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국 쪽에서 이왕이면 얘들이 좋을 것 같다는 식으로 내밀어온 목록에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자체는 솔직히 그리 놀랍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애초에 먼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쪽의 유망주가 누구누구인지 얼추 파악이 끝난 상태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 증거로 놈들이 내밀어온 목록에는 무려 주인공 놈의 이름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부 소속이라는 이유로 일단 끼워넣고 본 건 아닐 거다. 분명 최근에 치러진 월말평가에서 놈이 앨리스를 상대로 승리를 따냈던 게 반영된 것이겠지.
뭐, 아무튼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라..
'이걸 거절할 수가 없다는 거지.'
그래, 진짜 문제는 바로 그거다.
제국 측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명분이 마땅치 않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제였다.
그리고 아마 그게 최근들어 시도때도 없이 날 찾아오던 레이시아의 발걸음이 어제를 기점으로 뚝 끊긴 이유일 것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제국 측의 제안을 거절할만한 이유를 쥐어짜내느라 골머리를 싸매고 있지 않을까.
집무실이나 회의실 같은 곳에 틀어박힌채 말이다.
분명 그럴 거다.
내가 빠져있다면 모를까 내가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레이시아에게 있어 제국 측에서 건넨 제안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지 오래일테니까.
자기도 지금 못 먹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태인데 다른 년한테 내어준다?
'절대 안 내주지.'
미쳤다고 그럴까.
내가 레이시아였어도 입에 거품을 물며 반대부터 외치고 봤을 거다.
최근들어 많이 초조해보였던 점을 고려하면 아마 제국 측에서 건네온 제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순간 눈을 까뒤집지 않았을까.
그 점을 고려하면 레이시아는 어떻게든 제국 측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할테지만..
'쉽지는 않을 텐데..'
그녀의 의지와는 별개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제국 측의 진의가 어찌되었건 간에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전해져온 제안이니만큼 그걸 거절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합당한' 명분이 필요하니까.
어찌어찌 그걸 마련해내는데 성공했다 치더라도..
'실제로 써먹을 수 있을지는 또 별개니까.'
그럴 듯한 명분을 마련해내는데 성공했다면?
그걸 또 검토해봐야 한다.
혹시라도 어렵사리 마련해낸 것을 내세워 제국 측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이쪽이 굽히고 들어가는 모양새가 되지는 않을지 말이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이쪽이 굽히고 들어가는 모양새가 되어버린다면?
난리가 날 거다.
말하지 않았던가.
제국 측의 제안에 대해 들은 이들 중 대부분이 이미 왕국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다고.
한 마디로 다들 이미 국뽕 한 사발씩 들이키고 거나하게 취해있는 상태라는 건데 그런 여론이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쪽이 굽히고 들어가는 느낌으로 제국 측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분명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이 득달같이 들고 일어설 터.
아니, 애초에 거기까지 가지도 못할 가능성이 컸다.
디아나가 지나가듯 덧붙인 말에 따르면 당장 대신들부터가 찬성을 부르짖고 있다고 그랬으니까. 그들이 찬성하는 이유야 뻔했다. 말 그대로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이겠지.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교류전에 참가하라고 내보낸 자신의 후계자가 우연찮게 신탁에서 말하는 남성과 밤을 보내고 신탁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게 될지도 모르지.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원래 인간은 자기 편한대로 생각하는 법이니까.
복권을 구매하자마자 당첨되면 그 돈을 어디다가 쓸지 생각하는 것처럼 벌써부터 꿈에 젖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터.
그런 분위기 만연하는 상황에서 레이시아가 거절하고자 하는 의사를 내비친들 그게 과연 제대로 받아들여지기는 할까.
솔직히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많은 이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왕실은 제국 측의 제안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학원을 빠져나갔던 레이시아가 며칠 째 사저로 돌아오질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찬성을 부르짖는 대신들을 상대로 기를 쓰고 버티며 시간을 끌고 있는 모양인데..
제안을 했던 제국 입장에서는 왕국의 일처리 방식이 영 답답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제국 측에서 새로운 제안을 건네왔다는 소식이 다시 한 번 학원을 휩쓸었다.
그와 함께 새롭게 등판한 뉴페이스는 다름아닌 교국이었다.
쉽게 말해 옆집 친구가 자신의 제안을 들은 척도 안 하니 근처에 사는 왕년에 꽤나 잘 나갔던, 지금은 예전보다 한물 가긴 했어도 그래도 동네에서 나름 알아주는 할아버지를 중재자랍시고 끌어들인 것이다.
