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제국에서 건네온 제안의 내용 자체는 굉장히 간단했다. 마침 이렇게 분위기도 좋고 하니 정식으로 교류를 좀 가져보자는 식의 내용이었으니까.
그러면서 명분이랍시고 내건 것도 꽤나 그럴듯했다.
이쪽에서 선뜻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상대방 측에서 먼저 손을 내밀면서 분위기도 괜찮은 김에 서로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좀 가져보자는데 거기다 대고 '응, 필요없으니까 꺼져.'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사실 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것도 없긴 했다.
그리고 제국에서는 이쪽에서 그런 식으로 나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마저도 염두에 뒀던 모양이다.
그 제안을 다이렉트로 내리꽂은 게 아니라 교국 측을 한 번 경유하는 식으로 건네온 걸 보면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측 책임자인 외무대신이 제국 측에서 건네온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제국 측에서 그런 제안을 직접 건네왔어도 섣불리 거절하기가 상당히 애매했을텐데 심지어 교국 측의 입을 빌려 전달된 것을 거절한다?
그것도 진의와는 상관없이 겉으로 보기에는 호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을?
실제로 그랬다간 이상한 놈 취급 당하기 딱 좋겠지.
거절하는 순간 선의로 한 제안을 대차게 거절당한 제국 측이 앙심을 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령 역을 맡았던 교국 측도 분명 이쪽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볼테니까.
아마 끼리끼리 말을 맞춘 다음에 이것도 다 서로 좋자고 하는 짓인데 왜 혼자서 진지빠냐는 식으로 몰아가지 않을까. 제국하고 교국이 노선을 같이하고 있다는 건 이미 증명된 사실이니 말이다.
나조차도 쉬이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을 한 나라의 외교를 총괄하는 외무대신 자리까지 기어올라간 노회한 인간이 예측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니 선뜻 받아들였던 것일테고.
사실 다 떼놓고 제안 자체만 놓고 본다면 내게도 그리 해가 될 건 없는 내용이긴 했다. 날 놓고 작당한 내용에 포함되어 있던 존재가 황녀인지 성녀인지 아직 확실치 않은 상황인만큼 더더욱 그랬다. 둘 중에 한쪽에라도 접근할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돌아올테니까.
그럼에도 숙소가 발칵 뒤집혔다고 말했던 것은 제국 측이 내건 조건이 그만큼 파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왕 교류를 할거라면 그래도 땀내나게 동성끼리 하는 것보다는 이성간의 풋풋한 분위기가 좋지 않겠냐면서 제국 측에서 먼저 자신들이 데리고 온 남성들을 보내겠다는 뜻을 선뜻 밝혔으니까.
교류전에 참가하게된 이들로서는 생각치도 못하게 소문만 무성한 제국 남성들과 데이트 비스무리한 걸 할 수 있는 기회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셈이다. 그러니 당연히 열광할 수밖에 없었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 세계의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이성에 대한 관심이 넘치는 이들이니까.
그리고 앨리스와 디아나가 이렇게 아침부터 내 방을 찾아와서 씩씩대고 있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었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남자를 보내기로 한 이상 이쪽도 거기에 맞출 의무가 있었으니까.
둘로서는 말 그대로 눈깔이 뒤집힐 수밖에 없는 상황일 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날 찾아온 둘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있었다. 평소처럼 투덕대는 모습같은 것도 없었고 말이다.
소식을 전해들은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일단 날 찾아오긴 했는데 막상 찾아오고 보니 이렇다할 대책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던 것일까. 아무 말 없이 굳어있던 둘의 얼굴 위로 차츰 침중한 기색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역시 왕녀 전하께서.."
그런 식으로 침묵이 이어지던 와중이었을 것이다. 한숨과 함께 입을 연 디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외무대신이 아니라 레이시아가 책임자였어야 했다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하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중얼거림이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외무대신이 아니라 레이시아가 이 일행의 책임자였다면 설사 제국 측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나만큼은 따로 빼주었을 가능성이 크니까.
그러니 디아나의 입장에서는 레이시아의 존재가 그리울 수밖에 없겠지.
그렇지만 그 그리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오지도 않은 이를 그리워하는 것보다 당장 눈앞으로 들이닥친 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게 먼저라고 판단한 모양.
"..내가 외무대신님을 찾아가서 말해볼까?"
