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길고 긴 기차여행이 끝나고 마침내 도착하게된 국경도시는 앨리스의 묘사대로 굉장히 활발한 곳이었다.
수도하고는 조금 다른 의미로 떠들썩하다고 해야할까.
분위기같은 것도 사뭇 달라서 아직 국경을 넘기 전임에도 이미 국경을 넘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이국적인 동네였다.
특히나 건물같은 게 그랬다. 일단 역사 내부의 풍경부터 수도에서 봤던 것하고는 사뭇 달랐다. 창 밖에도 익숙한 양식의 건물과 처음 보는 양식, 아마도 교국의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을 한 건물이 이리저리 뒤섞인채 우뚝 솟아있었고 말이다.
'묘하게 아랍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왕국 풍 건물이 기본적으로 뾰족뾰족한 느낌이라면 교국 풍으로 보이는 것들을 둥그스름한 느낌이라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창문에 찰싹 달라붙은 채 바깥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으니 하역이 모두 끝난 것인지 이쪽으로 모이라는 외침이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그에 그쪽으로 달려가니 딱봐도 오랜 기차여행으로 피로가 상당히 쌓인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외무대신이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을 한채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런 상태에 빠진 인간의 눈에 띄어봐야 딱히 좋을 건 없었기에 즉시 앨리스의 뒤로 몸을 숨기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인원체크를 포함해 이런저런 확인절차가 모두 끝이 났다.
"그럼, 움직이지."
얼른 편안한 침대에 누워서 쉬고 싶은 걸까.
피곤해 죽겠다는 듯 하품을 반복하던 외무대신이 이내 거칠게 손을 휘저었고, 덕분에 역사를 빠져나가 국경도시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왜 역사 안에 우리밖에 없나 했더니만 우리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미리 역사 안을 비우는 소개 작업이라도 행해졌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죄다 역사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 마치 수도를 떠나던 날 봤던 인파를 여기다가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막 역사를 빠져나온 우리들에게로 쏟아졌다. 그래서일까 알게 모르게 쌓인 피로 때문에 살짝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던 이들의 자세가 언제 그랬냐는 듯 꼿꼿하게 변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외무대신에게 일어난 변화였다.
그래도 할 때는 한다는 건지 쏟아지는 환호성에 답을 하듯 사방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까와 같은 피로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믿음직스럽고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 어느새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표정만 놓고 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막 솟구친다고 해야할까.
선두에서 일행을 이끄는 이의 표정이 그러하니 그게 곧 다른 이들에게까지 전염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들 자신감에 찬 표정을 한채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앨리스의 추측대로 바로 교국으로 출발하거나 그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컨디션 조절을 위해서라도 기차 여행으로 쌓인 피로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앨리스가 열심히 찬양했던 문제의 음식을 먹으러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휴식시간은 주어졌지만 외출까지는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물론, 외출에 제한이 걸린 것은 생도, 그러니까 참가자들 한정이었고 인솔자로 따라붙은 이들은 그 규칙에서 자유로웠기에 가게는 못 가도 음식 맛 자체는 볼 수 있었다.
클레어가 애를 써준 덕분이었다.
물론, 그 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모처럼 나라를 대표해서 싸워보라고 뽑아놨는데 뭐 잘못 주워먹고 컨디션을 망쳐서 제 실력을 못 내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국경도시에 도착한 순간부터 참가자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건 굉장히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으니까.
아마 음식을 사들고 온 이가 클레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숙소 입구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그대로 거기서 버려졌을 것이다.
뭐, 입구를 통과하고 나서도 이런저런 확인절차를 거쳐야 되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어렵사리 맛보게 된 것은 확실히 앨리스의 극찬을 받을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갈색으로 물든 고기덩어리를 한입 크게 베어문 순간 살코기 부분이고 지방 부분이고 가리지 않고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데 얼핏 동파육같으면서도 맛은 갈비찜 맛이 나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 앨리스가 추천한대로 빵에 끼워서 먹어보니 그때는 또 풀드포크가 생각나게 하는 맛이 나더라.
한 번 식었다가 다시 뎁혀서 나온 게 이 정도라면 갓 만든 것에서는 대체 어떤 맛이 날까.
