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60)화 (160/366)



〈 16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흠..'

이쯤되니 이해가 안 된다는 말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카드를 챙겨온 것도 그렇고, 먼저 도둑잡기를 제안했던 것도 그렇고 분명 뭔가 자신감을 가질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나로서는 디아나가 어떠한 사고의 흐름을 통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렇기에 입꼬리를 추욱하고 늘어뜨리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드는 느낌은 딱 하나 뿐이었다.


보기 안쓰럽달까.


꼴찌 자리는 늘 내가 대신해주었기에 그녀의 전적을 연패라고 부르기에는 명백히 무리가 있긴 했지만, 남들은 소원이라는 빌미로 신나게 즐기고 있는데 혼자서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는데 그게 사실상 연패가 아니고 뭐겠는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한 판 더 하자고 외치는 디아나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필이면 머리카락도 금빛이라서 꼭 비오는  상자와 함께 유기된 골든 리트리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든다고 해야할까.


'거참..'

 정도로 시무룩해하면 안쓰러워서라도 한  정도는 배려를 좀 해줄 만도 한데 말이다. 승부의 세계는 잔혹한 법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다들 판이 여기까지 진행되는 동안 알게 모르게 디아나한테 은혜를 입지 않았던가.

호구도 한두  정도는 따게 해줘야 계속 판에 붙어있는 법인데 말이다.

웃긴 건 클레어의 태도였다.


나는 그래도 그녀가 한두 번 정도는 디아나를 밀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디아나를 애지중지 아끼던 클레어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시무룩해하는 제자의 모습이 신경쓰여서라도 대놓고 저지르든 티나지 않게 저지르든 어떤 식으로든 디아나가 1등 자리를 차지할  있도록 돕는 모습이라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취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판이 여기까지 진행되는 동안 그런 모습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나라도..'

좀 도와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디아나의 주도로 시작된 판에 참가 의사를 밝혔다. 날  옆에 앉혀두고 있었던 카트린느는 상당히 아쉬워했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만취해있는 이상 내가 다시 꼴찌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크니 자기가 다시 1등을 차지하면 방금까지 누리던 만족감을 다시금 느낄  있을 거라 판단한 걸까.


누가보면 1등 자리를 맡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보일 법한 태도였지만, 여태까지의 전적을 되짚어보면 그녀가 그토록 자신감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돌아가면서 1등을 차지했던 세 명 중에 카트린느가 그것을 차지한 비중이 가장 높았으니 말이다.

'뭐, 그것도 판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의 이야기지만..'

이왕 디아나를 밀어주기로 한 것,  때 제대로 해야하지 않겠는가. 해서 일단 클레어한테 신호부터 보냈다. 다행히 취한 와중에도 내 신호를 캐치할 정신만큼은 남아있었던 것일까. 작게 몸을 움찔거리길래 카드를 나눠주는 척 하며 디아나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더니 클레어가 슬며시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확실히 다들 많이 취한 상태긴 한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시도해올 리 없으니까. 카드를 나눠주는 틈을 타 은근슬쩍 내 손을 더듬은 앨리스는 차라리 귀여운 축에 속했다. 카트린느는 거기서 한술  떴으니까. 술기운에 이성이라는 것이 완전히 증발해버린 것일까. 힘들다면서 은근슬쩍 내쪽으로 몸을 기울여 내게 몸을 기댄 그녀가 봉긋하게 솟아오른 제 가슴을 내 몸에 대고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힘들만한 크기긴 했다.

그것이 팔뚝하고 어깨, 그리고 얼굴을 짓누르는 순간 압도적인 쿠션감이 몸을 감싸며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게 될 정도였으니까.

갑작스러운 카트린느의 접촉에 당황한 척을 하고 있자니 안 그래도 술기운으로 화끈화끈거리던 얼굴이 한층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낄  있었다. 동시에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하고 뛰어대기 시작한 것은 덤이었다.


"어.. 음.."

확실히 나도 많이 취하긴 했나 보다.


평소같았다면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카트린느를 밀어내거나 오히려 그녀의 품에 안기거나 했을텐데 말이다.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한 것이 얼굴을 감싸주니 지금은 그저 움직이기 싫었다.

