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56)화 (156/366)



〈 15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클레어는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 의외의 인선은 따로 있었으니까.


"누나도 간다고?"

"응, 학원 측에서 요청이 들어왔거든."


카트린느가 약사 역으로 참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솔직히 좀 얼떨떨했다.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녀가 오두막에 틀어박히는 걸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치 않았으니까.

혹시 저번처럼 나와 떨어졌다가 기껏 쌓아올린 것들이 또 엎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던 걸까.

그렇게 카트린느까지 참가가 확정되고 나니 남은 건 레이시아 뿐이었다.


레이시아만 합류하게 되면 말 그대로 히로인 후보들이 총출동하는 셈이니까.


거기에 이쪽에는 주인공과 나까지 있지 않던가?

그 정도 조합이면 사실상 지는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실제로 레이시아가 책임자로 합류하게될 가능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교국 측에서 참가자들의 신변을 최선을 다해 보호하겠노라고 선언했다 할지라도 결국은 외국이지 않은가. 국내에 있을 때보다 미진한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곳으로 사실상 유일하다시피한 후계자를 보낸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딴 선택을 할 리가 없었다.


레이시아의 동생이라는 꼬맹이가 무사히 자라날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그랬다가 레이시아에게 무언가 문제라도 생기는 날에는 자칫 잘못하면 왕실의 대가 끊기게 될지도 모르니까.


'여왕이 아직 젊은 편이라고는 해도..'


자식 문제는 마음대로 되는  아니니 말이다.


거기에 이미 레이시아한테 왕으로서의 역할을 떠넘기다시피하고 제 삶을 만끽하고 있는 그녀였다.

그게 벌써 몇 년째라고 그랬으니 슬슬 일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졌을 터.

헌데 레이시아가 교류전 건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동안 레이시아가 도맡아서 처리하던 일들은 다시금 그녀의 몫이  수밖에 없었다.

그걸 과연 여왕이 받아들이려고 할까?

'나같아도 기를 쓰고 막을 것 같은데..'


또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레이시아와 여왕을 제외한 왕족이라고 해봐야 이제   살을 넘긴 꼬맹이 뿐이니까. 여왕이 놀다 지쳐 미친 게 아닌이상 그런 꼬맹이한테 왕으로서의 일을 떠넘길리 없겠지.


그렇기에 레이시아는 여기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따라나서려고 해도 여왕이 허락하질 않을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시아가 참가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불태우고 있는 이유는 바로 제국 측 참가자들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대체 어디서 기인한 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황녀가 교류전에 참가할 예정이라나?


그것도  명이 아니라 무려 둘이나 말이다.


그게 교류전과 관련해서 도는 소문들 중에서 가장 핫한 놈이었고,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럼 우리도 왕녀님으로 맞상대를 해야하는 거 아니냐하는 여론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다.

자칭 제국 전문가라는 양반들의 의견에 따르면 소문이 사실이라면 교류전에 참가하는 건 1황녀가 아니라 2황녀나 3황녀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는 하지만 저쪽은 무려 두 명이다.


그 둘이 작정하고 이쪽을 찍어누르기로 마음먹는다면?

어지간해서는 대응하기 힘들 것이다.


대응도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할  있는 거니까.


레이시아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는 건  때문이었다.


직위에서 밀려서 교류전이 시작도 하기 전에 참가자들의 사기가 죽는 일이 생겨선 안 되지 않느냐.

그것이 레이시아의 참가를 바라는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명분이었고.


뭐, 사람들이 레이시아의 참가를 바라는 건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레이시아가 책임자 겸 참가자로 나서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위치가 좀 특별하다보니 레이시아가 학원에서 기록하는 성적같은 것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비교적 잘 알려져있는 편이니까.


왕국 내에서도 내놓으라 하는 인재들이 총 집합해있는 수도 학원 내에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1등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초인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바로 레이시아다.

그런 그녀가 마땅한 인재가 없다고 여겨지고 있는 토론 부문같은 걸 맡아준다면 사실상 1승은 거저먹고 들어갈 뿐만 아니라 약점까지 보완하게 되는 셈이니 왕국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그녀의 참가가 간절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겠지.


