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셋이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걸까.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들은 거라고는 뚝뚝 끊어진 것들이 전부다보니 그걸 가지고는 셋이서 무슨 작당모의를 했는지 추측하기가 힘들었다.
'아니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누가봐도 안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엿듣다가 딱 걸린 상황아닌가.
그런만큼 그것부터 속히 해결을 볼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대처를 잘못하게 되면 저들의 작당모의는 지금보다 더 은밀하고 음습해질 터.
문제는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그런 결과를 피하기 힘들다는 점인데..
'흠.'
순간적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잡아떼보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걸 채택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했지만 그걸 써먹기에는 타이밍이 좀 많이 늦어버렸으니까. 그 방법을 쓸 거라면 방에서 튀어나온 놈과 마주치자마자 써먹어야 했다.
그러니 여기서는..
"..여긴 어쩐 일이야?"
오히려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게 좋겠지.
해서 그것을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눈을 가늘게 좁힌 채 그것을 주인공 놈을 향해 쏘아보냈다. 동시에 얼굴 위로 은근히 경계심을 내비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꼭 마치 연적일지도 모르는 상대를 향해 경계심을 내비치는 것처럼 그러고 있었더니 다행히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방을 빠져나오자마자 날 맞닥뜨린다는 것이 놈에게도 꽤나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던 모양인지 날 보고는 살짝 굳어있던 놈에게서 반응이 돌아왔으니까.
"아, 그게.."
과연 어떤 변명을 내놓을까.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했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방을 나가려던 놈이 나가진 않고 문쪽에 몸을 걸치고 있으니 의아했던 걸까.
"무슨 일이라도 있.."
앨리스가 얼굴을 내비춰왔다. 그녀도 날 보고는 당황한 듯 멈칫한 건 마찬가지였고.
낭패감이라는 단어를 표정으로 바꾸면 저런 표정이 될까. 그 정도로 진한 낭패감이 일순간 앨리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국경도시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혹시 알고계실까 싶어서 물어보려고 왔던 건데.. 무슨 중요한 이야기라도 나누고 계셨나봐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와 주인공 놈이 일으킨 자그마한 소란을 듣고 나온 게 디아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살짝이지만 아쉽게 느껴지긴 했다. 무슨 일인지 확인차 나온 것이 앨리스가 아니라 디아나였다면 조금 더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순식간에 건수가 될만한 것들을 얼굴 위에서 지워버리는 앨리스를 보며 이곳을 찾은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은근히 안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고 떠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내 발언을 듣고 앨리스가 순간적으로 얼굴 위로 내비췄던 감정은 '안도'였다. 그녀는 안도하고 있었다. 누가봐도 방금 전에 방 안에서 오가던 대화를 듣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내비친 내 반응을 확인하고서는 말이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셋이, 아니 어쩌면 넷일 수도 있지만 어찌되었건 저들이 획책하고 있는 뭔가는 절대로 내게 들켜서는 안 되는 내용이라는 걸.
대체 뭘 꾸미고 있길래 저렇게 꽁꽁 숨기려고 하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내 손안에 쥐어져있는 힌트라고 해봐야 별 것도 아닌 것들 뿐이었으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의심이라도 하는 것처럼 둘의 얼굴을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던지고 있자니 내 얼굴 위에 떠올라있는 그걸 그냥 방치하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앨리스가 곧바로 입을 열어 수습을 시도했다.
"아, 별건 아니고 교류전에서 순서를 어떤 식으로 가져가는게 좋을지 이야기 중이었지~"
너스레를 떨뜻 손을 팔랑팔랑 흔들면서 그리 말한 앨리스가 주인공 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 놈을 향해서 던져진 눈빛이 얼른 맞장구라도 쳐보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처럼 느껴졌던 건 과연 기분탓이었을까.
참으로 다행히도 앨리스의 필사적인 의지가 무사히 놈에게 전달되었는지 놈이 적당히 내뱉은 듯한 말과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그럼 왜 저는.."
해서 그런 식으로 받아쳐주었다.
정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라면 왜 나를 부르지 않은 것이냐.
나도 교류전에 참가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왜 나만 쏙 빼놓고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냐.
혹시 방금 그 말은 핑계고 사실은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냐.
내 의심을 불식시키기에는 고작 그 정도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처럼 맞받아치니 거기까지는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였던 모양이다.