해서 멍을 때리고 있으니 '벌칙'의 수행은 진작에 끝이 났는데   안에 가두고 있는 카트린느의 모습에 눈에 거슬렸던 것일까. 작게 헛기침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움직인 앨리스가 카트린느의 손을 잡아당겨 내쪽을 향해 기울어져있던 그녀의 몸을 원위치시켰다. 그와 함께 떨어져나간 온기가 살짝 아쉽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작게 입을 벌린  탄식 비스무리한 걸 내뱉고 있자니 누군가 꼴깍하고 군침을 삼키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탄식을 흘리는 내 모습이 먹음직스럽게 느껴지기라도 했나 본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까보다 조금 더 뜨거워진 듯한 시선들을 받아내며 내 몫으로 가져온 카드들을 집어들었다.


어쩌면 마지막 판이 될지도 모르는 게임이었다.

슬슬 다들 피곤해하는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나도 슬슬 졸리기 시작했고.

그래서 최대한 디아나를 밀어주는 쪽으로 가려고 했건만..

'어떻게..'


이렇게 두 명이서 대놓고 밀어주는데도 손패가 줄어들질 않는 것일까. 정말 미스테리였다. 아무리 도둑잡기가 운이 많이 작용하는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저건 좀 심하지 않나?

이쯤되면 그냥 하늘이 디아나의 1등을 바라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건 말이 되질 않으니까.


다른 이들은 진작에 한손으로 쥘 수 있을 정도로 패가 압축되었는데 디아나만 여전히 두 손이었다.

본인도  진도가 많이 느리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무슨 쥘부채마냥  펼친 카드 뭉치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디아나가 눈썹을 시무룩하게 늘어뜨렸다.

그러면서도 간신히 짝을 맞추는데 성공한 카드를 버리는 걸 잊지 않는 그녀였다.

포기하지 않는 그 태도를 봐서라도 끝까지 밀어주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패가 꼬일대로 꼬여버린 바람에 이 판에서 디아나가 1등을 차지할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노선을 갈아타기로 했다. 그녀를 밀어주는 쪽에서 내가 1등을 차지하는 쪽으로 말이다.


다행히도 누구하고는 다르게 이쪽은 패가 착착 잘 붙어줘서 자리에 앉은 이들 중에서는 손패가 가장 적은 상황.

꽝을 뽑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뽑기를 이어나갔더니 몇 바퀴 돌지 않아 들고 있던 것들을 모두 털어낼 수 있었다.

'오늘 뽑기 운 좀 받는데..?'

그에 비해 여전히 디아나는 음..

처참했다.

 1등이 확정된 순간, 다들 내가 선사하는 벌칙을 받기 위해 꼴찌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눈치게임이 시작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디아나의 운 없음을 이겨내지 못했다.


마지막에 광대 카드를 두고 나름 진검승부가 벌어지긴 했지만 결국 디아나가 꼴찌를 차지하게 되었으니까.

이번에는 벌칙을 내리는 주체가 나이니만큼 이번만큼은 꼴찌를 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법도 한데 디아나에게서 그런 기색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다 떠나서 다른 이들은 적어도 한 번씩은 1등 맛을 봤는데 자기는 단 한 번도 그걸 맛보지 못하고 매번 꼴찌하고 자강두천을 벌였다는 사실 때문에 많이 자존심이 상한 모양.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모양새가 퍽 애처로웠다.

해서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으음, 뭐가 좋으려나.."

디아나에게 내릴 벌칙을 고민하는 척 미간을 살짝 모으고 있다가 이내 히죽하고 웃으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디아나의 옆으로 옮겨앉은 뒤..

"에잇."


그대로 그녀의 팔을 꼬옥하고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내 접촉에 당황한 모양이다. 아니면 자연스럽게 내 다리 사이에 갇히게 된 손 끝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의 감촉이 당혹스러웠던 걸지도 모르지.


 중에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나는 팔을 움찔하고 떨면서 제가 느끼고 있는 당혹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표출했다. 문제는 반대쪽이 아니라 내 품 안에 안겨있는 걸 그런 식으로 떨었다는 점이다.

