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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이 되기 전에 (167)화 (167/366)



〈 16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내려앉은 침묵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여자는 그것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아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방에서 바짝 치솟은 긴장감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사이를 거닐 이유가 없으니까.


꼭 마치 무성한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회색 늑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위풍당당했으며 보는 이를 압도하는 뭔가가 그녀에게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사방에서 꼴깍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던 건 말이다.


그렇게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압도당하는 걸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던 가운데 살짝 의외였던 점은..


'혼자네?'


저번처럼 둘이 아니라 혼자라는 점이었다.


분명 동생으로 추정되는 3황녀와 같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뭐, 그것 외에도 2황녀를 대하는 다른 이들의 태도또한 의외였던 건 마찬가지였다.

눈빛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지만 2황녀를 향해 쏟아지고 있는 걸 보면 단순히 그녀가 황녀이기에, 그들보다 윗사람이기에 그런 눈빛을 보내는 게 아닌  했으니까.


나보다 윗사람이니까 대우해준다라는 느낌이라기 보다는 진심으로 인정한 이한테나 보낼 법한 눈빛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것들이 2황녀를 향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나름 한따까리   같은 이들도 그런 눈빛으로 2황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는 그게 가장 의외였다.


가까이서 본  아니라 멀리서 훔쳐본 거라 확신단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무력만 놓고 보면 명백히 3황녀 쪽이 위라고 봤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몸 자체가 달랐으니 말이다.


꾸준히 단련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였던 3황녀와는 다르게 2황녀는 그런 게 없었으니까.


'아니면 혹시..'

벗으면 굉장해지는 타입인가?

속으로 시덥잖은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는 사이, 또각또각하고 규칙적인 발자국 소리를 사방으로 퍼뜨리며 유유히 여성들 사이를 가로지른 2황녀가 마침내 우리 앞에 섰다. 그 순간 2황녀의 얼굴 위로 번져나간 것은 그녀의 눈동자만큼이나 정제된 미소였다.


그것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오름과 동시에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져있던 뭔가가 느슨해지는 느낌이 피부로 와서 와 닿았다.


순간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기묘하기 짝이 없는 감각이 피부를 통해 엄습해온 순간 바로 옆에서 안도의 기색이 짙게 느껴지는 한숨이 터져나왔던 걸 보면.

그렇게 미소 한 방으로 분위기를 비교적 편안하게 바꿔놓은 2황녀가 입을 연 건 그 다음이었다. 덕분에 나름 궁금했던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어볼 수 있었다.


스스로를 바이올렛이라고 소개한 2황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정돈된 무언가를 생각나게 했다.

동시에 살짝 차가웠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하다고 해야할까.


기본적으로 차갑게 느껴질만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지만 긴장했을 우리를 배려하기 위함인지 최대한 따뜻하게 느껴질만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목소리를 한채 바이올렛이 환영한다는 말부터 건네왔다. 그 다음으로 건네진 것은  만남이 서로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그러니 모쪼록 잘부탁한다는 식의 발언이었다.

황녀  되는 위치에 있는 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정중하기 그지없는 요청이었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까보다 분위기가 조금  흐물흐물하게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부터 바닥을 깔고 앉은 긴장감이 완전히 자리를 뜨지 않은 것은 제국 측에서 말한 '교류'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언급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 앞으로 나선 김에 그 부분까지 확실하게 해주면  좋으련만 바이올렛은 그대로 입을 꾹 다무는 쪽을 택했다.


앞으로 나서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던 이가 갑자기 그래버리니 주변으로 내려앉은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었다. 그렇게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서 상대방의 눈치만 슬금슬금 살피고 있던 가운데 앞으로 나서서 그것을 깨뜨린 것은..


"그.. 아, 안녕하세요?"

간신히 쥐어짜낸 듯한, 그래서 더욱 어색하게 느껴지는 인사였다.

분위기가 이런데 선뜻 나서다니.

그 용기있는 자의 얼굴이 궁금해서 곧장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눈으로 들어온 것은 자기도 어색해 죽겠다는 듯 짧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고 있는 단발머리의 미소녀였다.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소녀의 피부색이었다.


일반적인 모습과는 궤를 달리하는 연보랏빛에 가까운 피부가 그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런 소녀에게 지목당한 것은 그녀의 바로 맞은 편에 서 있던 이였다.


자신하고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게 그 남자라서 그를 지목한 것일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어색해서 죽을  같다는 표정으로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있는 것과는 다르게 눈동자만큼은 기민하게 움직이며 말을 건넨 이의 얼굴을 연신 힐끔대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정말로 관심이 있어서 말을 건넨 듯 했다.


말을  사람이 어색해서 죽으려고 하니 지목당한 입장에서도 어색한 건 매한가지인가 보다.


"..저요?"

지목당한 남자의 얼굴 위로 떠오른 건 자길 부른 게 맞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뻐기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끝났네.'


그 표정을 목도한 순간 깨달았다. 여자 쪽에서 무엇을 제안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어지간하면 남자 쪽에서 받아들일 거라는 것을.

그도 그럴 것이 표정을 봐라.

근처에 있는 다른 놈들을 제끼고 자신이 가장 먼저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기뻐서 죽으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기쁜  있는 그대로 티냈다가 혹시라도 싸보이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저렇게 전력을 다해 솟구치려고 하는 입꼬리를 억누르고 있는 걸 보면.


덕분에 사뿐히 즈려밟힌 지렁이마냥 비루하게 꿈틀대고 있는 입꼬리를 보고 있자니 혀를 안 찰래야  찰 수가 없었다. 저렇게 제대로 단속을 못할 거면 차라리 전력으로 기쁨을 표출하는 편이 차라리 훨씬 나았을테니까.

