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58)화 (158/366)



〈 15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럼, 저부터 시작할게요."

벌칙을 건 보람이 있었다. 벌써부터 자리에 앉은 이들이 살짝 긴장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와 함께 쏟아지기 시작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중간 쯔음에서 블럭 하나를 꺼내 위에다 올렸다.

"자, 다음은.."

그리고는 저렇게 하는 거구나라는 느낌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던 카트린느에게 차례를 넘겼다. 내게 지목당하고는 흠칫했던 것도 잠시, 그녀가 블럭더미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막상 손을 뻗고 나니 어떤 걸 빼는 게 좋을지 고민이 됐던 걸까. 가느다란 손가락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러던 카트린느가 결국 선택한 쪽은 내가 빼낸 곳의 정확히 반대쪽이었다.


'이야..'

저걸 뺀다고?


덕분에 이제  시작되었음에도 난이도가 상당히 올라가버렸다. 얼핏 보기에는 굳건히 잘 서있는 것 같아도 가운데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 블럭 하나 뿐이다보니 아래서부터 빼낸 걸 안일하게 쌓게 되면 윗부분의 균형이 흐트러져서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버릴 가능성이 크니까. 게다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한창 내달리고 있는 기차 안이지 않은가?

솔직히 말해 젠가를 하기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지금도 차체가 덜컹덜컹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즉, 이 흔들림마저 고려하고 플레이를 할 필요가 있었다. 벌칙을 받기 싫다면 말이다.

아무튼 카트린느는 그렇게 빼낸 블럭을 내가 쌓아둔 것 옆에 두었고, 그렇게 순서는 디아나에게로 넘어갔다.

카트린느하고 다르게 디아나의 선택은 안전빵이었다. 혹시라도 무너질세랴 밑에서부터 두 번째 칸을 차지하고 있던 블럭을 손가락으로 툭툭 쳐서 끄집어낸 그녀가 '성공!'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히죽하고 웃으며 빼낸 블럭을 위에다가 얹었다.


그리고 그런 디아나의 다음 차례를 넘겨받게된 클레어는..

"흠."

착실하게 내 지시대로 움직였다.

곧게 뻗은 클레어의 손가락이 블럭 하나만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던 칸의 아랫부분을  건드렸다.


아래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던 것 중에 하나가 사라지니 안 그래도 아슬아슬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던 블럭의 탑이 기차의 흔들림에 맞추어 요동을 쳐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가 빼낸 블럭을 위에다가 올린 클레어가 앨리스에게 차례를 넘겼다.

안 그래도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꿀렁대는 것이 코앞으로 배달되니 살짝 못마땅했던 것일까.

작게 혀를 찬 앨리스가 이내 블럭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도 하긴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

그렇게 뻗어져나간 것이 그녀가 목표로 하고 있던 블럭을 톡 건드린 순간, 기차가 덜컹하고 흔들리며 탑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이 멤버에서 패배자가 되기는 또 싫었던 걸까.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살짝 무성의한 느낌을 풀풀 풍기던 앨리스의 손가락이 움찔하고 떨리며 있는 힘껏 동요를 드러냈다.


한 번 데일 뻔 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앨리스의 손가락이 조심조심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애석하게도 주변 상황이 받쳐주질 않았다. 그녀가 어렵사리 블럭을 빼내는데 성공한 순간 아까전부터 덜컹덜컹하고 차체를 뒤흔들고 있던 떨림이 일순간 살짝 강해졌으니까. 그리고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게 버티던 블럭들은 한결 강해진 흔들림을 버텨내지 못했다.


왼쪽으로 휘청, 오른쪽으로 휘청대며 술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리던 탑이 그대로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덕분에 신중하게 빼낸 블럭을 올릴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된 앨리스의 얼굴 위로 황망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꼭 마치 '아니, 이게  무너져?'라고 항의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누구를 향한 항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상당히 열받아하던 앨리스를 한층 더 열받게 만든 것은 디아나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푸훗하고 바람빠지는 소리가 울려퍼지길래 그쪽을 쳐다봤더니 디아나는 누가봐도 앨리스를 놀리는 듯한 표정을 얼굴 위에 걸고 있었다. 그와 별개로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앨리스의 운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말이었지만.

차라리 말로도 놀렸다면?

앨리스가 저 정도로 열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자연스럽게 벌칙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르지.


