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65)화 (165/366)



〈 16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솔직히 말하자면  황녀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성녀를 향한 것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려 성녀지 않은가.

삼국지에 위촉오가 있다면?

히로인계에는 소꿉친구 마법사, 공주님, 그리고 성녀가 있다고  수 있었다. 그만큼 다른 둘과 더불어 히로인의 왕도같은 존재가 바로 성녀였다.

물론, 모든 성녀가 히로인 후보는 아니라는 사실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만나봤던 성녀라는 이들 중에는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서 뭐 챙겨주기 좋아하는 옆집 할머니처럼 느껴지는 이도 있었고, 이 년이 대체 어떻게 신의 선택을 받은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악독하기 그지없는 년도 있었으니까.


'..책임감없는 애새끼가 저지른 일에 휘말린 불쌍한 사람도  명 있었고.'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이토록 기대감을 불태우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대체 어떤 여자일지 궁금해서 나름대로 조사해본 결과에 따르면 성녀는 내 나이 또래였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또래라고 하긴 쪼오금 무리가 있긴 했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클레어보다 두  어린 편이었으니까.


이제 막 성인이 된  몸이나 주인공 놈에 비하면 나름 한참 연상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커버하지 못할 나이 차는  아니었다.


뭐, 이렇게 기대감을 불태우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이긴 했지만, 성녀에 대해 조사할 때 참고했던 것들에 따르면 성녀는 자애로움이 넘치는 인상에 듣는 이의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지닌 '미녀'라고 했으니까.


그 자료들을 발행한 주체가 하나같이 교국이거나 교국과 관련이 있는 단체임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걸러들어야 하는  맞긴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교국 측에서 성녀가 이룬 위업이나 그녀의 성정같은 거라면 몰라도 성녀의 외모를 과장까지 해가며 강조할 이유는  없기도 했다.


이 세계가 정상적인 세계였다면 또 달랐겠지만 남녀역전 세계지 않은가.

그렇기에 내가 다다른 결론은 '성녀=모성 넘치는 타입의 미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곧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기대감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얼른..'

궁금해서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을 아는  모르는 지 거대한 문은 거북이마냥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너무 느릿해서  저렇게 커다란 걸로 달았어야 했나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문이 느릿하게 움직일수록 성녀에 대한 기대감또한 그에 맞춰서 끓어올랐다.


그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것이 액체질소 세례라도 받은 것마냥 파사삭 식어버린 것은 마침내  사이에서 누군가 걸어나왔을 때였다.

여신마저 감탄하게 만들 정도로 자애로운 성정을 지녔다는 평가답게 거대한 문을 열기 위해 끙끙대는 이들이 보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문이  반도 열리기 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내가 실망했던 것은..

'저게 뭐야..'


그녀에 대해 적어두었던 자료들이 실은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거나 그래서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기껏 모습을 드러낸 성녀는 금실로 된 자수가 선명하게 박혀있는 흰색의 천으로 온몸을 덮고 있었으니까.

그래 온몸을 말이다.


우리 성녀님께서는 차별같은 건 알지 못하는 분이신지 그녀의 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흰색의 천은 심지어 그녀의 얼굴까지도 덮고 있었다.

'저래서 뭐가 보이긴 하나..?'

오죽 꽁꽁 싸매놨는지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모습을 드러낸 직후부터 불안하게 휘청대거나 주춤대지 않은 걸 보면 보이긴 하는  같았지만.


혹시 뭐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고 안쪽에서는 바깥의 풍경이 비춰보이는 그런 특수한 천이라도 되는 것일까.


며칠동안 궁금해했던 것을 드디어 해결하나 했더니만 아직도 멀었다고 비웃기라도 하는 것같은 상황에 내심 속으로 쓴웃음만 짓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대로 이쪽을 향해 다가올 것처럼 느릿하긴 해도 꾸준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성녀가 밑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두어걸음 정도 남겨두고  자리에 멈춰섰다.

그와 함께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래,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직접 말이다.

'오..?'


성녀가 뭐라고 말하던 간에 그건 딱히 관심없었다. 얼핏 들어보니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느니 어쩌느니 하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보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직접 때려박히는 듯한 현상 자체에 주목했다.


슬쩍 주변을 살펴보니 나한테만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닌  같았으니까.


'그냥 얼굴마담은 아니다 이거지..'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이 세계의 멸망과 관련된 신탁을 전해듣고 그걸 주변에 알린 것또한 성녀라 그랬으니까. 사실상 신과 지상 사이를 다이렉트로 이어주는 핫라인인 셈인데 그런 존재가 평범할리 있겠는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성녀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분투를 기대하겠느니 어쩌느니 하는 걸 보면 슬슬 이 연설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양.


아니나 다를까 금방이라도 연설을 끝낼 것처럼 말을 이어나가던 성녀가 가만히 모으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혹시 여신교의 교리 중에 성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이들의 앞에서 살갗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내용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손이라고 불러야할지 소매라고 불러야할지 애매할 것을 들어올린 성녀가 그것을 이용해 허공을  휘저은 순간이었다.


그런 그녀의 움직임에 맞추어 짜잘한 빛 알갱이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꼭 마치 밤하늘에 알알히 박혀있는 별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낮이라서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햇빛이 쨍쨍 내리쬐지 않고 주변이 조금이라도 어두웠다면  장관이었을테니까.


허공을 수놓고 있던 것들이 무리지어 서 있던 이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다만 폭급하지는 않았다.

봄날에 잠깐 내렸다가 가는 여우비마냥 보슬보슬 떨어져내린 것들이 사람들의 어깨를 적셨다.