앨리스로부터 대충 그런 분위기가 맴돌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가장 먼저 머릿속으로 떠오른 것은 다름아닌 레이시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론의 흐름이 너무 착착 맞아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마치 누군가 뒤에서 그걸 주무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럴만한 동기를 지닌 인물은 딱 그녀 뿐이었다.


그토록 교류전에 참가하고 싶었던 걸까.


그보다는 그냥 나와 엮인 문제를 더 지체하지 않고 해결하기 위함이겠지. 이미  번이나 말했듯 나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는 늘어지면 늘어질수록 손대기 난감해지는 성질의 것이었으니까.

헌데 내가 여기서 교류전을 위해 왕국을 떠나게 된다면 최소 한 달은 떨어져있어야 할 거다. 그만한 행사가 하루이틀만에 끝날 리도 없을 뿐더러 행사를 주관하게된 교국 측에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다 대가며 일정을 최대한 길게 가져갈 가능성이 크니까. 거기에 왔다갔다하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더 걸릴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아도 내가 자꾸만 피해다녀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일 레이시아로서는 결코 그것을 바라지 않을 터.

그 점을 고려하면 그녀가 여론까지 주물러가며 자신의 참가를 확정지으려고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여왕이라는 이름의 문턱을 넘어서기에는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디아나의 증언에 따르면 레이시아는 최근 국내의 분위기가 이렇다는 식으로 여왕을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여왕 측에서 유력한 왕위계승권자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외국으로 내보낼  없다는 식으로 무적의 논리를 내세우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렇게 교류전이 걱정되면 참가자들이 왕국을 떠날 때 그들을 잘 격려해서 사기나 복돋아주라고 말했다나.

그게 지금 이렇게 역사 앞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해있는 우리의 앞에서 레이시아가 연설을 하고 있는 이유였다.


다들 왕국을 대표해 교류전에 참가하게된 이들의 면면이 그리도 궁금했던 것일까.


 번 신세진적 있는 치안대를 포함하여 왕도에서 근무하는 기사들이 소속을 가리지 않고 총출동하여 만들어낸 인간의 벽 너머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넘실거렸다.


덕분에 실감할  있었다.


레이시아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말이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온갖 소리들로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던 역사 앞 광장이 레이시아가 단상 위로 올라와 연설을 시작한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게 변했으니까. 동시에 도열해있는 이들의 면면을 열심히 뜯어보던 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레이시아 쪽으로 향하는 것이 살짝이지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렇게 레이시아를 향해 쏠린 사람들의 시선에는 자랑스러움이 듬뿍 묻어나오고 있었고 말이다.

아마 대중의 선망을 받는 지도자라는 말을 현실로 바꿔놓는다면 딱 지금 레이시아의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


제 어깨 위로 올려진 것의 무게에 휘청거릴 법도 하건만 레이시아는 그런 것따위는 느끼지 못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설을 이어나갔다. 레이시아는 무작정 승리를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의연한 표정과 목소리로 참가자들에게 할  있는 만큼의 최선을 부탁했을 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안 그래도 어마어마하게 몰려든 인파 탓에 아까 전부터 자리에 서 있던 이들의 얼굴 위로 조금씩 부담감이라는 이름의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었으니까. 아마 그대로 조금 더 방치해뒀으면 다들 부담감에 짓눌려 체라도 하지 않았을까.


책임질 일이 생기면 그건 자신이 알아서 할테니 너희들은 스스로가  수 있는 것만 하면 된다면서 참가자들의 부담을 자신이 나눠지려는 듯한 레이시아의 발언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녀의 발언을 기점으로 참가자들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으니까.

그런 식으로 연설을 끝마친 레이시아가 단상을 내려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참가자들을 위한 환호와 박수를 부탁하자 사방에서 휘파람소리와 함께 갈채가 쏟아졌다. 그또한 효과가 나쁘지 않았다. 몇몇 이들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소리가 꼭  것처럼 여겨졌는지 뭔가에 취한 듯한 표정이 그들의 얼굴 위로 떠올랐으니까. 과한 수준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크지만 저 정도면 오히려 딱 좋은 수준이었다.

