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소원이라는 단어는 참 신기하다. 그 말이 누구 입에서 흘러나오냐에 따라서 그 느낌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곤 하니까.
하물며 그게 이성의, 그것도 그냥 이성이 아니라 보고 있으면 입 안에 절로 침이 고여서 침을 삼키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매력적인 이성의 입에서 흘러나온다면?
듣는 입장에서는 엄한 상상이 들 수밖에 없겠지.
그건 그 사람이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일 뿐이니까.
심지어 나는 그녀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취해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취해서 잔뜩 흐트러진 상태로 뭐든 들어주겠다는 것처럼 말을 했으니 당연히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건 살색투성이의 풍경 뿐일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일까 내가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은 순간 방 안으로 내려앉은 건 묘한 침묵이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꼭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입을 다물었던 이들이 제 주변에 앉은 이들을 힐끔대기 시작했다. 명백히 상대방을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러고 있다보니 다들 깨달아버린 모양이다. 지금 주변에 앉아있는 이들 모두가 경쟁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으음, 꼴찌한 사람이 일등한 사람 소원 들어주는 걸로 하죠!"
자리의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지거나 말거나 나는 내 페이스대로 하고 싶은 걸 밀어붙였다. 물론, 이견은 없었다. 다들 제 옆에 앉아있는 이들을 견제한답시고 다른 데 신경 쓸 겨를 자체가 없어보였으니까.
"그러면 종목을 바꿔야 하는데.."
내가 제안한 룰대로 가려면 그럴 필요가 있었다. 꼴찌만 정해도 되는 거면 그대로 가도 상관없었지만 일등도 같이 뽑아야 했으니까. 그렇다고 젠가가 무너질 때마다 그걸 다시 쌓고 무너뜨리고를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래서야 기껏 만들어낸 분위기가 팍 식어버릴 터.
뭐가 좋을까.
종목을 고민하고 있자니 디아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나섰다.
그와 함께 그녀의 품 속에서 등장한 것은 다름아닌 카드였다. 역시 평탄하게 이어지는 일정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카드를 꺼내든 디아나가 제안한 게임은 다름아닌 도둑잡기였다. 스터디 때 느꼈던 굴욕감을 설욕하고 싶었던 모양.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곧바로 그런 그녀의 제안을 채택했다.
도둑잡기라면 철저히 이쪽이 원하는대로 판을 주무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일단 클레어가 나와 한 편이지 않던가.
거기에 모든 게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디아나의 특성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이건 내가 질 수가 없는 게임이었다.
"그러면 일단 자리부터 좀 섞을까요오~?"
내 제안대로 자리를 섞고 나니 자연스럽게 나, 디아나, 클레어, 앨리스, 카트린느 순으로 둘러앉게 되었다.
공정함을 위해 앨리스가 카드를 가져가 섞는 사이에 클레어와 카트린느 상대로 룰을 설명해주었다. 다행히 둘다 어렵지 않게 알아들어서 곧바로 게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단은 첫판이니까아~ 이번판은 연습판으로 할까요~?"
그랬더니 돌아온 건 나름 단호한 거절이었다. 다들 적어도 한 잔 정도는 걸친 상태라 슬슬 술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한 걸까. 다른 여자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자신들은 괜찮으니까 바로 가자면서 손을 내젓는 카트린느와 클레어를 바라보며 히죽하고 웃다가 손에 든 카드를 배분하기 시작했다.
'첫판은..'
당연히 이겨줘야겠지.
그래야 눈치보는 게 조금이라도 덜해질테니까.
해서 카드를 나눠주는 척 하며 클레어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이번 판은 내가 먹을테니까 되도록 끝까지 남아서 꼴찌를 해보라고.
'자, 그럼..'
광대는 과연 누구 손으로 들어갔으려나.
그건 곧 알 수 있었다.
제 앞으로 배달된 카드를 집어든 순간 딱 한 명 표정에 금이 간 사람이 있었으니까.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디아나였다.
'아이고야..'