허나 떄로는 대놓고 놀리는 것보다 그런 식으로 살살 긁는 것이 더 열받을 때도 있는 법.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앨리스로 인해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타이밍이라 여긴 건지 디아나는 한 번 시작한 깐족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첫 판인데 봐주는  낫지 않을까? 연습이라고 치고 말이야."


앨리스를 배려하는 듯한 그 말이 앞으로도 많이 걸릴  같은데 이번 한 번은 봐주는 게 어떻겠냐는 말처럼 들렸던 건 과연 나만 그랬던 걸까.


슬쩍 앨리스의 반응을 확인해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할  있었다.

내게만 그렇게 들렸다면 지금 저렇게 앨리스의 볼에 힘이 바짝 들어가며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 상태로 앨리스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전히 입꼬리가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는 탓에 누가봐도 억지 미소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에이, 설마 그렇겠어요?"


디아나가 앨리스에게 일방적으로 딜을 때려넣는 사이에 은근한 귀여움을 자랑했던  다름아닌 클레어였다. 그 날 이후로 마주칠 때마다 은근히 자신을 괴롭혔던 앨리스가 당하는 꼴을 보니 속이 시원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도 앨리스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그녀는 차마 디아나처럼 대놓고 웃지는 못했지만 기침을 하는 척 손으로 슬쩍 입가를 가리며 몰래 웃었다.


그러면 카트린느는 뭘했냐고?


날 도와 벌칙을 준비하고 있었다.

혼자서 해보려고 했는데 병 입구 부분에 무슨 접착제같은 거라도 발라놓은 것인지 뚜껑을 손으로 잡고 낑낑대봐도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으니까.


그런 내 모습이 살짝 안타까웠는지 내 손에 있던 병을 자연스럽게 들고간 그녀가 그것의 뚜껑 부분을 잡고 비틀었다.

뽕-!


단단히 밀봉되어 있던 것이 열리며 난 경쾌하기 짝이 없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독주 특유의 냄새였다. 자연스럽게 콧속으로 흘러들어온 그것이 그곳을 푹하고 찌른 순간 깨달았다. 클레어가 내 지시사항을 아주 철저하게 이행했다는 걸.


'독한 걸로 챙겨오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선을 지킬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저렇게 무시무시한 놈을 챙겨올 줄이야.


잔에 따른 것도 아니고 그저 뚜껑만 땄을 뿐인데 흘러나오는 냄새가 어찌나 강렬한지 그것만으로도 취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걸까.

열심히 디아나와 입씨름을 하고 있던 앨리스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솔직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취하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가 말이다.

그래서..

꼴꼴꼴꼴-

미리 준비해둔 잔에 조심스레 그것을 따라냈다.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와 함께 아까부터 코를 찌르던 향기가 한층 더 강렬해진채 후욱하고 끼쳐왔다.

'미친..'

덕분에 살짝 걱정이  수밖에 없었다.


첫 한 잔이야 앨리스가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는 흉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녀에게 제공키로 결정했지만 이 다음부터 잔을 채우는 것들은 아무래도 내가 마시게 될 가능성이 컸으니까.

티나지 않게 실수를 남발해서 술을 연거푸 들이킨 다음에 취한 척 연기를 하며 여성들의 반응을 확인해볼 계획이었는데 말이다.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화끈한 벌칙주의 도수에 살짝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무사히 그것을 모두 따라내니 다른 이들 앞에서 쫄아서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앨리스가 곧바로 그것을 낚아채갔다.

얼굴 쪽으로 가져가니 술의 도수가 한층 더 세게 와닿았던 걸까.

꼴깍하고 침을 삼키며 잔 안에  갈색의 액체를 노려보던 것도 잠시, 앨리스가 그것을 그대로 쭉 들이켰다. 그런 그녀의 턱을 타고 잔에 담겨있는 액체가 살짝 흘러내렸다.


냄새만큼이나 맛도 독한 모양이다.

기세 좋게  안에 담긴 걸 들이키던 앨리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누가봐도 '써!!!'라고 외치는 듯한 모양새라 안주라고 하기는 좀 뭣하고 입이 심심할 때 먹으라고 놓아둔 사탕 하나를 집어들어 곧바로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물론, 앨리스는 내가 내민 도움의 손길을 사양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의식할 법도 하건만 술이 너무 써서 그럴 겨를마저 없었던 것일까.

"괜찮으세요?"

"응, 좀 낫네. 고마워."

 와중에 살짝 웃겼던 점은 쓴맛이 주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다른 이들을 향한 도발도 잊지 않는 앨리스의 태도였다.


