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운이 좋았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녀쯤 되는 위치면 사실 굳이 본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낼 필요 자체가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대충 손 한 번만 까딱하기만 해도 근처에 버티고 선 채 눈치만 보기 바쁜 이들이 다 알아서 처리하고도 남을테니까.
헌데 그녀, 아니 그녀들은 그런 것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듯 당당하게 일행의 선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 둘이 황녀가 아닐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솔직히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저 둘이 황녀가 아니라면 뒤에 버티고 선 이들이 둘의 눈치만 보듯 저렇게 둘을 향해 시선을 쏟아낼 이유 자체가 없으니까.
아무튼 운이 좋다고 말했던 것은 둘의 탁월하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힘들 것 같은 위치선정능력 덕분에 둘의 모습을 느긋하게 관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시선을 사로잡은 쪽은 둘 중에 한 발자국 정도 앞에 서 있던 쪽이었다.
자신이야말로 이 무리의 대표라고 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팔짱까지 낀채 당당히 서 있는 걸 보면 그녀가 이번에 교류전에 참가하기로 했다던 두 명의 황녀 중에서 책임자 역할을 차지한 2황녀라는 쪽일까.
그 누구보다 앞에 서 있다는 점이나 오만함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면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제국의 2황녀는 황녀라는 직위에 딱 어울리는 인상을 지닌 미녀였다. 모성이 넘치는 타입이라기 보다는 살짝 쌀쌀 맞아보이는 냉막한 타입이라고 해야할까.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가 상당하다보니 바로 앞에서 보듯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볼 수는 없었지만 온갖 히로인들을 보며 단련된 내 안목이 제법 열렬하게 그녀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고 있는 걸 보면 그 느낌이 틀릴 것 같지는 않았다.
허나 정작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제법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그녀의 콧대같은 것이 아니라 그 외의 다른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살짝 회색빛이 맴도는 것 같은, 허리까지 막힘없이 곧게 쭉 뻗어있는 은빛의 머리칼같은 게 그랬다.
자신또한 멀쩡히 기능하는 신체의 기관 중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듯 아까전부터 열렬히 쫑긋거리며 주변에서 흘러들어오는 온갖 정보들을 쓸어담고 있는 세모꼴의 늑대귀 때문일까. 머리칼 위에 매달린 것의 존재감이 확고하다 못해 미쳐 날뛰는 수준이다보니 머리칼이 머리카락이 아니라 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은 동그란 달을 올려다보며 고고하게 앉아있는 회색늑대 한 마리였다.
그런 특별하기 그지없는 인상은 그녀라는 존재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왕국에서 흔히 입는 것과 닮아있는 듯 하면서도 군데군데가 살짝 다른 제복으로 감싸인, 슬랜더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만드는 몸매도 그렇고 보름달을 생각나게 하는 호박빛의 눈동자도 그렇고 하나같이 야성미에 가까운 것을 뿜뿜 뿜어내고 있는 반면에 그녀가 얼굴 위로 띄워올리고 있는 표정 자체는 이지적인 것이다보니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주는 묘한 느낌이 어마어마하달까.
아무래도 그녀는 손님을 불러다놓고 묵묵부답인 교국 측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누군가로 하여금 보란듯이 냉기를 흘려대며 누가봐도 높은 이들이 머무를 것 같이 생긴 건물을 지그시 노려볼 이유가 없으니까.
안 그래도 여기까지 오느라 쌓인 피로가 상당한데 계속 이렇게 서 있다가 교류전에 참가하기로 한 이들의 컨디션에 악영향이라도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되는 모양.
그런 식으로 책임자라는 위치에 걸맞게 행동하고 있는 이가 반면에 그렇지 않은 이도 존재했다.
3황녀로 추정되는 여성이었다.
냉막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세만큼은 똑바르게 하고 있는 2황녀와는 다르게 살짝 뒤쪽에 자리한 3황녀는 일단 표정부터가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세?