그게 나를 포함해서 자리에 둘러앉아 있던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반드시 이기고 돌아와서.."
"꼭 먹어보죠. 갓 만든 걸로."
그만큼 환상적인 맛이었다. 자연스럽게 나중을 기약하게 될 정도로.
그런 식으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자니 교국으로부터 전언이 날아들었다. 교류전에 참가할 이들의 호위를 맡을 이들이 국경에 도착했으니 이제 움직여도 괜찮다는 내용이었다.
대체 언제 교국으로 출발할 생각인가 했더니만 그 소식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날 즉시 국경도시를 떠나 교국을 향해 출발한 일행은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던 교국의 호위대와 합류하게 되었고,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교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성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국가들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라길래 내심 목가적인 풍경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있을 건 다 있더라. 우리를 마중 겸 호위하기 위해 나온 자칭 성기사들의 차림새도 굉장히 번듯했고 말이다. 실력 자체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스스로 소개하기를 2성기사단장이라고 밝힌 여성의 기세는 클레어가 뿜어내던 것과 비교해봐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으니까.
살짝 의외였던 점은 성기사들 중에 남자들의 비율이 꽤 된다는 점이었다.
'흐음..'
여기사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걸 보면 이번 건을 위해 특별히 선별한 건 아닌 듯 했다. 그렇다는 건 교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남성들의 사회진출이 자유롭다는 뜻일까.
'그나저나..'
신기한게 있다면 금발의 비중이 꽤나 높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은근히 눈이 부셨다. 안 그래도 햇빛이 쨍쨍한데 어딜봐도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머리가 한 명쯤은 자리하고 있다보니 눈을 둘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달까.
그런 식으로 티나지 않게 관찰을 이어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관찰을 하고 있는 건 이쪽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를 호위하겠답시고 일행을 동그랗게 둘러싼 이들로부터 티나지 않게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날아와 꽂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각 파트별로 담당하는 이가 다른 모양이다. 시선은 상당히 분산되어 있었다.
해서 하나하나 체크해봤다.
누가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지를 말이다.
1등은 말할 것도 없이 나였다. 주변을 한 바퀴 쭉 둘러보니 말 그대로 사방에서 이쪽을 주시하는 듯한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대체 뭐가 그리 궁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내가 숨 쉬는 것까지 보고가 들어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다음으로 주목받고 있는 건 주인공 놈이었다.
기사부 소속이라는 것 덕분에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한 번 뿐이긴 해도 놈이 앨리스를 상대로 승리를 따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앨리스는 교국 소속이 아니던가.
그런만큼 그녀의 실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곳이 있다면 그건 바로 교국일 것이다.
헌데 갑자기 어디서 굴러먹다가 튀어나온 건지 알 수 없는 '놈'이 자기들이 심어놓은 이를 상대로 승리를 따냈다고 하니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겠지.
그런 식으로 이쪽의 남성들에게 쏠린 시선이 각각 얼마나 되는지 일일히 체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된 사실은 그 작업이 꼭 남성을 상대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결국 교국 측에서도 교류전에 사람을 내보내기로 했다고 하더니만..
'벌써부터 전력을 가늠하는 건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참가자들 위주로 관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관찰한다고 해도 파악할 수 있는 게 과연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저런 짓을 하는 거겠지.
'그나저나..'
결국 교국 측에서도 사람을 내보내기로 했다면 대회 진행을 그대로 교국 측에 맡겨놔도 괜찮을까 모르겠네..
수작질을 부리다가 걸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개쪽도 그런 개쪽이 없을테니 자제할 것 같으면서도 마냥 또 그렇게만 생각할 수가 없는 건 상대가 종교집단이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에는 이성적인 사람이더라도 종교라는 단어와 엮이게 되는 순간 무슨 약이라도 한 것마냥 홰까닥 변해버리는 모습을 난 이미 몇 번이나 본적 있었으니까.
개인이라도 그럴진데 집단 규모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흑마법사 놈들하고 사교도 놈들 다음으로 싫어하는 놈들이 있다면 바로 광신자 집단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나쳐왔던 회차들 중에는 잘 나가다가 광신에 찌든 놈들의 개짓거리로 인해 그대로 바닥으로 꼴아박았던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광신에 물든 놈들이 악질인 점은 아무리 이쪽이 논리적인 주장을 펼쳐도 즈그들 기준에 들어맞지 않으면 들어쳐먹지를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부분은 차라리 흑마법사 놈들이 낫지..'