앨리스가 씩 웃으면서 잽싸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야 당연히 네 순서는 이미 정해져있으니까 그렇지."
"네?"
"원래 이런 건 제일 쎈 사람이 맨 마지막에 나가는 거야."
그리 말한 앨리스가 동의를 구하듯 주인공 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놈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앨리스의 발언을 인정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분명 사전에 미리 짜거나 그런 게 아닐텐데도 둘의 호흡은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앨리스의 이야기가 꽤나 그럴 듯하게 들리기도 했다.
아니, 실제로 나쁘지 않은 전략이긴 했다.
카트린느가 급하게 만들어서 건네준 중화제는 두 병이 전부였고, 그 중에 한 병은 이미 선발전을 치룬답시고 소모된 상태다.
고로 내가 원래 몸으로 돌아가서 전력을 낼 수 있는 건 딱 한 번뿐이라는 소리다.
그 한 번도 약효가 떨어질 때까지가 한계일 것이고.
그런 날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맨 마지막으로 나서는 대장 역만한 역할이 또 없겠지.
제국하고 바로 붙는 거라면 모를까 교국에서 판을 키워버린 바람에 짜잘한 국가들이 모여서 만든 연합팀과 교국에서 출전시킨 팀까지 교류전에 참가하게된 이상 제국하고 붙는 건 아마도 2차전이 될 가능성이 크니까.
누구랑 붙게 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잘하면 1차전에서 딱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나라는 카드를 쓰지 않고도 2차전으로 직행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터.
그렇기에 '어때? 괜찮은 작전이지?'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으로 으스대고 있는 앨리스의 말에 차마 부정을 표할 수가 없었다.
부정을 표할 수 없다는 것은 더 딴지를 걸만한 구석도 없다는 소리였고.
"죄송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아냐, 그나저나 국경도시가 궁금해서 왔다고 했지?"
이번 건은 명백히 내 실수였다는 느낌으로 슬쩍 숙이고 들어가니 신경쓰지 말라는 듯 피식하고 웃은 앨리스가 문틈 사이에서 빠져나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섰다. 그리고는 마침 목도 마르고 하니 매점칸으로 가서 뭐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자며 자연스럽게 날 자신의 방과 주인공 놈으로부터 먼 곳으로 유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도가 눈에 뻔히 보였지만 일단은 어울려주기로 했다.
어차피 이곳에 계속 붙어있어봐야 뭔가를 더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그렇게 좁고 덜컹거리는 열차 복도를 앨리스와 함께 걸으며 아까 문틈 사이로 주워들었던 말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때 내 귀로 흘러들어왔던 말들은 총 네 마디였다.
-..녀..끌어..숫자..맞..니다..
-..무리..도..좀..
-..니라..녀..움..필수..
-..말.. 그.. 법...능..가요?
문이 닫혀있었기도 하고, 기차가 덜컹대며 난 소음 때문에 죄다 중간중간이 끊어진 상태긴 했지만.
아무튼 저기서 주목할만하 부분이라고 하면 역시..
녀로 끝나는 단어인지 아니면 중간에 그 말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녀.'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단어들하고는 다르게 무려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두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소리겠지.
'녀가 들어가는 단어라고 하면..'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왕녀라는 단어였다. 그와 함께 떠오른 것은 다름아닌 레이시아의 얼굴이었고.
그렇지만 그것일리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시아는 이미 그들과 한편으로 추정되는 상태니까. 이미 한편인 이를 가지고 언쟁을 벌일 이유는 없을 터.
그보다는 지금의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우리는 제국에서 제안한 교류전에 참가하기 위해 교국으로 향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그런만큼 그 단어또한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 가능성이 컸다.
제국, 그리고 교국과 관련된 단어 중에 녀로 끝나거나 중간에 녀가 들어가는 단어라고 한다면 역시..
떠오르는 단어는 딱 두 개였다.
이번에 제국 측 책임자이자 참가자 중 한 명으로 참가한다던 이를 가리키는 '황녀'라는 단어와 교류전의 진행을 책임지기로 한 교국 측 수뇌부 중 한 명이자 교국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성녀'라는 단어 말이다.
주인공 놈이 언급했던 게 그 둘 중에 하나라고 치고 뚝뚝 끊어진 것들을 눈치껏 짜맞춰보면..