흡사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디아나의 눈동자가 확대되더니 그녀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 위로 일어난 그러한 변화들을 확인한 순간,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나름 빨리 수습해본다고 수습해본 것 같기는 한데 그러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으니까. 덕분에 나를 포함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전부 눈치챈 것 같았다. 디아나의 손에 광대가 들려있다는 걸 말이다.
'거참..'
그렇기에 더욱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녀는 대체 무슨 자신감과 배짱으로 리벤지 매치를 신청했던 걸까. 나로서는 그녀가 그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어떤 흐름을 거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판에서 나는 무사히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1등으로 손을 털고 나오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운도 운이지만 디아나와 클레어의 덕이 컸다.
어쩜 이렇게 나한테 필요한 패를 따박따박 가져다주는지 디아나의 것을 뽑았다하면 내 손에 들린 카드의 수가 줄어들었으니까.
"자자, 그러면 얼른 꼴찌를 뽑으시죠오~"
1등을 해서 업된 것처럼 흐흫하고 웃으며 허공에 대고 딱밤 튕기는 시늉을 하고 있으니 내게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서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해하던 이들이 게임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어진 게임에서 꼴찌를 차지한 건 내 지시를 잊지 않고 있었던 클레어였다.
디아나의 얼굴이 열일을 해준 덕분에 사실상 디아나가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지만 클레어가 마지막에 눈을 질끈 감고 광대 카드를 뽑아버린 덕분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제자를 위해 스승이 희생하는 것처럼 보여졌던 모양이다.
디아나가 꼴찌의 굴욕을 맛보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름대로 기대감을 불태우고 있던 앨리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그에 비해 디아나의 얼굴에는 흡사 구원이라도 받은 것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고.
마침내 디아나의 손에 들려있던 두 장의 카드가 그녀의 손을 떠나며 클레어가 꼴찌로 결정된 순간, '으음..'하고 소원으로 뭘 빌지를 고민하는 척을 했다. 물론, 클레어가 꼴찌가 될 줄은 몰랐다는 듯 살짝 난감해하는 기색을 얼굴 위로 내비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온 얼굴을 사용해서 고심하는 척을 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클레어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녀의 무릎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꼭 마치 그게 소원이라는 것처럼.
내가 뭘하든 간에 너무 놀라지만 말라고 미리 귓뜸을 해두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런 식으로 훅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걸까.
엉덩이로 깔아뭉개고 있던 클레어의 허벅지에 힘이 바짝 들어가며 그녀가 몸을 뻣뻣하게 경직시켰다.
동시에 디아나의 얼굴 위로 황망해하는 표정이 떠오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클레어 쪽으로 향하길래 저번처럼 딱밤같은 걸 예상했었던 모양이다. 내가 클레어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기 전까지 '어쩌지..'하는 느낌으로 나와 클레어를 번갈아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 하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확실했다.
그랬던 디아나의 얼굴이 지금은 '어..? 이거 아닌데..?'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런 디아나만큼이나 격렬한 것이 다른 둘의 반응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한 잔을 더 마셔서 그 차이만큼 더 취하기라도 한 걸까. 앨리스는 나와 클레어를 보며 살짝 울컥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카트린느는 뭔가를 빼앗긴 것만같은 표정을 얼굴 위에 띄워올리고 있었다.
클레어에게 응석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그녀의 무릎 위에 걸터앉아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제가 사랑해마지 않는 누나로서의 역할을 클레어한테 뺴앗긴 것만같은 느낌이라도 들었던 모양.
그렇게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경악하고 있는 셋의 반응을 다 합쳐도 사실 클레어가 내비치고 있는 것에 비하면 한참 못하긴 했지만.
이왕 앉은 김에 아싸리 등까지 기대니 한층 더 넓어진 접촉 면적을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뻣뻣하게 굳어있던 클레어의 몸이 한층 더 딱딱하게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몸에 얼마나 힘을 준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이대로 방치해두면 온몸에 쥐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대로 고개만 살짝 들어올려 그녀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졸지에 내 머리를 받아내게된 클레어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리더니 날 배려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살짝 밑으로 내려오는 걸 느끼면서 그녀를 향해 물었다.
싫냐고.
"그으..런 건.."