게임 중에 실수  번 했다고 디아나한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던  그리도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뭐, 효과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다.

내 손가락 사이에 잡혀있던 사탕을 가져가는 와중에 그녀의 혀가  손가락 끝을 보란듯이 핥아댄 순간 디아나의 뺨이 경직되는 걸 볼  있었으니까.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지 카트린느나 클레어가 내비친 반응도 비슷했다.

벌칙에 당첨된 앨리스를 비웃던  언제고 앨리스의 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했다고 부러워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이거 참..'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분위기가 굉장히 묘하게 변해버렸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벌칙에 걸리지 않기 위해 신경쓰는 느낌이라면 지금은 걸려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느낌?

덕분에 연달아 벌칙에 당첨되어 술에 취한 척을 한다는 계획에 적신호가 들어오는 듯 했지만..

철저히 개인인 그녀들과는 다르게 내게는 클레어라는 강력하기 그지없는 조력자가 존재했다.

여성진들이 대놓고 실수를 하기에는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눈치가 보여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렇다고 과감한 수를 두자니 다음 차례인 사람한테만 좋은 일이 될까봐 어정쩡한 시도를 남발하는 사이 나는 클레어가 차려준 밥상을 떠먹기만 하면 됐다.


나와 클레어 사이에 낀 앨리스의 존재가 살짝 복병이긴 했지만 벌칙의 인상이 상당히 강렬하게 남았던 모양인지 그녀는 위험한 시도 자체를 하질 않았으니까.


덕분에 내 차례에서 탑이 무너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고, 이번에도 나는 갈색의 액체가 반쯤 채워진 잔을 받게 되었다.


'음..'

이게 벌써   째더라.

솔직히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앨리스가  잔 마시고 그런 표정을 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대체 몇 도짜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술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간 순간 무슨 불덩이라도 삼킨 것같은 느낌이 목구멍을 타고 훅 내달리는데..


'어우..'

상상하니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살짝 의외였던 점은 몇 잔 못 버티고 취해버릴 거라는 당초의 예상하고는 다르게 의외로 지금까지 정신이 멀쩡하다는 것 정도?


몸은 허약해도 의외로 간은 또 짱짱한 걸까.


취기가 아예 없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대충 두 잔째 마셨을 떄부터 기분이 둥실둥실하게 변하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헤픈 웃음이 입술 사이를 뚫고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뜨끈뜨끈하게 느껴지는 볼을 양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자니 이유모를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런데 웃긴 건 정신은 또 말짱하다는 점이었다.


묘하게 차분해진다고 해야할까.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차분해지는 타입도 있다더니 아무래도  몸이  그런 케이스였던 모양이다.


몸은 분명 취했는데 정신은 취한 것 같지가 않은 상황.

거기서 오는 괴리감이 선물해주는 묘한 느낌을 만끽하고 있자니 내가 완전히 취했다고 판단한 걸까.


날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 앞에 놓여져있던 잔을 가져가기 위해 손을 뻗어왔다.

손에 살짝 굳은살이 박혀있는 걸 보면 디아나인가?

어쩌면 앨리스일지도 모르지.

카트린느일수도 있고.

아무튼 왠지 뻇기기가 싫어서 날 향해 조심스레 뻗어오는 그것이 잔에 닿기 전에  앞에 있던 것을 낚아채 그대로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누가 뺏어갈세랴 그것을 쭉 들이켰다.


급하게 들이킨 탓에 잔 안에 들어있던 것이 턱을 타고 흘러내리며 옷을 적시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바닥까지 비워냈다.


동시에 목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 화끈한 느낌을 만끽하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있자니 쓴맛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본 건지 누군가 입 안으로 사탕을 넣어주었다.

레몬을 생각나게 하는  맛이 나는 그것을 입 안에서 데록데록 굴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아무래도 이안이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누군가 조심스럽게 이만 자리를 파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꺼내들었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목소리에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항변했다.


"안 취했는데요오~"

목소리가 제멋대로 풀린 채로 흘러나가버린 바람에 그리 효과는 없을  같긴 했지만.

그런 내 발언을 완전히 취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점점 분위기가 파장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길래 잽싸게 억지를 부렸다. 조금만 더 하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억지는 받아들여졌다.

대신 벌칙은 바꿔야 했지만.

"으음, 새 벌칙.."

뭐가 좋을까.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면서 외쳤다.

"소원 들어주기 어때요? 소원 들어주기 좋다!"


그렇게 내가 기다려마지 않았던  게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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