덕분에 거절할 명분이 더욱 줄어든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국가간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편인 교국이 대승적인 차원에서 제국이 부탁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이 판에 발을 들여놓은 시점에서 교류전에 관한 문제는 더이상 국가와 국가간의 문제가 아닌 인류 차원의 문제가 되어버렸으니까.
거절했다간 어지간한 이유가 아니고서야 욕 들어먹기 딱 좋은 상황이 완성되어버린 것이다.
아니, 무슨 이유를 대던 간에 거절하는 순간 욕을 먹는 건 확정일 거다. 거절을 외치는 순간 교국과 제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까지 득달같이 들고 일어서서 왕국의 행태를 비판하겠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제국이 교국의 손을 잡은 이유가 그걸 위해서일테니까.
아무리 그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고는 해도 교국은 교국이다. 이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믿는 여신교의 총본산이라는 위치를 적당히 휘두르기만 해도 자신의 논조에 힘을 실어줄 동조자를 찾는 건 일도 아닐 터.
그리고 그리 된다면?
'개망신이지 뭐.'
그 사실을 지금쯤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을 왕국의 수뇌부라고 해서 모르지 않을 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리고 있는 레이시아의 얼굴이 눈앞으로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허나 고민만 하고 있을 시간은 없을 거다.
교국에서 중재안이랍시고 제안한 것의 내용이 '그것'인 이상 그쪽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크니까. 그 내용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교국으로서는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이 될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내 예상은 결국에는 제국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차츰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암만봐도 빠져나갈만한 구석이 보이질 않았으니까.
다 좆까라고 어거지를 쓰면서 저쪽에서 뭐라고 떠들던 귀를 싹 닫아버리면 저쪽이 어쩌겠냐만은 아무리 나로인해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는 게 힘들어진 상태라 할지라도 그런 식으로 막나가지는 않을테니..
'결국에는 받아들이겠지.'
이윽고 왕실 측에서 내린 결단은 딱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레이시아의 진의가 어땠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녀는 제국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노라고 선언했다.
물론, 무조건적인 승낙은 아니었다.
교류전에 참가할만한 이들을 선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제국 측에 잠깐의 유예를 요청했으니까.
'시간벌기네.'
제국 측에서 내보낸 이들과 맞붙어도 지지 않을만한 이들을 골라내면서도 겸사겸사 선발전이 치뤄지는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날 빼돌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 좋은 수는 아니었다. 급하게 쥐어짜낸 탓에 상대방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었으니까.
그렇다보니 차라리 안 두는 것만 못한 수가 되어버린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요청은 결국 받아들여지긴 했다.
대신 교국 측에서 파견한 인원이 선발전을 참관하게 됐지만.
덕분에 명단에 있는 이들을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전부 한 입씩 맛보고 말겠다는 제국 측의 확고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교류전에 참가할 이들을 선별하기 위한 선발전이 치뤄지는 것이 확정되니 안 그래도 최근들어 소란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던 학원은 한층 더 떠들썩해졌다.
왕실 측에서 교류전에 참가해서 왕국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이들에게 어마어마한 혜택을 제공하겠노라고 약조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힘입어 선발전에 참여하기 위한 상경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나도 그 분위기에 편승하는 척을 했다.
선발전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니 가장 먼저 돌아온 반응은 걱정이었다.
원래 몸이라면 모를까 몸이 쪼그라들고 허약해진 상태인데 참가했다가 크게 다치는 것 아니냐면서 걱정을 표하는 여성들의 말에 살짝 자존심이 상한 척을 해보였다.
동시에 열심히 카트린느를 쪼았다.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약을 기대하고 그런 건 아니었고, 어떻게 중화제라도 마련해보려고 그랬던 것인데 다행히 효과는 확실했다.
옆에서 시도때도 없이 열심히 쪼아대니 결국에는 내게 맞는 중화제를 받아낼 수가 있었으니까.
다만 급하게 만들어낸 것이다보니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른다는 게 카트린느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덧붙인 말이었다.
"그러니까 마실 때 최대한 신중하게 생각하고.."
그렇지만 딱히 개의치 않았다.
최악의 부작용이랍시고 언급한 게 몸이 민감해진다거나 하는 것이었으니까. 까짓거 그리 되면 디아나나 앨리스한테 부탁하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그보다는 어떻게든 선발전이라는 문턱을 넘는 게 중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정도 사건이면 주인공 놈의 참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주인공 놈이 참가한다는 건?