"계속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으려니까 엉덩이가 아프더라구요."
그리 말하면서 푹신푹신한 게 마음에 든다는 듯 헤실헤실 웃었다. 그에 대한 반응은 꽤나 극적이었다.
확실히 내 모습이 평소에 비하면 많이 흐트러진 상태긴 했는지 날 바라보고 있던 이들의 얼굴 위로 홍조가 어리기 시작했으니까. 하물며 그것에 직격당해버린 클레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의 목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확 솟구치더니 그것이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을 점령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까 전부터 얼굴 위로 띄워올리고 있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클레어의 상체에 뒤통수를 비볐다.
그런 내 모습이 디아나를 포함한 이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자연스럽게 응석을 부리는 날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아, 얘가 많이 취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모습을 자신이 독점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일까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이들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앨리스로부터 지적이 날아든 것은 그 묘하디 묘한 분위기가 방 안으로 흐르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 상태로는 게임을 할 수 없으니 이만 벌칙을 끝내는 게 어떻겠냐고 날 어르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앨리스를 향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싫어요."
동시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완강하게 거부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 정도면 포기할 법도 한데 앨리스는 상당히 끈질겼다.
해서..
"그러면 스승님이 한 게임 쉬시면 되겠네요. 그쵸?"
그렇게 받아쳤다.
그쯤되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지금의 내게는 통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결국 날 설득하는 걸 포기한 앨리스가 얼른 다음 게임을 시작할 것을 재촉했다.
말로 날 설득할 수 없다면 자신이 1등을 차지하고 날 꼴찌로 만들어서라도 날 클레어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오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
앨리스의 재촉과 함께 시작된 두 번째 판의 승자는 의외로 카트린느였다.
그리고 꼴찌를 차지한 건..
'나네?'
얘가 왜 내 손안에 있는 걸까.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의 기억이 안개라도 낀 것마냥 흐릿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 이안? 누나한테 와."
카트린느가 제 허벅지를 두들기며 날 향해 손짓했다. 해서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게 네 소원이냐고.
"소원이야?"
"응, 소원이야."
"씨.."
분하다는 듯 입술을 살짝 내민 채 클레어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오니 뒤쪽에서 '아..'하고 아쉬움이 그득하게 담겨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카트린느의 앞으로 가서 서니 더는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그녀가 곧장 손을 뻗어 내 몸을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반쯤 강제로 제 허벅지 위에다가 앉혔다.
그리고는 묻더라.
"어때? 누나 쪽이 더 편하지?"
그리 묻는 목소리에서 짙은 자신감이 느껴졌다.
'확실히..'
자신감을 가질만 했다. 카트린느에게 몸을 기대고 앉으니 클레어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압도적인 쿠션감이 내 머리를 받쳐주었으니까.
'시발 이게 마약베개지..'
암, 그렇고 말고.
해서 사실대로 대답해주었다. 햇볕을 만끽하는 고양이마냥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니 어디선가 빠직하고 뭔가가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게도 카트린느의 서비스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목 마르지는 않아?"
내가 목이 마를 거라는 건 또 어떻게 안 것인지 자연스럽게 입쪽으로 들이밀어진 컵 안에 든 것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렇게 컵을 반쯤 비우니 이만하면 충분히 마셨다는 것처럼 컵이 떨어져나갔고, 뒤이어 들려온 소리는..
바로 조금 전까지 내가 내던 것과 똑같은 소리였다.
자연스럽게 귓가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그 소리에 속으로 헛웃음을 짓고 있자니 내가 남긴 것을 깔끔하게 비워낸 카트린느가 손에 들고 있던 컵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에 더는 참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일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디아나의 요청으로 3차전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나는 판이 끝날 때마다 카트린느와 앨리스, 클레어의 허벅지 위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옮겨다니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녀들이 날 상대로 펼치는 행위의 수위또한 조금씩 올라갔다.
과연 누가 먼저 선을 넘을지 나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던 가운데..
"하, 한 판 더 해.."
유일하게 단 한 번도 1등을 차지하지 못한 디아나의 얼굴은 어느새 울상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