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57)화 (157/366)



〈 15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교국으로 향하는 길은 굉장히 순탄했다.

주인공 놈하고 함께 움직이는 것이니만큼 혹시 중간에 열차를 노린 습격같은게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하고는 다르게 말이다.

덕분에 굉장히 심심해졌다.


처음 며칠이야 여행의 설렘도 느껴볼겸 몰래몰래 여성들을 방으로 끌어들여 몸을 섞기도 했지만 그렇게 시간을 때우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마냥 그러고 있기도 좀 그랬으니까.

그렇기에 뭔가 시간을 때울만한 거리가 필요했다.


'저번처럼 카드게임이라도 해야하나.'


설마 이렇게 심심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기에 카드는 챙겨오지 않았지만 이 큰 열차 안에 설마 카드 한 벌이 없겠는가.


찾다보면 한 세트 정도는 나올 터.


그렇지만 어째 영 끌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뭔가 다른 게 없을까하고 열차 안을 돌아다니다 보니 눈으로 들어온  매점칸에 비치되어있는 난로를 위한 장작들이었다. 어째 시선을 사로잡는 그것의 모습에 아주 잠시동안 그걸 바라보다가 근처를 지키고 있던 매점칸 담당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하나를 챙겼다.

나무라고 하니 생각나는  하나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더럽게 무겁네.


보기에는 그리 무거워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낑낑대며 그것을 나르고 있자니 막 샤워라도 한 것인지 살짝 젖은 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면서  방에서 빠져나오는 클레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걸 보고 마침 잘 됐다 싶었다.  그래도 칼 좀 쓰는 이를 찾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맘 같아서는 직접 하고 싶었지만 몸이 이러니 어쩌겠는가?


다른 사람 손이라도 빌리는 수밖에.

"스승님~!"


해서 곧바로 그녀를 부르니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해 친근하게 내뱉어진  목소리가 영 적응이 되질 않았던 모양이다.

무슨 화들짝 놀란 고양이마냥 어깨를 크게 움찔하는 클레어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작게 혀를 차고 있자니 그녀가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처신  하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그런 그녀를 상대로 일단 경고부터 날렸다.


이건 뭐 나랑 뭔가 있다고 대놓고 티를 내는 것도 아니고, 이쪽을 보고 있던 사람이 없기에 망정이지 방금 그걸 누가 봤다면  때 학원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문이 재점화되었으리라.


"으, 응.."

"앞으로는 주의하세요. 아시겠죠?"

다시 한 번 경고를 하니 클레어가 시무룩한 표정을 한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클레어를 끌고 방금 그녀가 걸어나왔던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장소가 앞뒤로 탁 트인 복도에서 자신의 방으로 바뀌니 그녀 입장에서는 엄한 상상이 들 수밖에 없었던 걸까.


클레어의 얼굴 위로 홍조가 어리기 시작하더니 내 손아귀 안에 갇혀있던 그녀의 손가락 끝이 움찔움찔대며 묘한 떨림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떡줄 놈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김칫국부터 사발째로 들이키는 모양새라 문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실소하는  보고 내가 자신을 방으로 끌고 들어간 목적이 그렇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버린 것일까. 방에 딸린 커다란 차창에 비친 클레어의 얼굴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빨갛게 변해있었다. 아무래도 혼자서 지레짐작하고 기대감을 불태웠던 것이 상당히 쪽팔렸던 모양.


답지 않게 어깨까지  늘어뜨린채 실망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솔직히  안쓰럽긴 했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들어주실거죠?"

 말에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향해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가 부탁하는 걸 잘 해낸다면 상을 주겠다고.

그러자 들려온 건 꼴깍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였다. 내가 언급한 상에 대한 기대감이 아주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그 소리에 다시 한 번 실소하니 클레어가 민망하다는  슬쩍 몸을 비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아까 매점칸에서 챙겨왔던 장작을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나와 제 앞으로 들이밀어진 것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게 뭐냐는 표정을 하고 있는 클레어를 향해 부탁했다. 그걸 내가 요구하는 모양대로 깎아달라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하던 것을 무사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겸사겸사 클레어가 단도도 상당한 수준으로 다룬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살짝 의외였던  단도를 이용해 나무를 깎는 클레어의 모습에서 어딘가 익숙함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마치 예전에도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해본 사람같은 태가 난다고 해야할까.

혹시 전쟁터에서 지낼 때 취미가 나무를 깎아서 조각하는 거라도 됐던 걸까.


궁금했지만 섣불리 꺼내들만한 화제는 아닌 것 같아서 대신 그녀를 향해 물었다.


"뭘 받고 싶으세요?"


포상으로 뭘 받고 싶냐고.

그런 내 발언이 말만하면 뭐든 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들렸던 걸까.


클레어의 목울대가 거칠게 흔들림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뭘 요구하면 좋을지, 자신이 어디까지 요구해도 괜찮을지 알 수가 없었던 걸까.

"결정하기 힘드시면 생각해뒀다가 나중에 말씀해주셔도 되고요."

아무래도 당장 정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길래 그리 말했더니 클레어가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그.. 이, 입맞춤을.."


쥐어짜내듯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키스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있어 너무 노골적으로 느껴지기라도 했던 걸까. 수줍음과 조심스러움이 반씩 섞인 목소리를 덜덜 떨면서 그리 말하는 게 나름 귀여워서 피식 웃으니 그런 내 웃음이 가당치도 않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단숨에 시무룩해진 그녀가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던 찰나 먼저 선수를 쳤다.