물론, 그것에 젖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내가 놀라기라도 할까봐 수줍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접근한 빛무리가 마침내 어깨 위에 안착한 순간 어깨 위에 켜켜이 쌓여있던 피로감이 봄볕을 마주한 눈덩이마냥 사르르 녹아내렸다. 동시에 찾아온 것은 어디선가부터 솟구치기 시작한 활력이었다.


꼬맹이 모드일때는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라서 그런 걸까 꼭 마치 카트린느가 건네준 중화제를 마시고 원래 몸으로 돌아간 것만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지금 몸 상태면 뭐든 해낼  있을 것 같달까.


그런 감각을 선물받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성녀가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부터 쭉 조용했던 주변이 어느새 소란스럽게 변해있었다. 그에 잽싸게 주변을 훑어보니 다들 하나같이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바로 옆을 지키고 있는 카트린느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그 한 방으로 늘 달고 살던 만성피로가 사라지기라도  모양이다.

"끄으으으-"


살짝 기괴하게 느껴지는 음성과 함께 카트린느가 기본적으로 늘 살짝 굽어있던 등을 곧게 쭉 편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면서 입가에 상쾌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내걸고 있는  보고 있자니 꼭 고양이가 햇볕 아래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걸 훔쳐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정도였다.

그렇게 카트린느를 시작으로 다른 이들의 반응은  어떨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굴리기 시작한 찰나였다.


'흐음..?'

일단 카트린느 다음으로 가까이 서 있던 클레어까지는 딱히 특별한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디아나도 그렇고, 앨리스도 그렇고 어째 살짝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한채 바로 조금 전까지 성녀가 자리하고 있던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모습이 저번에 들었던 모종의 대화와 관련이 있어보인 건 과연 기분탓이었을까.


둘이 저렇다면 나머지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주인공 놈의 반응은 또 어떨지 궁금해서 잽싸게 눈을 굴려 놈의 모습을 쫓았다.


허나 아무리 눈동자를 채찍질해봐도 내가 원하는 광경이 눈에 담기는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눈을 굴려봐도 놈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까.  마치 애초에 이 자리에 참석 자체를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애초에 이곳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한몸인 것처럼 쭉 같이 움직였으니까.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말이다.


아니면 혹시 뭐, 아까 성녀한테 시선이 쏠린 틈을  잠시 자리를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일까.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기 있는 주인공 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놈의 옆에 우리를 호위하기 위해 교국 측에서 내어주었던 성기사 중 한 명이 붙어있는 걸 보면 급하게 화장실같은 곳이라도 다녀온 모양.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말이지..'

혹시  모르지.


정말로 화장실이 급했던 걸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의심이라는 놈이 자꾸만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것은 의심이라는 것의 성질이 원래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시작조차 되지 않은 상태라면 또 모를까 일단  번 불이 붙으면 억지로 꺼버리든 자연스럽게 꺼지든 간에 자그마한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고  피어오르고 마는 것이 바로 의심이라는 놈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것의 불을 당겨버린지 오래인 내게는 하필이면 성녀가 모습을 드러내는 타이밍에 맞춰서 자리를 비웠다가 성녀가 돌아서 들어가자마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놈의 행태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자꾸만 놈을 향해 시선이 돌아갔지만 억지로 떼어냈다.

내가 놈을 의심하고 있다는  드러내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그렇게 자꾸만 돌아가려는 시선을 단속하며 어느새 주변을 가득 채운 성녀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나둘씩 주워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방금 성녀가 등장해서 축성 비스무리한  내리는 것까지가 교국 측에서 계획한 환영행사였던 모양이다.


누가봐도 나  높은 사람입니다라고 느껴질 법한 고급스러운 사제복을 몸에 걸친 사제 두 명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제국 측 일행과 우리 일행을 하나씩 도맡아 안내하기 시작했다.


편히 쉴 수 있도록 준비해두었다고 열심히 떠들어대는 것으로 보아 드디어 숙소로 가는 모양.


신나게 떠들어대는 사제와 어느새 그 옆자리를 꿰찬 외무대신이 사제의 말에 신나게 맞장구를 쳐대는 걸 지켜보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새 눈앞으로 나타난 것은 왠지 모르게 학원의 기숙사를 생각나게 하는 건물이었다.

외관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외관은 주변에 세워져있는 다른 건물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으니까.

다만 건물 자체에서 풍겨져나오는 분위기가 그랬다.

살짝 웃겼던 건 바로 맞은 편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의 존재였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우리보다 한  먼저 자리를 빠져나갔던만큼 도착도 한 발 먼저 했나 보다.


아까 다른 사제의 인도를 받으며 자리를 빠져나갔던 제국 측 인사들이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서로 마주보며 서 있는 한쌍의 건물과 영주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성벽마냥 숙소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건물들까지.

우리 측 인원과 제국  인원을 한 군데다가 몰아넣고 제대로 관찰해보겠다는 교국 측의 심보가 엿보이는 건물배치였다.

숙소에서 그런 감상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교국 측에서 붙여준 안내역의 말에 열심히 맞장구를 쳐대고 있던 외무대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숙소에 대한 것을 문의하고 있었다.


온갖 미사여구가 덕지덕지 붙어있긴 했지만 간단히 말해 다른 숙소는 없냐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런 우리 측의 문의에 대해 답변이랍시고 돌아온 건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곳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교국 측 인사의 발언에 외무대신은 더는 깊게 파고들어가지 않는 쪽을 택했다.

더 파고 들어가봐야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한 모양.

그렇게 제국 측 숙소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건물을 숙소로 쓰게 되었지만 예상외로 소란같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의미에서 묘한 분위기가 흐르기도 했다.


그랬던 숙소가 발칵 뒤집어진 것은..

제국 측으로부터 날아온 제안 하나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