그리고 그게 디아나가 쥐어짜내다시피해서 생각해낸 이 상황의 타계책이었다.
물론, 급하게 생각해낸 것이니만큼 좋은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실제로 그렇게 행동할 경우 외무대신 입장에서는 가문과 스승의 위상을 등에 업고 한 판 해보자는 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을테니까.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둘이 찾아오기 전에 한 발 앞서 날 찾아와 원한다면 자신이 나서겠다는 식으로 말했던 클레어를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돌아가서 잠이나 더 자라는 식으로 돌려보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 점을 디아나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돌려서 설명하니 디아나의 입술이 삐죽하고 튀어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해는 가지만 납득은 되지않는 모양.
"스승님께서 나서주시면 좋을텐데.."
확실히 그녀의 말마따나 클레어가 나선다면 이 상황이 해결되긴 할 것이다. 교국으로 오는 내내 외무대신은 클레어를 상당히 신경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니까.
게다가 결과도 디아나가 나서서 항의할 때보다는 훨씬 더 좋을 가능성이 컸고.
그도 그럴 것이 디아나하고는 다르게 클레어의 손에는 제대로 된 명분이라는 놈이 쥐어져 있으니까.
실제 관계가 어찌되건 간에 표면적으로 나와 그녀는 사제관계니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제자가 다른 나라의 여자들을 접대하기 위해 동원된다?
클레어가 내 제자를 대체 뭘로 보는 거냐는 식으로 입에 거품을 문채 빼애액거리며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녀가 날뛰기 시작하면 아예 척을 질 생각이 아닌 이상은 외무대신으로서는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래서 앞서 찾아온 클레어를 돌려보낼 때 혹시라도 디아나가 찾아와서 나서달라는 요청을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말고 거절하라는 말을 덧붙여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길길이 날뛰는 걸 보면 황녀쪽은 정답이 아닌 것 같긴 한데..'
혹시 또 모르지.
이게 다 연막작전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주인공 놈과 손을 잡고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만큼 하나하나 신중하게 짚고 넘어가서 나쁠 건 없었다.
그래서 나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여러 명이서 움직이는 건데 설마 별 일이야 있겠냐는 식으로 둘을 다독인 뒤 돌려보냈다.
제국 측에서 왜 대뜸 그런 제안을 해온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기도 했고.
'추측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 맞다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긴 하지만, 제국 측의 제안은 원래 그들의 계획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을 거다. 그럼에도 즉흥적으로 그런 제안을 건네온 이유는 아마도..
'..뭐, 확인해보면 확실해지겠지.'
추측대로라면 분명 그쪽에서도 확인하길 원할테니 말이다.
이쪽에서 제안을 받아들인 덕분에 제국에서 제안한 '교류'는 순식간에 급물살을 탔다. 그 와중에 교국 측이 자신들도 끼워줄 수 있냐면서 은근히 어필을 해왔지만 우리 쪽에서 나서기도 전에 제국 측에서 나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게 되면 너무 복잡해지니 나중에 따로 기회를 가져보자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눈치없이 끼어든 방해꾼마저 물러나고 나니 장애물이 될만한 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교류'를 위한 준비는 순식간에 끝이 났고, 남은 건 일정을 조율하는 것 뿐이었다.
언제, 몇 번이나 만남을 가질 것이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던만큼 그 부분은 쉬이 확정이 나질 않았다. 취지가 취지이니만큼 양측 모두 되도록 많은 만남을 가지길 원하는 건 똑같았지만, 그래도 제국 측보다는 왕국 측이 바라는 숫자가 더 적다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쪽에서 보내기로 한 남성들 중에는 교류전에 참가하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제국 측은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외무대신으로서는 혹시라도 만남 횟수를 늘렸다가 보내기로 한 이들 중에 남성 참가자들의 컨디션이 바닥을 치지는 않을지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 부분만큼은 각별히 신경쓰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결정된 결과물이 바로 일주일에 두 번이었다.
주중에 한 번, 그리고 주말에 한 번.
그런 식으로 일주일에 두 번 상대방의 숙소에서 교류시간을 갖기로 했고, 그걸 소화하기 위해 떠나려는 남성진들을 일렬로 세운 외무대신은 다른 건 몰라도 대화만큼은 최대한 많이 하라는 식의 당부를 덧붙였다.
상대방과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눠서 정보를 캐오라는 뜻이었겠지.