그 놈들은 그래도 말이 통할만한 구석이라도 있지 광신에 찌든 놈들은 진짜로..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시작한 옛 기억을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그건 진짜로 암이 암에 걸려서 뒤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암 걸리는 기억이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눌러앉으려고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낸 뒤 관찰을 이어나갔다.
다만 아까하고는 다르게 나와 비슷한 이들 또래 위주로 살폈다.
1차전에서 어느 쪽과 붙게될지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까.
이 안에 교국 측 참가자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해서 그나마 있어보이는 이들 위주로 관찰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내 옆에 앉으신 분께는 그런 내 행동이 조금 다른 식으로 비춰졌던 모양이다.
"..역시 금발이 좋아?"
상당히 뜬금없은 발언이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에 그 말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면서 은근히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금발이 좋냐니.
설마 내가 교국에서 나온 이들을 관찰하는 걸 보고 그렇게 오해한 걸까.
말도 안 되는 오해였지만, 한편으로는 앨리스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디아나부터가 금발이니까. 거기에 색이 많이 옅기는 해도 레이시아또한 금발인 건 마찬가지다. 거기에 방금 전에 내가 쳐다봤던 이들도 죄다 금발이이었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교국 측에서 우리를 마중하기 위해 내보낸 이들 중에 금발머리를 한 이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탓에 벌어지게된 일이었지만 굳이 이번 건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벌어졌을 일이기도 했다.
'금발이 좋냐고..?'
물론 좋아한다.
그렇지만 앨리스는 선후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디아나가 금발이라서 그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디아나가 금발이기에 금발을 좋아하게 된 거다.
마찬가지로 앨리스가 적발이기에 나는 적발도 좋아한다.
특히나 보이는 것만큼이나 만져보면 부드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적발은..
"좋아해요."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거기에 입을 맞춰보고 싶게 되는 마력같은 게 있었다.
해서 그러한 감정을 이번만큼은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니 앨리스의 얼굴이 그녀의 머리칼만큼이나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어리석은 말을 했는지를 깨닫게 된 모양인데..
"혹시 금발로 염색을 한다던가 뭐 그런 생각을 하신 건 아니죠?"
그 반응을 보고 혹시나 싶어 물었더니 돌아온 건 꽤나 격렬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어깨를 움찔하고 떤 것은 물론 은근슬쩍 내 시선까지 피하는 걸로 봐서는 정말로 그런 생각까지 했었던 모양.
'금발 버전의 앨리스라..'
흑발 버전은 한 번 본적이 있는 데다가 왠지 살짝 갸루 느낌이 날 것 같아서 솔직히 좀 궁금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적발 쪽이 더 좋았다.
그래서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그녀를 엄히 단속하고 있으니..
여신교의 총본산이라고 알려진 곳의 모습이 시야 끝에서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좁다 좁다 말은 들었지만 국경을 넘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목적지에 도착할 줄이야.
교국의 수도에 대한 첫 인상은 깨끗하다였다.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여기서 오래 지내면 정신병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였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눈에 닿는 모든 것이 새하얬다.
건물 벽도, 지붕도, 심지어는 길에 깔린 타일마저도 그랬다.
혹자는 이 광경을 보고 '신성'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아니었다. 신성한 느낌보다는 정신 사납달까.
사방이 온통 하얗다보니 사방에서 반사되어 돌아오는 빛이 자꾸만 눈을 찔러댔다.
그 느낌이 거슬려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보니 어느덧 눈앞으로 나타난 것은 제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이었다.
덕분에 확인할 수 있었다.
선두에 서서 그들을 선도하고 있는 황녀들의 모습을 말이다.
이제 막 도착한 건 그들도 마찬가지인지 예의를 차리기 위해 갖춰입었다기 보다는 활동하기 편해보이는 옷을 걸치고 있는 둘의 머리 위에는..
'귀..?'
늑대를 생각나게 하는 세모꼴의 귀가 보란듯이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