"좋아요. 해드릴게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내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것도 잠시, 해줄테니 눈을 감으라는 내 말에 클레어가 황급히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눈에 어찌나 힘을  것인지 질끈 감긴 그녀의  부근이 파들파들 경련했다.

아주 잠시동안 그 모습을 감상하고 있다가 그대로 클레어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그녀가 바라던대로 입을 맞춰주었다.

입이 아닌 볼이었지만.


설마 입술의 감촉이 입이 아닌 그곳에서 느껴질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걸까.

언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클레어가 손을 들어올려 바로 조금 전까지 내 입술이 붙어있던 곳을 어루만졌다. 그런 그녀를 향해 물었다.


"됐죠?"

바라는대로 '입맞춤'을 해줬으니 이제 만족하냐는 식으로.

그러자 클레어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황망함이었다.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제가 어디다가 입맞춤을 해달라고 구체적으로 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걸까.

대체 키스가 뭐라고 흡사 나라라도 잃은 것처럼 황망해하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서 놀리는 건 이쯤하기로 하고 다시금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볼이 아니라 제대로 해줬더니 갑작스러운 내 접촉에 놀란 듯 몸을 흠칫거리던 클레어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놀라긴 했나 보다. 입술과 맞닿아있던 그녀의 입술을 타고 잔떨림이 전해져왔다.

그래도 너무 뚫어져라 바라보는 건 아무리 나라도 좀 민망해서..


"눈 감아요."


가져다붙이고 있던 입술을 살짝 떼어낸 뒤 그리 말했다.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이대로 끝낼 거라고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효과는 확실했다.

동그랗게 변한채 날 내려다보던 클레어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눈꺼풀에 덮여버렸으니까.

상당히 고분고분한  모습에 속으로 흡족하게 웃으며  가지 지시를 추가했다.


"입도 벌리고."


그 즉시 서로 찰싹 달라붙은 채 긴장감으로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던 붉은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며  아래 숨겨져있던 풍경이 눈앞으로 드러났다.

내 시선이 살짝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안쪽에 숨겨져있던 입술만큼이나 붉은 살덩이가 움찔움찔대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금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클레어에게 포상을 내려주었다.

키스라는 행위가 익숙치 않은 그녀가 호흡이 달려서  옷을 꽈악하고 움켜쥘 때까지 말이다.


"흐으.. 흐으.."

내가 내려준 포상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저렇게 얼굴을 몽롱한 색으로 물들인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보면 확실했다.

내친 김에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를 상대로 한 가지 지시를 더 내렸다. 내가 무슨 의도로 그런 것들을 부탁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지 몸을 움찔대던 것도 잠시 클레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칭찬하듯 의외로 말랑말랑한 볼을 손으로 슬며시 쓰다듬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럼, 저녁 때 뵐게요."


그리고는 짤막한 인사를 건넨 뒤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물론, 클레어가 손수 만들어준 것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클레어의 조력 덕분에 무사히 놀잇감을 손에 넣은 나는 나와 관련이 있는 여성들을  방으로 초대했다.


그런 식으로 방으로 부른 이가  명이나 되다 보니 혹시 다 모이면 방이 좁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실제로 앉혀놓고 보니 여유가 있다 못해 넘치더라.


아무튼 그렇게 마련된 자리의 분위기는 솔직히 말해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사실 좋을 수가 없는 조건이기도 했지만.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같은 그런 아슬아슬한 분위기라고 해야할까. 그리고 그런 분위기가 피어나고 있는 곳은 다름아닌 앨리스와 클레어의 중간지대였다.

클레어가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클레어를 바라보는 앨리스의 눈빛이 자뭇 살벌했다. 꼭 마치 네가 무슨 염치로 이 자리에 있는 거냐고 추궁이라도 하는 것처럼.


본래 클레어의 성격대로라면 앨리스가 자길 노려보기 시작한 순간 지지 않고 받아쳤을테지만 아무래도 쫄리는 게 있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보니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앨리스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고.

그렇다보니  사이에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서 둘 사이로 끼어들어 적당히 앨리스의 시선을 가로막은 뒤, 아까부터 자기들을  부른 건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디아나와 카트린느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그녀들을  방으로 초대한 이유를 밝혔다.

심심하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가장 먼저 맞장구를 쳐온  다름아닌 디아나였다.

"확실히.. 좀 지루하긴 하지. 몸도 살짝 찌뿌둥하고."


매일마다 일찌감치 일어나서 수련을 하는 것이 일상일 정도로 활동적인 그녀다.

헌데 며칠 째 열차 안에 틀어박혀서 제대로 몸을 움직이질 못하니 내심 답답했던 것일까.

그리 말하는 디아나의 얼굴 위에는 쓴웃음이 맺혀있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준비를 좀 해봤거든요.."


딱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말이었기에 클레어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물건을 꺼내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건.."

나무토막들이 켜켜이 포개져있는 모습이 살짝 생소했던 걸까.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건 카트린느였다.

아무래도 뭔가를 만드는 걸 즐기는 그녀다보니 관심이 안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었던 모양.

그런 그녀의 호응에 힘입어 꺼내든 나무토막들의 용도를 설명했다. 물론,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냐는 질문에 대비할겸 출처를 적당히 둘러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애초에 규칙 자체가 굉장히 간단했기에 설명할 것도 없긴 헀지만.

"그러니까.. 밑에 있는  빼서 위에다 쌓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네,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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