표정조차 관리할 생각이 없어보이는데 자세라고 다르겠는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바닥을 디디고 서 있는 자세에서 자유분방함이 흘러넘쳤다. 양다리를 나란히 한채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2황녀와는 다르게 3황녀쪽은 짝다리를 짚고 있었으니까.
'양아치냐고..'
그렇게 삐딱하게 세워져있는 몸을 타고 올라가니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바닥을 디디고 선 두 다리만큼이나 방종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두 팔이었다.
3황녀는 양손을 깍지 끼운 채 그것을 이용해 제 뒤통수를 받치고 있었다.
다 떼놓고 그 모습만 놓고 본다면 사실 크게 문제가 될만한 부분은 없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가끔 목이 아플 수도 있고, 뒤통수가 근질근질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는 쪽은 따로 있다는 소리였다.
그랬다.
몸에 쫙 달라붙는 제복으로 꽁꽁 싸매고 있는 누구누구하고는 다르게 그녀는 복장도 자세만큼이나 자유분방하기 그지없었다.
저렇게 죄다 풀어놓을 거면 단추는 대체 왜 달아둔 걸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녀의 앞섬은 왕국 남부에 자리하고 있는 대초원만큼이나 탁 트여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은 디아나가 훈련을 할 때 주로 입는 것과 꼭 닮은 몸에 찰싹 달라붙는 회색빛의 쫄티였다.
몸매라도 안 좋으면 또 모르겠는데 전형적인 남미 슬렌더형 몸매를 하고 있는 2황녀의 몸에 육감적임을 두 스푼 정도 첨가한 것 같은 몸으로 그러고 있으니 눈 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저걸 보면 저렇게 풀어헤친 것도 이해가 되기도 하고..'
저런 걸 달고 있으니 누구누구처럼 꽁꽁 싸매고 있으면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3황녀의 모습에 당위성을 부여하며 그녀의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었다. 군데군데 다른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녀는 2황녀와 상당히 닮아있었다. 단순히 같은 피가 흐르는 자매라서 그런 거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힘들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는 건..'
혹시 둘이 쌍둥이라도 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이라는 곳에 대해 딱히 아는 게 없었으니까. 끽해봐야 강의시간에 뻔질나게 들었던 다민족국가라는 특징 정도?
그 마저도 사실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오늘 밝혀졌고 말이다.
'다민족 국가라길래 미국같은 곳인줄 알았지..'
그러니까 여러 황인, 백인, 흑인같이 여러 인종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그런 곳 말이다.
설마 그 다민족이라는 수식어 속에 다른 종도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왕국에서는 황녀들과 같은 이들을 볼 기회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 세계가 온전히 인간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생각해보니까 신기하네..'
다른 곳도 아니고 제국의 황녀쯤 되는 이들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을 정도라면?
황제든 황제의 반려든 간에 적어도 둘 중에 한쪽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다. 어쩌면 둘다일 수도 있었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다는 건 이 세계에서 아인종들이 받는 취급이 그리 팍팍한 편은 아니라는 소리일 것이다.
그랬다면 저 두 황녀가 교류전에 참가하는 일 자체가 없었을테니까.
그럼에도 왕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다른 인종들을 볼 수 없었던 건 어째서일까.
단순히 내가 못보고 지나친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그 얼마 되지 않는 확률이 딱 적중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혹은 그게 아니면..
'왕국이 인종차별이 미친듯이 심한 곳이거나.'
그래서 인간을 제외한 다른 인종들이 얼씬조차 안하는 것일 수도..