저쪽에서도 사람을 보내기로 한 이상 이쪽의 정보가 유출되는 건 필연적인 일일테니 말이다.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제국 측 숙소로 향하는 남성들의 분발은 필수였다.
그래서일까 외무대신은 말을 끝마치기기 전에 멀뚱하게 서 있는 우리들을 상대로 어쩌면 이번 교류전의 승패는 너희들이 어떻게 해주냐에 따라 달렸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듣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말과 함께 얼굴 위로 띄워올린 '믿는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살짝 부담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가슴이 벅차오르게 하는 멘트였다.
나조차도 순간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을진데 다른 이들에게는 어땠겠는가.
자세히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들 하나같이 살짝 뽕에 찬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하고 주인공 놈만 빼고 말이다.
'저 놈도 가긴 하는 구나.'
보나마나 또 혼자 몰래 쏙 빠져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대각선 방향에 자리하고 있는 새카만 뒤통수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자니 외무대신이 물러섬과 동시에 멀찌감치 서서 대기하고 있던 이가 앞으로 나섰다.
우릴 숙소까지 안내하기 위해 제국 측에서 파견한 이였다.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미녀는 분명 아니었다.
그보다는 포근해보이는 인상이라고 해야할까.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미소가 꽤나 매력적이었다.
"그러면 가실까요?"
호선을 그리고 있는 얇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여성이 등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어색하게 굳어져있던 몇몇 이들의 얼굴이 살짝이지만 풀려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제국 측에서도 이걸 노리고 그녀를 안내역으로 파견한 것이겠지.
그렇게 등장한 여성을 따라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제국 측 숙소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반대쪽에서부터 우리 측과 비슷한 규모의 무리가 이쪽을 향해 접근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이밍상 아무래도 저들이 제국 측에서 우리 쪽으로 보내기로 한 남성들인 모양인데..
'흠..'
거리가 거리인지라 잘 보이질 않아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니 그제서야 좀 제대로 보이더라.
동시에 실감할 수 있었다.
제국이 다민족 국가라고 칭해지는 이유를 말이다.
저번에는 다들 하나같이 꽁꽁 싸매고 있어서 확인할 방법이 없었는데 이제보니 정말 별의 별 인종이 다 섞여있었다.
개중에서 제일 특이하게 느껴진 건 뭐니뭐니해도 속이 훤히 비춰보이는 투명한 신체를 가진 남성이었다.
혹시 뭐 슬라임과 인간의 혼혈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정령이라던지..
아무튼 확실한 건 그런 식으로 비현실적인 외관을 하고 있음에도 다들 하나같이 매력적으로 느껴질만한 외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첫 만남인만큼 다들 외모에 힘을 빡준 모양인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숙소를 떠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정도면 그래도 어디가서 빠지는 수준은 아니지.'라는 느낌으로 자신감에 차있던 우리 측 인원들의 어깨가 급격하게 쭈그러드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누가봐도 기선을 제압당했다는 걸 알 수 있는 모습이었고 그런만큼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던 이들이 그 사실을 눈치채는 건 순식간이었다.
피식-
어디선가 들려온 바람빠지는 소리를 기점으로 각양각색의 매력을 뽐내고 있던 제국 측 남성들의 얼굴 위로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가 걸렸다.
그걸 이쪽을 향해 보란듯이 지어보이는데 그걸 보고 울컥하지 않으면 그건 자존심도 없는 머저리겠지.
덕분이라고 하긴 좀 그랬지만 아무튼 보란듯이 행해진 도발을 목도한 이들의 얼굴 위로 울컥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가더니 그들이 언제 쭈그러들었냐는 듯 금세 자세를 꼿꼿하게 했다.
그렇게라도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게 참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국 측 숙소에 발을 들인 순간 제국 쪽 여성들에게 왕국 남자들은 다들 하나같이 소심하다는 편견을 심어줄 뻔 했으니까.
그만큼 압권이었다.
각양각색의 여성들이 우리 주변을 둘러싼채 뜨거운 시선을 보내오는 모습은 말이다.
꼭 마치 온갖 생물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미지의 정글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내던져진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한 그 느낌을 만끽하며 내심 쓴웃음을 흘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주변을 점령하고 있던 수군거림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잦아듬과 동시에 정글의 지배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탐스럽게 빛나는 은빛의 꼬리를 살랑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