'황녀 혹은 성녀를 끌어들여야 숫자가 맞다? 황녀 혹은 성녀의 도움은 필수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문장은 아마도 그게 될 가능성이 크겠지.
나름대로 완성해본다고 완성을 해봤는데 오히려 더 아리송한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저 말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
대체 그 숫자라는 게 뭐길래 황녀나 성녀를 끌어들여서라도 맞춰야 한다는 것인지, 왜 황녀 혹은 성녀의 도움은 필수라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말이 흘러나온 곳이 다른 곳도 아니고 주인공 놈의 입이라는 사실이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뭐하는 새끼지 이거..'
놈은 뭘 알고 있는 걸까.
뭘 알고 있길래 남들이 들었다면 경악했을만한 말들을 그런 식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뱉어댈 수 있는 걸까.
자꾸만 좁아지려고 하는 미간의 움직임을 억누르면서 맞은 편에 앉아 국경도시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대는 앨리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을 했다.
그녀는 내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국경도시의 장점만 늘어놓을 이유가 없으니까.
지금까지 앨리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만 들어보면 국경도시는 수도만큼이나 발전한 곳임과 동시에 즐길거리가 넘치고, 하도 착실해서 범죄따위는 알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세상에 강림한 유토피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 그리고 뭣보다.."
그렇게 열심히 떠들었음에도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보다.
깜빡했다는 투로 입을 연 앨리스가 잽싸게 덧붙였다.
"음식이 진짜 맛있어."
"그래요?"
"응, 고기를 몇시간동안 특제소스에 담궈놓고 푹 익히는 고기가 있는데 베어물면 소스하고 육즙이 쫙 터져나오면서 고기가 결대로 부들부들하게 찢어지는데.."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같이 파는 납작하게 구운 빵 사이에 야채와 함께 끼워서 먹으면 최고라며 앨리스가 극찬에 극찬을 늘어놓았다.
무슨 용비어천가라도 부르는 것마냥 한 번 시작되니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는 앨리스의 칭찬릴레이를 듣고 있자니 사람 심리상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추측도 얼추 끝난 상황이었기에 나머지는 나중에 방에 가서 하기로 하고 이어지던 생각을 그대로 끊어내며 앨리스의 발언에 참여했다.
"그렇게 맛있어요?"
"응, 술이랑 먹어도 최고야."
다른 이라면 모를까 수도의 맛집에 대해 나름 빠삭하게 꿰고 있을 정도로 은근히 먹는 것에 대해 깐깐한 편인 앨리스가 이리 말할 정도라니 대체 어떤 맛일까.
그건 직접 먹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말을 하면서도 맛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는 앨리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자꾸만 입에 침이 고였다.
해서 그걸 목구멍 안으로 밀어넘긴 순간이었을 것이다.
귓가로 꼴깍하는 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말을 하면서도 슬쩍슬쩍 내 눈치를 살피던 앨리스가 이내 은근슬쩍 제안을 해왔다.
"궁금하면 도착하거든 먹으러 가볼래? 마침 잘 아는 집이 하나 있거든."
이걸 여기서 데이트 제안으로 우회를 한다고?
어쩐지 조금 과할 정도로 칭찬을 늘어놓더라니만..
어떻게 할까.
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혹시라도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내 의심을 완전히 털어낼겸 본인의 잇속도 챙기겠다는 의도가 훤히 보이는 제안이었지만 솔직히 좀 끌리긴 했다.
어떤 맛일지 궁금하긴 했으니까.
"..저야 상관없긴 한데 시간이 날까요?"
그렇다고 덥썩 수락하지는 않았다.
대신 살짝 물러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니 앨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을 해왔다.
"한끼 먹을 정도의 시간은 나지 않을까? 바로 출발하지는 않을테니까."
"음.."
"아니면 혹시 쉬고 싶은 거면.."
"아니에요. 가요."
그리 말하면서 계속 기차 안에만 있었더니 답답해서 안 그래도 좀 바깥을 돌아다니고 싶었던 참이라고 덧붙이니 앨리스의 얼굴 위로 '그렇지..!'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다 같이 가는 거죠?"
내가 그리 물은 순간 '어?'하는 표정을 지나 결국 '이, 이게 아닌데..'하는 표정으로 바뀌어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