지내면서 나름 살만한 곳이라 느꼈던 곳이 실은 그런 곳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굉장히 묘해지는 건 사람 심리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배 안쪽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한 복잡미묘한 기분과 함께 입 안으로 살짝 씁쓸한 맛이 감돌기 시작해서 나도 모르게 쯥하고 입맛을 다셨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대로 입 안 전체를 점령할 것 같았던 쓴맛을 그렇게라도 털어내보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그런만큼 시선은 여전히 제 언니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언니하고는 다르게 야성미를 억누르지 않고 있는 힘껏 뿜어내고 있는 3황녀 쪽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2황녀의 것과 꼭 닮은 높고 오똑한 콧대 끝 부분이 순간 귀엽게 움찔거리더니 언니가 바라보고 있는 쪽에 똑같이 시선을 두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니까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해서 말이다.
그렇게 마주하게된 3황녀의 눈동자는 2황녀의 것처럼 호박빛을 띄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성질마저 같지는 않았다.
2황녀의 눈동자는 뭐랄까..
'그래.'
창문을 통해 보이는 보름달같은 느낌이었다. 정제된 것 같은 느낌이라 해야할까.
그에 비해 3황녀의 눈동자는 주변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탁 트인 벌판에서 올려다보는 보름달을 생각나게 했다.
그만큼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 어느새 내쪽에 고정되어버린 그녀의 눈동자로부터 풀풀 풍겨져나오고 있었다.
가만히 달을 올려다보고 있다보면 아주 가끔 아득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끔 그랬다.
헌데 지금 이렇게 날 꿰뚫을 듯 응시하는 3황녀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 특유의 아득한 느낌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건 그녀의 눈동자가 달을 닮아있기 때문일까.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내게 기묘한 느낌을 선사해주던 그녀가 마침내 시선을 떼어낸 것은 옆에 서 있던 제 언니로부터 뭔가 언질을 받고 나서였다.
다만 그냥 거둬가지는 않았다.
시선을 떼어내기 바로 직전에 그녀가 전보다 한층 더 강렬한 시선을 쏟아내면 날 향해 씩하고 미소를 지어보였으니까. 꼭 마치 내 얼굴을 까먹지 않고 기억해두겠노라고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내 옆을 지키고 있는 게 그런 쪽으로는 상당히 둔감한 편인 카트린느였기에 망정이지 디아나나 앨리스였다면 아마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3황녀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방금 그녀의 행동이 선전포고로밖에 비춰지지 않았으니까. 나조차 그렇게 느꼈을진데 다른 여성들에게는 어땠겠는가.
저 썅년이 어디서 감히 수작질이냐면서 분명 길길이 날뛰고도 남았을 터.
'그나저나..'
아까는 인파에 가려져있어서 보이질 않았는데 지금은 둘이 살짝 앞으로 나선 상태다보니 알 수 있었다. 두 황녀에게 달려있는 인외적인 부분은 귀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카락만큼이나 풍성하면서도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꼬리가 둘의 엉덩이 쪽에서 튀어나와 바닥을 향해 길게 늘어져있었으니까.
'바지에 구멍을 뚫어둔 건가..?'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흔들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랑살랑 흔들리는 그것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호기심이 생기는 건 사람 심리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솟구친 호기심을 해결할 기회는 얻지 못했다.
그 부분도 따로 관리라도 받는 것인지 풍성하기 그지없는 꼬리가 엉덩이 전체를 덮듯이 가려주고 있었으니까.
'한 번 만져보고 싶네..'
그건 어디까지나 순수한 호기심에서 기인한 생각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수인이라는 족속들은 귀와 꼬리가 굉장히 민감한 편이었으니까. 그렇다보니 아무한테나 그 부분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 부분을 만질 수 있는 건 끽해봐야 연인 정도?
내가 알고, 만나봤던 수인들은 그런 식인데 이 세계를 살아가는 수인들은 또 어떨까.
봉긋하게 솟아오른 엉덩이에서부터 튀어나와 누군가로 하여금 보란듯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두 황녀의 탐스러운 꼬리를 보고 있자니 그런 호기심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장난감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심정이 딱 이렇지 않을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 내게는 참으로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둘에게서 시선을 떼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성녀님께서 나오십니다-!"
신탁을 받아 교국을 긴 침묵 속에서 끄집어냈던 성녀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