사건이란 사건은 죄다 몰고 다니는 주인공이라는 놈들의 특성을 떠올려보면 교류전이 펼쳐지기로 예정된 교국의 수도에서 뭔가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매우매우매우 크다는 뜻이고.
뭐, 그런 걸 떠나서 애초에 행사 자체가 뭔가를 저지르기에 딱 좋은 조건이기도 했다.
이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국가의 유망한 인재들이 여신교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교국에 모여 자웅을 겨루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반사회적인 짓을 일삼는 반동 놈의 새끼들한테는 일 벌이기에 딱 좋은 잔치판처럼 보일 수밖에 없겠지.
일단 성공하기만 한다면 중재자랍시고 행사를 주관하게된 교국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제국하고 왕국에게 상당한 손해를 입힐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니 일이 터지는 건 확정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사교도란 족속들은 제가 섬기는 악신의 이름을 널리 떨치는데 인생을 거는 놈들이니까.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다음 회차로 넘어갈 때 쓰일 공헌도를 벌 수 있다는 소리지.'
당장은 잠잠해지긴 했지만, 이미 그런 일이 있었던만큼 언제 다음 회차로 직행하게 될지 몰랐다. 그러니 벌 수 있을 때 벌어두는 게 맞았다.
이번 회차의 주인공 놈은 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인지 몰라도 주인공이라는 위치에 걸맞지 않게 굉장히 수동적이었으니까.
이쯤되면 주인공이라는 위치가 가져다주는 자신감에 쩔어서 온갖 곳을 다 기웃거리면서 참견질을 해대야 정상인데 말이다. 진에게서 딱히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두 손 놓고만 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 뭔가를 하긴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이 세계를 둘러싼 문제하고는 상관없는 것이다보니 진행 자체가 되질 않는다고 해야할까.
게임으로 따지면 메인 스토리는 무시하고 생활 퀘스트 같은 거나 깨고 다니는 격이니 사건이 발생할 리 있겠는가.
그런만큼 이번 교류전은 내게 있어서도 꽤나 중요한 기회라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진이 보여준 성향을 고려하면 이 정도로 대량의 공헌도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선발전에 전력으로 임했다.
역시 카트린느가 만든 약이라고 해야할까.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졌습니다."
선발전에 참가하기 위해 수도로 상경한 이들한테는 참 미안한 일이었지만 누굴 만나든 간에 만나는 족족 쳐부수며 위를 향해 올라갔다.
오랜만에 느끼는 원래 몸의 성능은 상당히 각별했다. 그래서 더욱 날뛰었던 감도 없잖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몸에서 아무리 움직여도 힘이 들지 않는 몸으로 돌아오니 꼭 온몸에 모래주머니를 매단 채로 생활하다가 그걸 푼 것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좀 더 과장해서 말하면 중력 자체가 약해진 것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감히 뭐라 설명하기 힘든 그 가뿐함을 만끽하면서 열심히 날뛰었다.
그러다보니 기사부에서 교류전에 참가할 이들의 윤곽이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참가를 확정지은 건 의외로 앨리스였다.
지원자가 워낙 많았기에 편의상 네 개로 나뉘어진 조 중에서 첫 번째 조에 속하게 됐던 그녀는 특유의 비도술을 선보이며 철저하게 상대를 찍어눌렀다.
앨리스 다음으로 참가를 확정지은 건 디아나였다.
앨리스하고 다르게 의외로 그녀는 중간에 좀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대방이 뛰어나서 그랬다기 보다는 상대방이 무기랍시고 들고 나온 물건이 상당히 생소한 물건이었던 탓이었다.
'사슬낫이라니..'
디아나를 고전케 만들었던 남부 학원 소속 생도의 무기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다음으로 등판한 것은 세 번째 조에 속한 이들이었다.
심판을 보겠답시고 나선 교국 측 인사의 부름에 응해 연무대 위로 오르는 주인공 놈의 모습을 바라보며 슬며시 몸을 뒤로 젖혔다.
'어디..'
그동안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 번 볼까.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대련에서 승리를 거머쥔 것은..
"승자! 진 후르온!"
말할 것도 없이 주인공 놈이었다.
당연히 자기가 이길 거라 생각했는지 단 한 톨의 기쁨도 얼굴 위로 드러내지 않은 채 그대로 연무대 밑으로 내려가는 놈의 모습을 보며 비로소 확신했다.
교류전에서 습격이든 테러든 간에 뭔가 터지긴 터질 거라고.