사방에서 빗발치는 박수소리와 함께 레이시아가 단상을 내려가고, 그 뒤를 이어 단상 위로 올라온 것은 외무대신이라는 직함을 내걸고 있는 딱봐도 굉장히 꼬장꼬장한 성격일 것 같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보고 있으면 사감 선생님이나 학생주임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만드는 인상이라고 해야할까. 특히나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이 입을 열면 '나때는..'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생긴 것만 보면 이대로 훈화말씀이랍시고 시간을 한참 잡아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그러진 않더라.


얇은 입술을 움찔대는 꼴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한 것 같은데 그러자니 앞서 내려간 레이시아의 눈치가 보이기라도 했던 걸까.


결국 짧게 끝낸 그녀가 이만 출발하자는 말과 함께 단상 밑으로 내려갔다.


그런 그녀를 따라서 역사 안으로 향하니 미리 대기하고 있던 왕실 측 인원들이 우리 위로 꽃가루 같은 걸 흩뿌리기 시작했다.


교국과 맞닿아있는 국경까지 우리를 운반하기 위해 준비된 열차는 특별제였다.

혹시라도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컨디션이 나빠지진 않을까 불편함을 느낄만한 구석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것이 열차 내부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렇게 내 앞으로 배정된 곳에 챙겨온 짐을 쑤셔넣고 잠시 기차에서 빠져나와 한동안 맡기 힘들 바깥 공기를 만끽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잘해놨어도 기차 안에 마련된 화장실은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미리 해결이나 해두자하는 생각으로 화장실 쪽으로 향하니 화장실 대신 튀어나온 건 레이시아였다.


내가 인적이 뜸한 곳으로 발걸음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정체를 숨기기 위함인지 로브를 뒤집어 쓰고 나타난 그녀를 보니 왠지 '그때'가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멈칫하니 로브 아래로 보이던 레이시아의 얼굴이 굳어지는  확인할  있었다.

방금 내 반응을 자신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해석한 것일까.

연분홍빛 입술이 그녀의 이빨에 짓눌려 일그러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의 착각에 그대로 어울려주기로 했다.

"회, 회장님..?"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존재를 당혹스럽게 여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를 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굳어있던 레이시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린 그녀가 날 향해 물어왔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냐고.

"..지금요?"

"그래."


물론 그 말에도 난감해하는 반응을 내비췄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자체를 껄끄러워하는 것처럼.


"하, 하지만 곧 열차가 출발할텐데.."


그러니까 너랑 이야기  수 없다고, 아니 하기 싫다고 은근슬쩍 돌려 말하니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문 레이시아가 날 향해 성큼 다가왔다.


"잠깐이면 된다. 잠깐이면 되니까.."


동시에 내 옷자락을 꼬옥하고 움켜쥐며 그리 말하는 것이 제법 간절해보였다.


그렇다고 그 요청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어떻게 떨쳐내는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자니 레이시아의 뒤쪽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의 것이었다.


내게 배정된 방에 들렸다가 내가 없으니 찾으러 나온 걸까.

"죄, 죄송해요. 이만 가봐야할  같아요."

 목소리에 반응한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레이시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떨쳐낸 뒤 그대로 그녀의 옆을 지나치려 하니 설마 내가 제 손을 떨쳐낼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한채 굳어있던 레이시아가 다급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물론 그 마저도 떨쳐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척 흠칫하고 몸을 떨며 아까보다 한결 거칠게 그녀의 팔을 떨쳐내니 레이시아의 얼굴 위로 황망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을 목격하고는 놀란 척 굳어있다가..


"다녀와서.. 다녀와서 이야기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 저 멀리서  부르고 있는 디아나를 향해 달려갔다.


타다닥-

내 발자국 소리만이 어느새 인적이 뜸해진 역사 안으로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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