덕분에 다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것과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디아나의 손이  물건을 톡하고 건드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세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알게 모르게 쌓인 성욕이라는 이름의 장작더미에 불이 붙으며 물건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걸 디아나라고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씩 몸집을 불리기 시작한  물건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던 디아나의 손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와 함께 나름대로 평정심을 연기하던 디아나의 얼굴 위로 지진이 일어났다.

어색하게 굳은 얼굴과 크게 당황한 사람마냥 거칠게 흔들리는 눈동자, 거기에 위아래로 출렁대는 목울대까지.

온 얼굴을 이용해 있는 힘껏 티를 내는데 그녀와 나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지 못하면 오히려 그게 바보겠지.

그리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 중에 그 정도로 눈치가 없는 이는 없었다.

 증거로 디아나의 손에 내 물건과 접촉사고를 일으킨 순간, 그래서 나도 모르게 흠칫하고 몸을  순간 안 그래도 따끔따끔하던 시선이 아예 찌르는 수준으로까지 진화했다. 그 와중에 살짝 웃겼던 건 클레어의 반응이었다. 디아나와의 관계 때문인지 아니면 혹시라도 내 심기를 거스를까봐 걱정이 됐던 건지 그녀는 다른 이들처럼 차마 대놓고 질투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대신 연거푸 헛기침을 하면서 은근히 디아나를 향해 눈치를 주었지만.

다른 이들이 디아나에 대한 질투를 불태우거나 말거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려던 일을 이어나갔다.


"아직 1등 한 번도 못하셨죠?"

배 안쪽에서부터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굳이 억누르지 않은 채 헤실헤실 웃으며 그리 물으니 디아나의 몸이 아까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움찔거렸다. 거길 찔리는  디아나 입장에서는 상당히 뼈아픈 일이었던 걸까 다른 이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지 어색하게 몸을 경직시키고 있던 그녀가 언제 굳어있었냐는 듯 입꼬리와 어깨를 동시에 축 늘어뜨렸다.

딱 내가 원하던 반응이었기에 곧바로 그녀를 찾아온 이유이자 내가 그녀에게 요구할 벌칙에 대해 밝혔다.

그 벌칙이란 다름아닌..


"제가 알려드릴게요. 그러니까 그대로 한 번 해보시겠어요?"


합법적인 훈수권이었다.


디아나의 팔에 한층 더 몸을 기대면서 그리 말하니 꽤나 격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승부욕 하나만큼은 상당힌 디아나인만큼 어쩌면 그런 내 요구를 듣고 자존심 상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당혹스러워할 뿐이었다.

딱 보니 수락할 것 같아서 곧바로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내가 디아나의 옆에 찰싹 붙어서 훈수를 둔답시고 게임에 불참하게 되면 다른 이들이 게임에 참가할 메리트를 느끼지 못할테니까. 그 부분을 벌충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되면 다른 분들이 살짝 불리하실테니까 대신.. 음.."


셋을 둘러보며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셋이 혹할 수밖에 없는 것을 상품으로 내걸었다. 상품은 당연히 소원권이었다. 다만, 전의 것들과 차이가 있다면 1등이 꼴찌한테밖에 쓸 수 없었던 이전의 것에 비해 지금 내건 것은 일단 따기만 하면  자리에 있는 누구한테든  수 있다는 것 정도?

"어떻게 괜찮으시겠어요~?"

물론, 그걸 상품으로 확정지으려면 다른 이들또한 동의할 필요가 있었기에 잽싸게 그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솔직히 그걸 입밖으로 내면서도 묻는 게 무의미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상 자리가 파장분위기로 접어들고 있는  시점에서 그것은 사실상 소원권의 탈을 쓴 이안 자유이용권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혹할 수밖에 없겠지.

아니나 다를까 동의하냐고 묻는 느낌으로 던진 내 시선을  번씩 받은 이들이 차례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작된 마지막 판.


거기서 1등을 차지한 건...


"이, 이겼다..!"


놀랍게도 디아나였다.

디아나가 손에 들고 있던 두 장의 카드를 테이블 위로 내팽개치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저마다 비슷한 숫자의 카드를 손에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던 이들의 얼굴 위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