이다.
"아, 혹시 실례였다면 미안해요."
방금 제 발언으로 인해 혹시라도 내가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라도 됐던 건지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여기다가 손을 올려놓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쫙 펴진 채 내밀어져있던 손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 광경을 목도한 순간 반사적으로 그것을 향해 손을 뻗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대답이 살짝 늦긴 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타이밍만큼은 맞출 수 있었다.
"그럼, 다시 출발하죠."
내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던 용건은 그게 전부였다는 듯 일말의 미련도 없이 다시금 제가 나아가려 하는 길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손과 함께 내밀어진 목소리나 날 대하는 그녀의 태도같은 곳에서 사심이나 욕망같은 게 조금이라도 느껴졌다면 아마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헌데 그런 기색같은 건 전혀 느껴지질 않으니 그게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처음이었으니까. 이성을 앞에 두고 이렇게 사무적인 태도만 고수하는 여자는 말이다.
혹시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취향을 가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서 날 상대로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질 않는 것이고?
이 세계로 떨어지고 나서는 처음 접하는 타입이다보니 자꾸만 그녀에 대한 관심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막 이곳으로 들어섰을 때만 하더라도 두 황녀에 대한 관심도가 제로였음을 고려하면 말 그대로 엄청난 변화라 할 수 있었다.
그랬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 황녀한테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어에게 지시를 내리면서까지 이 자리에 참석했던 것은 디아나와 앨리스가 주인공 놈과 손을 잡고 작당한 것에 대해 뭐라도 더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딱 보니까 어지간한 변수가 아니고서는 둘에게서 빈틈을 끌어낼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해서 둘을 흔들어서 빈틈을 드러내는 걸 유도해볼겸 겸사겸사 그들의 계획 속에 포함된 존재가 황녀일지 성녀일지 알아보고자 그쪽하고 접촉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것인데..
막상 여기오니 생각이 살짝 바뀌었다.
'이이상 늘리는 건 버거울 것 같아서 자제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생각해보니 굳이 그렇게 둘을 집요하게 흔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으니까.
그럴 필요 없이 그냥 황녀든 성녀든 내가 먼저 포섭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 셋이서 열심히 모의한 것이 성공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훔쳐들었던 걸 떠올려보면 셋이 계획하고 있는 것이 성공에 다다르기 위해선 성녀인지 황녀인지 모를 존재의 도움은 필수라고 그랬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꼬셔줘야겠지.
손까지 꼭 잡고 있음에도 이쪽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질 않는 걸 보면 솔직히 쉬울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여전히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은빛의 꼬리에 시선을 고정한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살짝 앞에서 걷던 바이올렛이 우뚝하고 멈춰섰다. 그에 그녀를 따라 덩달아 멈춰서니 눈앞으로 나타난 것은 여성치고는 꽤 큰 편인 그녀의 신장보다 1.5배 정도는 커보이는 갈색의 문이었다. 여기가 목적지인 걸까. 무슨 길을 잃어버린 아이 손을 잡아주는 것같은 느낌으로 꼭 잡고 있던 내 손을 즉시 놓아버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여기서 어떤 식의 '교류'를 갖게 되는 걸까. 다른 여성들이 우리 측 남성들을 꾀어낼 때 자주 사용했던 티타임이라도 갖게 되는 걸까.
우두커니 서 있던 바이올렛이 닫혀있던 문을 두들긴 건 내 나름대로 추측을 이어나가고 있던 순간이었다.
순간 귓가로 울려퍼진 노크 소리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응..?'
도착한거면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지 뭣하러 문을 두들기나 싶었으니까. 그 생각이 뒤집힌 건 노크소리에 대한 대답이 방 안쪽에서부터 돌아오고 나서였다.
"왔어?"
반가움이 그득하게 담겨있는, 하지만 처음 듣는 것임이 분명한 목소리.
그것이 문틈 사이에서 흘러나와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건 왠지는 모르겠지만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문앞까지 쪼르르 달려나가 막 안으로 들어선 주인을 향해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강아지의 모습이었다.
그만큼 반가움이 짙게 담겨있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 뒤로 이어진 것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옷매무새라도 가다듬는 것 같은, 분주함이라는 단어를 소리로 바꿔놓은 것 같은 소리였고.
"들어와도 돼."
대체 정리할게 뭐 그리 많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멈출 줄 모르고 이어지던 부스럭대는 소리가 뚝 멎음과 동시에 이번에는 입장을 허락하는 말이 들려왔다.
주인에게 '기다려!'라는 말이라도 들은 것마냥 잠자코 서 있던 바이올렛이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방 주인이 허락한만큼 더는 머뭇거릴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곧장 문을 열고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그녀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우리를 그토록 반가운 목소리로 맞아주었던 이의 모습을 말이다.
'아니..'
그 며칠 사이에 대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디갔나 했더니만 방 안에 얌전히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3황녀의 모습은 며칠 전에 봤던 것하고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아마 특유의 은빛 머리칼과 등뒤에서 제법 격하게 흔들리고 있는 탐스러운 꼬리만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렇기에 더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 얼마 안 되는 시간동안 무슨 일을 겪었길래 조금 자유분방한 느낌이긴 해도 기본적으로 야성에 가까운 건강미를 풀풀 흩날리던 여자가 저렇게 초췌한 느낌을 풍기게 된 걸까.
3황녀의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머릿속으로 떠오른 물음표를 해결해보기 위해 나름대로 추측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날 안내하듯 방 안으로 들어섰던 바이올렛이 살짝 옆으로 비켜서더니 그대로 창가 쪽에 놓인 집무용 책상 쪽으로 향했다.
꼭 마치 날 여기까지 데려온 시점에서 자신의 역할은 끝이 났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잘 해보라고 누군가에게 선언이라도 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런 바이올렛의 태도 덕분에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 앞으로 놓여진 다소 뜬금없는 상황과 관련이 있어보이는 몇 가지 사실들을 말이다.
우선 날 지목한 건 바이올렛이 아니라 3황녀인듯 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쩐지..'
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관심이 없다 했더니만..
그리고 앞에 '못'을 붙여야할지 '안'을 붙여야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방안에 틀어박힌 3황녀를 대신해 날 여기까지 데려오는 것까지가 그녀에게 맡겨진 역할인 듯 했고.
'문제는 왜 여기 틀어박혔냐는 건데..'
솔직히 말하자면 황녀쯤 되는 인물이 머무르기에 적합해보이는 풍경은 아니었다. 방 안을 구성하고 있는 게 단촐해도 너무 단촐했으니까.
혹시 지금 저렇게 초췌한 느낌을 풀풀 풍기고 있는 것과 방 안에 틀어박힌 것 사이에 연관이라도 있는 걸까.
거기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딱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내 눈치를 엄청 본다는 것 정도?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지 아까 전부터 열심히 내 얼굴을 힐끔대는게 시선이 훑고 지나간 자리가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날 보여주었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성격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잠시 눈치를 살피는 척을 하다가 그대로 입을 열었던 건 그게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언제까지고 침묵 속에서 서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저는 이제 뭘 하면 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