대체 저게 뭐란 말인가.

내 눈에는 그랬지만 그를 지목했던 소녀의 눈에는 또 달랐나 보다. 저런 식으로 귀여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던져대는  보면.

"네, 네. 혹시.. 그 차 좋아하시나요?"


"싫어하지는 않습니다만.."

"저한테 저희 고향에서만 나는 특산차가 있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용기있게 나선 그녀라도 그 대목에서는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잠시 말을 끊어지더니 소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을 확인할  있었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게, 하지만 또렷하게 울려퍼진 꼴깍 소리 뒤로 이어진 것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어진 정중한 요청이었다.


그에 대해 남자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아까 전력으로 입꼬리를 통제했던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고민하는 척 괜스레 긴장감을 끌어올리던 남자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고,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남자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소녀의 얼굴이 활짝 피어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많이도 기뻤나 보다. 세상을  가진 것 같은 미소가 순식간에 조막만한 얼굴을 점령했다.


"그, 그럼.."


그런 식으로 얼굴 한 가득 미소를 띄우고 있던 소녀가 이내 제 손을 입고 있던 치마에 슥슥 문질러 닦더니 그것을 그대로 남자를 향해 내밀었다. 얼른 자리를 옮기자고 말하는 것처럼.

설마 다짜고짜 손부터 내밀어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불쑥 들이밀어진 소녀의 손에 남자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제서야 제가 기쁜 마음에 너무 서둘렀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소녀의 얼굴 위로 아차하는 기색이 맺히더니 어색하게 굳어졌다.


그대로 굳어버린 소녀를 구원한 것은 다름아닌 남자였다.

굳어버린 그녀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남자가 처음 내밀어졌을 때보다 살짝 뒤로 거두어진 소녀의 손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그에 굳어있던 소녀의 눈이 토끼마냥 동그랗게 변했고, 둘은 그대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 뭐든 처음이 가장 어렵다는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성공적으로 첫 커플(?)이 탄생하고 나니 둘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은 이들이 하나둘씩 나서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살짝 웃겼던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순서라도 정해놨던 건지 나서더라도 차례대로 나서는 제국 측 여성들의 행동이었다.

조금씩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절반가량 줄어들고 나서부터였다.


'어..?'


솔직히 처음에야 그러려니 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고, 제국  여성들은 인종도 다양한만큼 취향또한 더더욱 다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거기에  몸은 키도 작지 않은가.

키가 작다는 건?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다른 놈들에게 가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아마 저쪽에서 까치발이라도 들어서 인의 장벽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지 않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는 힘들겠지.


라고 생각했다.


내 주변에 둘러쳐져 있던 인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내 모습이 눈에 띌만한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소리다.

'뭐지..?'

몰래카메라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인종이 달라서 미적 감각또한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걸까.

솔직히 별 생각 없었다. 없었는데 숙소에서 같이 출발했던 이들이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누구도 날 선택하지 않으니 사람 심리상 초조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없었다.


꼭 마치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두 명씩 짝을 이루라고 했는데 남들은 다 제짝을 찾아갈  나 혼자서만 짝을 못 찾고 운동장 한복판에 우두커니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 와중에 짝이 되어줄만한 이의 숫자는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고 말이다.

'괜찮겠지..'

이 와중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선택을 받지 못한 건 주인공 놈또한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혹시 제국에서는 나나 주인공 놈같은 타입은 별로 인기가 없는 걸까. 그래,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런 식으로 자꾸만 제멋대로 고개를 치켜드는 초조함을 달래보려고 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번에 앞으로 나선 것은 비슷한 특징을 가진 여성'들'이었다.


이곳으로 올때 봤던 특이하기 그지없는 용모의 남자와 같은 종족인 걸까. 하나같이 다들 젤리를 생각나게 하는 푸른색의 반투명한 피부를 지니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같았다.

아무튼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들을 대표하듯  발자국 이가 얇은  위로 훤히 드러나 있는 피부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손가락을 길게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의 끝에는..

'시발.'

주인공 놈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내심 초조함을 느끼고 있던 건 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저렇게 지목당하자마자 별다른 고민조차 하지 않고 넙죽 고개를 끄덕이는  보면 말이다.


그렇게 내 유일한 위안거리였던 주인공 놈마저 여성들의 손에 이끌려 사라지고 그 뒤로도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변에  이가 손가락으로 꼽을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자리에 남겨진 것은 이런 말 하기는 좀 뭣하지만 어딘가 하자가 있어보이는 놈들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성이 매력을 느낄만한 포인트를 지니지 못한 이들이라고 해야할까.

'허.'


그들 사이에 내가 남겨져있다는 사실이 뭐랄까..

솔직히 조금 아찔하더라.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이라도 선택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옆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놈이 지목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니, 시발.'


제국 년들은 하나같이 시력에 문제라도 있는 걸까.


그게 아니고서야 이건 말이 되질 않았다.


얼굴에 주근깨가 알알히 박혀있는, 보나마나 교류전 참가자 전형으로 일행에 참여하게 되었을  뻔한 놈의 어디가 나보다 더 나아서 놈을 먼저 지목한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추가적인 지목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고 나니 자연스레 자리에 남게된 것은 나와..


'응..?'

2황녀뿐이었다.


"본의 아니게 초조하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하군. 자-"

 발자국 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으로 들이밀어진 그녀의 손을 보고 깨달았다.


지목하지 않은  아니라 감히 지목하지 못했던 거였다는 걸.


깨달음과 함께 찾아온 뭐라 설명하기 힘든 안도감이 마음 속에서부터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걸 느끼며 내밀어진 손을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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